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어찌하여
본문: 창세기 42:26-38
스무고개(Twenty Questions)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 놀이 자체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스무고개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이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누가 어떤 계기로 시작하게 되었는지 확실한 기원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1950년대 영국 BBC 라디오 방송에서 이와 유사한 프로그램 코너가 시작되었고, 그 프로그램이 영국 전역과 유럽에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후 우리나라 KBS 라디오 방송국에서도 같은 형식의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스무고개는 우리 일상에까지 보편적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스무고개를 잘하는 사람이 있고, 잘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스무고개를 잘하는 사람입니까? 질문을 잘해야 합니다. 그리고 추론을 잘해야 좋은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정답을 '코끼리'로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질문을 한다고 해 봅시다. 질문하는 사람은 정답을 모릅니다. "살아 있는 것입니까, 생명이 없는 것입니까?" 살아 있는 것이라고 하면, "동물입니까, 식물입니까?" 동물이라고 하면, "산에 삽니까, 들판에 삽니까?" 들판에 산다고 하면, "고향이 우리나라입니까?" 외국이라고 하면 또 그다음 질문을 던지면서 범위를 좁혀 가야 비로소 정답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추론의 능력이 부족하거나 성격이 급한 사람은 이렇게 하나하나 조건을 물어가지 못합니다. 한두 번 질문하다가 곧바로 답을 던져 버립니다. "사자!", "호랑이!", "고양이!", "개!" 이런 식으로 무작정 답을 외치는 순간, 스무 번의 기회는 점점 줄어들고, 나중에는 기회를 모두 잃게 됩니다. 우리 인생이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의 인생을 이끌어 가실 때, 정답을 쉽게 알려 주지 않으십니다. 한 고비를 넘어가면 저 앞에 모퉁이가 또 나오고, 모퉁이를 힘겹게 돌아가면 갈림길이 나타납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그 앞에 서서 고민하고 망설이며 한 길을 걸어가면 또다시 높은 산이 나타납니다. 강도 만나고, 그렇게 우리 인생은 한 걸음 한 걸음 고비를 넘어갑니다.
그렇게 믿음 생활을 하면서 산을 만나고, 강을 만나고, 갈림길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디로 가야 합니까?" 그때마다 우리를 인도하시고 이끌어 주셔서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리까지 조금씩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들이 걸어가는 인생 여정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요셉의 형제들을 바로 그렇게 인도해 가십니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고 갈림길을 지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에까지 이르게 하십니다. 마치 스무고개를 내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어리석고 미련하여 중간에 멈춰 버렸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미련하고 답답한 모습이 이들에게서만이 아니라 우리에게서도 발견됩니다.
두려움 앞에 멈춰 선 형제들
요셉은 형제들을 만나서 딱 한 가지만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달라졌는가, 그대로인가. 21년 전 자신을 팔아넘길 때 그때의 모습 그대로인가, 아니면 그 기간 동안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사람이 좀 바뀌었는가.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요셉은 두 가지 시험을 합니다. 첫째, 한 사람만 뽑아서 고향에 가서 막내동생을 데려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실패했습니다. 둘째, 한 사람만 남고 나머지가 가서 막내를 데려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실패했습니다. 이들은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21년 동안 묻어놓고 살았을 뿐,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그것이 가련하고 가슴 아파서 슬프게 울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형제들의 눈앞에서 한 사람을 끌어냅니다. 시므온이었습니다. 시므온을 끌어내어 결박했습니다. 형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기들 앞에서 시므온이 결박되어 끌려나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아홉 명의 형제들은 자루에 곡식을 가득 싣고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거기에서 시작합니다.
"그들이 곡식을 나귀에 싣고 그 곳을 떠났더니" (창 42:26)
이들의 발걸음이 가벼울 수 있었겠습니까? 원하던 곡식을 얻었습니다. 나귀에 실었습니다. 그리고 길을 떠납니다. 그런데 눈앞에 시므온의 모습이 아른거립니다. 조금 전에 시므온이 자기들 눈앞에서 끌려가는 장면이, 형제들 중 누구 하나 "내가 여기에 남겠다"고 자원한 사람이 없어서 결국 시므온이 붙잡혀 갔다는 사실이 마음을 짓누릅니다. 21년 전 요셉을 은 이십에 팔아 버릴 때, 요셉이 살려 달라고 소리쳤던 그 절박한 외침을 외면했던 그때의 모습이 함께 겹쳐 옵니다. 그래서 이들은 무거운 마음을 안고 길을 떠납니다.
길을 가다가 한 여관에 이르렀습니다. 거기에서 그들은 한 번 더 충격을 받습니다.
"한 사람이 여관에서 나귀에게 먹이를 주려고 자루를 풀고 본즉 그 돈이 자루 아귀에 있는지라" (창 42:27)
곡식을 사기 위해 돈을 준비해 갔을 것입니다. 돈을 분명히 지불했습니다. 그래서 곡식을 사 왔습니다. 그런데 자루를 풀어 보니 곡식도 그대로 있고 돈도 그대로 있습니다. 무언가 착오가 생겼다고 가볍게 생각하면 좋으련만, 이들은 지금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형제가 다른 형제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자, 모두가 같은 반응을 보입니다.
"그가 그 형제에게 말하되 내 돈을 도로 넣었도다 보라 자루 속에 있도다 이에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서로 돌아보며 말하되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 하고" (창 42:28)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첫 번째는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이런 착오가 있었을 때, 그들은 오히려 기뻐해야 합니다. 곡식도 가져오고, 곡식을 사기 위해 지불한 돈도 다시 자루 속에 들어와 있으니 횡재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형제를 은 이십에 팔아 버렸던 이들이니, 돈을 좋아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지금 이 돈이 하나도 반갑지 않습니다. 두렵기만 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일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칩니다.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 하나님이 이 일을 주도하고 계시다고 고백합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 지난 며칠 동안 이들의 인생에 일어났던 일들을 돌아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갑자기 정탐꾼이라는 누명을 뒤집어썼습니다. 갑자기 감옥에 사흘 동안 갇혔습니다. 온 세상의 모든 권력을 다 가진 것처럼 보이는 이집트(Egypt)의 총리가 갑자기 집에 있는 막내동생을 데려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시므온을 가둬 버렸습니다. 곡식 자루 속에 돈다발이 들어가 있습니다. 당혹스럽기 이를 데 없습니다. 왜 자꾸 내 인생에 이런 일이 생기는지, 왜 이렇게 자꾸 코너로 몰아가는지, 이들은 지금 극도로 당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편안하게 여관에 머무를 수가 없습니다.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가서 아버지에게 이 일을 알려야 합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돌아와 그들의 아버지 야곱에게 이르러 그들이 당한 일을 자세히 알리어 아뢰되" (창 42:29)
아버지에게 이집트에 내려갔던 일, 거기서 겪었던 일, 올라오면서 경험했던 일을 상세하게 아버지께 아뢰었습니다. 그런데 더 놀랄 만한 일이 벌어집니다.
"각기 자루를 쏟고 본즉 각 사람의 돈뭉치가 그 자루 속에 있는지라 그들과 그들의 아버지가 돈뭉치를 보고 다 두려워하더니" (창 42:35)
이제 이들은 완전히 멈춰 버렸습니다. 생각 자체가 더 이상 확장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자루에만 착오로 돈이 들어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홉 명 형제들의 각 자루마다 돈뭉치가 들어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들은 두려움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이 사람들의 문제입니다.
질문하지 않는 신앙의 비극
신앙생활이란 하나님께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에 예기치 않은 일들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일어날 때, 내가 생각하지 않았던 일이 자꾸만 내 인생에 다가올 때,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왜 자꾸 이런 일이 나에게 찾아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물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질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 묻지 않습니다. 그저 두려워만 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이나 아버지 야곱이나 마찬가지로, 그들은 두려워만 할 뿐 하나님께 이 문제를 가지고 엎드려 기도하고 질문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이들의 문제입니다.
인생의 갈림길 가운데 섰습니다. "하나님, 왼쪽으로 가야 합니까, 오른쪽으로 가야 합니까?"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습니다. 그냥 그 자리에 머물러서 두려워만 하고 있는 것, 이것이 이들 인생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3장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세족식을 행하셨습니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한 사람 한 사람 발을 씻어 주시고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4장에 이르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간다" 말씀하십니다. "내가 가는 길을 너희가 안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그 말씀을 듣고 아리송했습니다. 아는 것 같기도 하고 모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모른다고 하기에는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예수님, 저 모르겠는데요" 하고 손들고 말하기가 몹시 부담스러운 분위기였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가만히 있었습니다. 질문하지 않고, 모르면 물어봐야 하는데 아무도 질문하지 않고 그대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침묵을 깬 한 제자가 있었으니, 바로 도마였습니다.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5-6)
도마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질문합니다. "모르겠습니다, 예수님. 저희가 그 길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도마가 알 수 없다고 솔직하게 물었기에, 예수님께서 대답해 주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의 이 위대한 말씀, 요한복음 14장 6절의 말씀은 도마의 질문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도마가 질문하지 않았더라면, 도마가 모른다고 묻지 않았더라면, 예수님의 이 주옥같은 말씀이 어떻게 성경에 기록될 수 있었겠습니까?
일주일 동안 살면서 아무 일도 없었습니까? 편하게 밥 먹고 두 다리 뻗고 자고, 직장에 아무 문제 없고, 자녀들은 모두 건강하게 직장생활, 사회생활, 학교생활을 하고 있고, 우리 가정에는 아무런 문제 없이 평지풍파 없이 그렇게 살다가 예배자리에 오셨습니까? 그런 분들은 극소수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말할 수 없는 예상치 못한 일들이 끊임없이 찾아옵니다. 내 주변에 이상한 사람들이 나를 힘겹게 합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서 무릎이 깨져 피가 납니다. 내가 예상치 못한 일들이 지속적으로 일어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 묻지 않습니까? "하나님, 왜 이런 일이 내 인생에 일어나는 것입니까?" 요셉의 형제들처럼 이런 일이 지속적으로 밀물처럼 밀려드는데, 왜 우리는 하나님께 질문하지 않습니까? 묻지 않으면 요한복음 14장 6절의 대답과 같은 예수님의 응답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질문하고, 알고 싶다고, 내 인생에 일어나는 이 문제들의 비밀을 알고 싶다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지속적으로 물어봐야 합니다. 대답하실 때까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질문하지 않으니 답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성장이 멈춘 아버지, 야곱
요셉의 형제들은 그렇다 치고, 그렇다면 야곱은 좀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야곱이 이 상황을 보고,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 한다는 아들들의 말에 이렇게 답합니다.
"그들의 아버지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 (창 42:36)
요셉도 21년 전에 잃어버렸고, 시므온도 지금 억류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베냐민까지 데려가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집안에 간섭하고 계시다는 것을 느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상한 일들이 자기 아들들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연이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노인은 여기에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손길이 있다는 것을 느껴야 정상입니다.
과거에 야곱이 어떠했습니까? 그에게는 영적 욕심이 있었습니다. 승자 독식의 시대, 장자가 모든 장자권을 가져가는 것을 그는 부당하다고 여겼습니다. 장자권을 가지고 싶었습니다. 투쟁했고, 마침내 길을 떠납니다.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늘과 땅이 사다리로 연결되어 있고, 사다리 끝에 하나님의 보좌가 있으며, 하나님께서 거기에 좌정하여 계시고, 천사들이 날개짓하며 찬양하며 노래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베개 삼았던 돌을 세우고 기름을 붓고, 하나님의 집 벧엘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바단아람으로 갑니다. 외삼촌 라반에게 20년 동안 훈련받습니다. 그 기간 동안 그의 자아가 깨어집니다. 자녀를 열둘이나 낳았습니다. 아내도 네 사람이나 되었습니다. 가축들을 많이 거느리고 다시 돌아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걱정이 있었습니다. 에서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하나님이 해결하시려고 얍복 강가에서 야곱을 붙드시고 씨름하십니다. 그는 거기서 이름이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하나님과 씨름했던 야곱입니다. 밤새도록 씨름했던 야곱, 마하나임에서 하나님의 군대를 만났고, 하나님의 은혜도 경험했던 사람입니다.
야곱의 일생을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지금 어떤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까? 과거의 그 영적 감격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21년 전 요셉을 잃어버린 그 사건 이후로, 그는 한 치도 자라지 못했습니다. 성장이 멈춰 버렸습니다. 야곱의 아들들과 야곱이 지금 다를 바가 무엇이 있습니까?
믿음 생활에서 과거 한때 뜨겁지 않았던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과거 청년의 때 하나님 앞에 울며 기도하며 회개할 때, 그때 받았던 뜨거웠던 감격을 가지고 평생을 살려고 합니까? 우리는 그것으로 평생을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는 그날까지 우리는 성장해야 합니다. 믿음이 성장하고, 잘 성장하고, 또 성장해야 합니다. 과거에 내가 어떠했든,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내 믿음입니다. 지금 이 순간 하나님 앞에서 나의 믿음을 확인해야 하는데, 야곱처럼 이런 상태라면 이것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믿음이겠습니까? 과거에 그 뜨거웠던 믿음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맙니다.
끊임없이, 부단히 하나님께 묻고 또 묻고, 성장하지 않으면 결정적인 순간에 이렇게 되고 맙니다. 우리 인생이 야곱처럼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묻고 또 성장하고 발전하여, 자녀들을 이끌고 갈 수 있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하신 일들을 돌아보아라. 이상하지 않느냐?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우리 함께 기도하자." 아버지가 이래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 아버지는 아들들과 똑같은 영적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아버지가 베냐민을 보내지 못하겠다고 선언하자, 장남 르우벤이 화가 납니다.
"르우벤이 그의 아버지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내 두 아들을 죽이소서 그를 내 손에 맡기소서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리이다" (창 42:37)
르우벤은 장남입니다. 르우벤은 지금 억류되어 있는 시므온을 데려와야 합니다.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 시므온을 풀어준다고 했으니 데리고 가야 하는데, 아버지가 그것을 거부했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그래서 르우벤이 말한 것입니다. "베냐민을 나에게 맡기십시오. 만약 그를 데려오지 않으면 우리 집에 있는 내 두 아들을 죽이십시오."
이것이 말입니까? 말이라고 다 같은 말이 아닙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고 해서 그것이 다 말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베냐민은 아버지에게 아주 소중한 존재입니다. 아버지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이런 아버지를 이런 식으로 설득할 수 있겠습니까?
르우벤의 이 말을 비난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정에서도 야곱과 르우벤의 대화처럼 대화답지 않은 대화가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이를테면 어떤 아내가 한 달 살림을 살았습니다. 생활비가 좀 모자랍니다. 지출이 많아서 이번 달 생활비가 부족합니다. 남편에게 의논합니다. "여보, 이번 달 생활비가 좀 모자라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러면 남편이 어떻게 말해야 합니까? "그렇구나. 올해 지출도 많고 이번 달 특별히 나갈 돈이 많았으니 우리 한번 생각해 보자. 어디서 돈을 좀 끌어다 쓸까?" 이렇게 말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남편이 이렇게 말합니다. "함부로 쓸 때 내가 다 알아봤다고. 네가 그렇게 할 때 내가 다 알아봤다고. 그거 내가 사지 말라고 했잖아. 그거 하지 말라고 할 때 했으니까 집안 살림이 꼬이지."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10년 전에 묵혀 두었던 이야기까지 다 끌고 나와서 "살림을 이따위로 살다니", "우리가 저축하지 못하는 건 전부 다 너의 씀씀이 때문이다." 이것이 대화입니까? 이것은 야곱과 르우벤의 말 같지 않은 대화입니다.
자녀 문제로 속 썩이는 일이 생겨 부부가 마주 앉았습니다. 그러면 핵심은 "어떻게 하면 우리 아이를 제대로 키울까"가 핵심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두 사람이 서로를 비난합니다. "도대체 누구를 닮아서 이 모양이냐", "당신은 집안에서 자식 교육을 어떻게 했길래 애가 이 모양이냐", "그러는 당신은 이 아이에게 관심이 있었느냐." 아이 문제는 뒷전이고 서로가 서로를 비난합니다.
대화란 서로 다른 두 세계관을 가진 존재가 서로의 세계관을 향하여 조금씩 방향과 거리를 좁혀 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중간 지점에서 만나야 합니다. 그 지점이 합의된 지점이라면, 그 대화를 통해서 앞으로 두 사람이 그 지점에서 지속적으로 방향성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대화입니다.
지금 야곱과 르우벤을 보십시오. "아버지, 제가 베냐민 데려오지 못하면 우리 집에 두 아들이 있으니까 그 아이들을 죽이세요." 이것을 말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손주를 죽이라는 것은 말 같지도 않은 소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시는 일들을 보고 듣고 느끼고 깨닫는 자들인데,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에도 이런 식으로 소통이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실 때,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 어떤 말씀을 드립니까? 하나님이 지속적으로 사인을 주시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손길과 사인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은혜의 부스러기를 구한 여인
예수님과 대화하는 가장 모범적인 한 여인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7장에 나오는 수로보니게 여인입니다. 이 여인에게는 귀신 들린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던 중에,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이 자기 마을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달려가 예수님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예수님, 내 딸이 귀신 들렸습니다. 고쳐 주십시오." 그러면 일반적인 상황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가자, 너희 집에 가자. 내가 고쳐주마." 그런데 예수님이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막 7:27)
이 여인을 개 취급합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개 취급하는 것처럼, 예수님도 똑같이 거절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당혹스러웠겠습니까? 내가 알던 예수님이 아닙니다. 내가 들어 온 예수님이 아닙니다. 평소에 예수님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약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어떻게 행동했겠습니까? 기분 나빠서 돌아가든지, 한바탕 소란을 피우든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께 그런 반응을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이렇게 대답하고 주님의 은혜를 얻습니다.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막 7:28-29)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말이 이토록 중요합니다. 말은 곧 우리의 행동이요, 말은 곧 우리의 태도입니다.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상 위에서 먹던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맞습니다. 저는 이방인입니다. 저는 개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부스러기라도 좋으니 그것이라도 흘려 주시면, 그것이라도 먹고 내 딸을 고치고 싶습니다. 이것이 이 여인의 고백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사랑의 본성을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예수님이 병든 자들을 고치시고, 나 같은 연약한 자를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신다는 사실을 이 여인은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나에게 왜 이렇게 하시는지, 그 부분에 대해서 이 여인은 당황했지만 그 앞을 떠나지 않습니다.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다, 분명히 예수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하시는 데는 선한 뜻이 있을 것이다. 그것 하나 붙잡고 주님을 붙잡고 늘어집니다. 그 앞에서 은혜의 부스러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하였으니 네 딸에게서 귀신이 나갔느니라" 주님이 이렇게 응답하십니다.
결론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내 주변 사람들은 기도 응답이 척척 되고 하는 것마다 잘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는 왜 그렇게 어려운지, 하나님이 내 인생에 연타를 날리시고 벼랑 끝으로 모시고 힘든 일은 한꺼번에 서너 가지를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심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합니다. "하나님 계시지 않는가 보다, 하나님 나를 사랑하지 않는가 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신 그 존재를 의심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질문하십시오. 왜 이러시는지, 도대체 하나님이 왜 내 인생을 이런 식으로 코너로 몰아가시는지, 이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이 진정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나에게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께 진지하게 앉아서 물어보십시오.
질문하는 신앙은 성장합니다. 하나님이 그 질문에 친히 응답하실 줄로 믿습니다. "이 말을 하였으니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이 주님의 응답이 우리 모든 성도의 삶에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우리 인생은 수많은 복잡한 일들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 닥쳐와도 우리는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그저 두려움에 빠져서 뒤로 한 발짝 물러나 있었습니다. 질문하지 않는 신앙은 성장할 수 없다고 하셨사오니, 주여, 끊임없이 묻겠습니다. 묻고 또 묻겠습니다. 기도하고 또 엎드리겠습니다. 우리 인생에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어려움이 닥쳐와도 피하지 않고, 주님의 신실하심과 나를 향한 사랑을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아버지, 도와주옵소서. 야곱처럼 믿음의 성장이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성장하기 원합니다. 우리 인생을 관조하고 돌아보며 질문하며 성숙하고 성장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스무고개의 끝까지 그 답을 찾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