우리가 범죄하였도다
본문: 창세기 42:18-25
수학자 존 내시(John Nash)는 '죄수의 딜레마'라는 게임 이론을 고안했습니다. 이 이론은 다음과 같은 상황을 전제합니다. 두 명의 용의자가 경찰에 체포되어 각각 다른 방에 격리된 채 심문을 받습니다. 이들 앞에는 세 가지 경우의 수가 놓여 있습니다. 한 사람이 자백하고 다른 한 사람이 끝까지 버틸 경우, 자백한 사람은 즉시 석방되지만 버틴 사람은 10년 형을 받습니다. 두 사람 모두 자백할 경우에는 각각 5년 형을 받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끝까지 자백하지 않고 버틸 경우에는 각각 1년 형만 받습니다.
만일 우리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습니까? 죄수의 입장에서 보면 두 사람 모두 끝까지 버티는 것이 양쪽 모두에게 이익입니다. 하지만 결과를 열어보면 두 사람 모두 자백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한 사람이 상대방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쪽 방에서 버티고 있는데 저쪽 방에 있는 사람이 자백하고 나가 버리면, 나만 10년을 감옥에서 보내야 합니다. 그래서 서로 다투어 자백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요셉의 형제들이 바로 이 죄수의 딜레마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애굽에 곡식을 구하러 온 사람들입니다. 먹고살기 위해 양식을 사러 왔을 뿐, 달리 아무런 의도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이들에게 정탐꾼이라는 혐의를 씌웁니다. 간첩으로 이 땅을 정탐하러 왔다는 것입니다. 형제들에게는 달리 방도가 없었습니다. 요셉은 이들을 사흘 동안 옥에 가둔 후 한 가지 과제를 주었습니다. 한 사람만 나가서 고향에 있는 막내동생을 데려오면 나머지를 모두 풀어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 명을 뽑아 집으로 보내면 될 일이지만,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 있는 이들은 서로를 신뢰하지 못합니다. 나간 사람이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돌아오지 않으면 나머지 아홉 명은 이곳에서 평생 노예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두려웠습니다. 누구도 대표를 뽑을 수 없었고, 서로 자기가 나가겠다며 다투었습니다. 회개하지 않은 자들의 모습이 이와 같았습니다.
생명을 보전하는 경외
요셉은 이들의 태도를 보고 하나의 힌트를 흘려줍니다.
"사흘 만에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 너희는 이같이 하여 생명을 보전하라" (창 42:18)
요셉이 뜬금없이 "나는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여기서 '경외하다'는 히브리어 '야레'(ירא)로, 창세기 22장 12절에 등장하는 바로 그 단어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바치려 할 때,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어 말씀하셨습니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 22:12)
이때 사용된 '경외하다'가 바로 '야레'입니다.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만 두려워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고백은 애굽의 총리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결코 이 '야레'라는 단어를 입에 담지 않습니다. 요셉은 이렇게 자신의 정체를 은밀히 흘려주고 있었습니다. 형제들이 이 말을 알아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요셉은 이 선언을 통해 자신에게 그들을 해칠 의도가 없음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며,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이니, 이같이 하여 생명을 보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어서 요셉은 두 번째 과제를 제시합니다.
"너희가 확실한 자들이면 너희 형제 중 한 사람만 그 옥에 갇히게 하고 너희는 곡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안의 굶주림을 구하고 너희 막내 아우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 그러면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니 그들이 그대로 하니라" (창 42:19-20)
첫 번째 과제와 두 번째 과제가 달라졌습니다. 처음에는 한 사람만 나가는 것이었는데, 이번에는 한 사람만 잡혀 있고 아홉 명을 보내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형제들은 반색했습니다. 아홉 명이 나갈 수 있다니, 누가 남을지는 그다음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그대로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쉬운 일이겠습니까? 남을 한 사람을 선택하는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왜 숫자 1과 9를 바꾼 것일까요? 요셉이 이렇게 한 것은 형제들의 영적 상태와 관련이 있습니다. 요셉은 그들의 영적 상태가 심각하게 무너져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지금 한 명을 보내서 막내동생을 찾아오게 하고 자신이 동생임을 밝히면 간단히 끝날 일처럼 보였지만, 형제들의 상태를 볼 때 그렇게 쉽게 마무리될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우선 아홉 명을 보내어 아버지 야곱과 가족들의 생명을 살리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아홉 명이 각자 곡식 한 자루씩 가져가면 아홉 자루를 운반할 수 있고, 그것으로 가족이 당분간 버틸 수 있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생명을 살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생명을 존중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생명의 주인이시지 않습니까?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독생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이유도 잃어버린 영혼,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고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요셉이 지금 하고 있는 이 모든 일은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애굽의 총리로 일하면서 풍년과 흉년을 관리하며 근동 지방의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들에게 이렇게 하는 이유도 그들의 영혼을 살리고, 도탄에 빠진 가족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교회도 생명을 살리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이 나로 인하여 생명이 살아나는 복과 은혜가 함께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1년 만의 직면
이제 형제들에게 남아 있는 과제가 있습니다. 남을 한 명을 찾아야 합니다. 아홉 명을 보내준다는 말에 선뜻 대답은 했지만, 실제로 그 한 명을 정하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창 42:21)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이 고백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형제들이 21년 동안 이 말을 단 한 번도 입에 올린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21년 전 그들은 스무 살 남짓한 동생 요셉을 애굽으로 팔아 버렸습니다. 그 이후로 그들은 이 고통스러운 과거의 기억을 누구 하나 입에 올리기를 꺼려했습니다. 자신들의 잘못이 분명한데도, 그 불편한 기억을 직면하기가 너무 괴로웠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죄를 자기 입으로 고백하며 "우리가 범죄하였나이다"라고 말한 적이 21년 동안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드디어 그들이 21년 전의 과거를 직면하기 시작합니다. 회개의 시작은 자기를 돌아보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서 어떻게 회개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옛 모습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추악한 민낯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것을 묻어두고 산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21년 동안 묻어두고 있는 사이에 그들의 삶은 썩어가고 뼈가 녹아내리는 세월을 보냈습니다. 한 번도 자신의 죄를 들추어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이렇게 되니까, 아홉 명은 나가는데 누군가 하나가 남아야 하니까, 혹시 그 한 사람이 자기가 될까 봐, 옛날 동생을 건져주지 못하고 애굽으로 보내 버린 일이 비로소 떠오른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그들의 회개가 시작됩니다.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더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핏값을 치르게 되었도다 하니" (창 42:22)
르우벤은 '죄'라는 단어를 꺼내고, "그의 핏값을 치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습니다. 회개의 분위기가 형성됩니다. 과거에 지었던 죄가 그들 스스로를 덮쳐오고 있습니다. 걱정과 근심이 열 명의 공동체를 휘젓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근심은 대단히 생산적인 근심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고후 7:10)
우리는 모두 크고 작은 근심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근심의 종류가 무엇인지 한번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가 하는 걱정과 근심이 회개를 향한 것인지, 아니면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것인지 말입니다. 오늘 이 형제들의 근심은 회개를 향한 생산적 근심입니다. 그러나 많은 세상 사람들은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어떻게 하면 더 잘 살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누릴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경쟁 사회에서 상대방을 누르고 승리할 수 있을지, 이런 것을 가지고 걱정하며 밤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회개를 향한 근심을 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추어 봅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근심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요 선택받은 자녀인데 왜 이 모양 이 꼴로 살고 있는가 하고 자신을 돌아봅니다. 그렇게 근심하고 회개하면, 회개는 우리를 회복시킵니다. 영혼을 새롭게 합니다. 하나님 앞에 다시 서게 하고, 새로운 존재로 변화시켜 줍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근심이 우리에게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
여기에 요셉의 진심이 있었습니다. 요셉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애굽의 권력자, 총리가 아닙니까? "내가 형님들의 동생입니다. 내 동생 베냐민이 보고 싶습니다. 데려와 주십시오. 아버지도 모시고 오십시오." 이렇게 한마디만 하면 끝날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 간단한 문제를 왜 이토록 복잡한 과정을 거치게 만드는 것일까요?
순서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자에게 은총과 은혜가 내려진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가 됩니다. 형제들이 21년 전의 그 죄를 철저하게 회개해야, 그다음에 은혜와 복이 내려져야, 그것이 그들에게 진정한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지속적으로 형제들을 자극하여 그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도록 이끌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러하셨습니다. 마가복음 2장에 보면, 한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온 친구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친구가 중풍병으로 누워 있으니 친구들이 몹시 안타까워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중풍병자를 들것에 실어 주님 앞에 데려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수님께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친구들은 지붕 위로 올라가 지붕을 뜯고, 줄을 매어 중풍병자를 달아 내렸습니다.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막 2:4-5)
지금 우리가 이 말씀을 읽으면 은혜가 됩니다. 하지만 그 현장에 있었던 중풍병자와 그 친구들에게 이 말씀이 과연 은혜로 들렸을까요? 그들이 간절히 바랐던 말씀은 "중풍병자여, 어서 일어나라!" 이것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 말씀을 하시기 전에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를 먼저 선포하셨습니다. 그들은 병을 고치려고 온 것이지, 죄 사함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 사함을 먼저 선포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첫 번째 일은 우리 영혼의 문제입니다. 영혼이 하나님 앞에 죄 사함을 받아야 그다음 문제가 해결됩니다. 예수님은 그 순서를 무척 중요하게 여기시는 분입니다. 죄 사함을 선포하신 후에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막 2:11-12)
이제 비로소 그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질서의 하나님, 순서를 중요하게 여기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 영혼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선 이후에야 우리 인생의 막힌 문제를 뚫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오늘 요셉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인생에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있느냐? 고통의 문제들이 있느냐? 그러면 먼저 네 자신을 돌아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아우의 일로 범죄하였도다"라고 고백하듯, 영혼이 깨끗함을 입을 때 우리에게 막혀 있는 여러 문제들이 풀리고 해결될 줄로 믿습니다. 주께서는 그 순서를 분명하게 지켜 가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이 형제들은 과제를 해결했습니까?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끌어내어 그들의 눈 앞에서 결박하고 명하여 곡물을 그 그릇에 채우게 하고 각 사람의 돈은 그의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또 길 양식을 그들에게 주게 하니 그대로 행하였더라" (창 42:24-25)
그들이 과제를 제대로 해결했다면 요셉이 울 이유가 없었습니다. 요셉이 운 까닭은 자신의 21년 전 처지가 떠올라서도 아니고, 형제들이 가여워서도 아닙니다. 형제들이 회개하지 않아서, 여전히 남을 한 사람을 스스로 택하지 못해서, 그들의 영혼이 가련하고 불쌍해서 운 것입니다. 그들에게 한 명을 정했느냐고 물었으나 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요셉이 시므온을 끌어내어 그들의 눈앞에서 결박해 버렸습니다.
왜 시므온이었습니까? 왜 레위가 아니고 왜 르우벤이 아닙니까?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핵심은 시므온이든 레위든 르우벤이든, 열 명 모두가 진정한 회개에 이르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눈앞에서 시므온이 끌려 나가고 결박당합니다. 나머지 아홉 명의 형제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다행이다, 내가 아니니 다행이다"라고 안도했을까요? 시므온이 불쌍해서 눈물을 흘렸을까요? 그들의 속마음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의 회개에 진정성이 없었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상황을 가리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0-21)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회개에는 합당한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그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이들은 입으로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아우의 일로 범죄하였도다." 그렇다면 열 명이 서로 자기가 남겠다고 나서야 했습니다. 내 죄 때문에 동생이 팔려가서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데, 지금 이 일로 고통받고 있으니 내가 남겠다, 내가 잡혀 있겠다고 서로 나서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그런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요셉이 통분히 여겨 운 것입니다. 21년이 지나도 이 형제들의 모습이 어쩌면 이렇게 말뿐인지, 어쩌면 이렇게 행동은 없고 열매는 없고 껍데기밖에 없는지, 그것 때문에 요셉이 운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요셉의 눈물을 통해 하나님의 눈물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입으로는 "주여, 주여" 부르짖지 않습니까? 입으로는 찬양하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 앞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는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삶으로 열매를 보여 드리며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눈물을 흘리실 것입니다.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우리 삶의 열매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기뻐하실 수 있도록, 우리가 회개했다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우리도 요셉의 형제들처럼 "우리가 범죄하였나이다" 하고 입으로는 고백합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한 사람도 내가 남겠다고 나서는 이가 없었습니다. 요셉의 눈물을 통해 하나님의 눈물을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구하시는데, 그 열매를 맺어 드리지 못하고 올려드리지 못한 채 입으로만 신앙생활하고 있는 우리의 영악하고 완악한 모습을 봅니다. 아버지, 용서하여 주옵소서. 진정한 회개가 삶의 열매로 나타나게 하옵시고, 그로 인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백성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