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강 / 담보가 되오리니 (43:1-14)

담보가 되오리니

본문: 창세기 43:1-14

고구려, 신라, 백제 가운데 삼국 통일을 이룬 나라는 신라(新羅)입니다. 신라는 가장 남쪽에 위치했고, 국력도 가장 약했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가 결국 삼국 통일의 주인공이 됩니다. 신라의 삼국 통일을 이룬 영웅들이 여럿 있었는데, 그중에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한 인물을 꼽으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김유신(金庾信) 장군을 말할 것입니다. 김유신 장군이 위대하고 탁월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인물의 뿌리는 원래 신라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증조할아버지는 금관가야(金官伽倻)의 구해왕이었습니다. 금관가야의 국운이 기울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구해왕은 신라의 법흥왕을 찾아가 "이제 우리 왕국은 다 된 것 같습니다. 우리를 받아주십시오"라고 청했습니다.

법흥왕은 이들을 수용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가문에 신라 진골 귀족의 지위를 부여했습니다. 덕분에 김유신은 태어날 때부터 신라의 진골 귀족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혜택을 누리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결정적인 자리는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차별, 보이지 않는 장벽이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진골로 대접하면서도 우두머리로는 세워주지 않았습니다. 탁월하고 뛰어나며 용맹했음에도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김유신은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그때가 왔습니다. 629년, 그의 나이 서른다섯에, 고구려와 치열하게 한강 유역의 패권을 다투던 어느 날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하던 날이었습니다.

신라가 1차 전투에서 무참히 패배합니다. 사기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때 김유신이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을 벌입니다. 홀로 적진을 뚫고 들어가 적장의 목을 베어 왔습니다. 사기충천한 신라의 군대가 낭비성을 점령해 버렸습니다. 그때 이후로 김유신은 승승장구합니다. 선덕여왕의 명장이 됩니다. 만약 김유신이 그때 그 기회를 붙잡지 않았더라면, 적진을 향하여 돌진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그렇고 그런 진골 귀족 가운데 한 명으로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피하지 않고 부딪쳤기에, 돌진했기에, 그의 이름은 역사에 남았고 삼국 통일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살다 보면 피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직면하고 싶지 않은 일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대신해 주었으면 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반드시 내가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피한다고 능사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는 어떤 상황에 직면한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의 이름은 유다였습니다. 모두가 피하고 회피하는 가운데, 유다는 결국 직면했고 위대한 역사의 분기점에 이름을 올립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곡식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숙제를 안고 왔습니다.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 합니다. 그래야 억류되어 있는 시므온을 구할 수 있습니다. 형제들이 이런저런 말로 아버지를 설득했지만, 아버지는 설득되지 않았습니다.

모두의 일, 누구의 일도 아닌

아버지 야곱과 르우벤이 심하게 다투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야곱도 입을 다물고 있고, 형제들도 더 이상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습니다. 건드려 봐야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문제 해결이 요원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문제는 알지만 건드리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아버지 야곱이었습니다.

"그 땅에 기근이 심하고 그들이 애굽에서 가져온 곡식을 다 먹으매 그 아버지가 그들에게 이르되 다시 가서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조금 사오라" (창 43:1-2)

곡식이 풍족했습니다. 아홉 명의 형제들이 애굽에 가서 가져온 곡식 자루가 아귀까지 가득 차 있었는데, 어느덧 곡식이 바닥을 보입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입을 열어 한 말이 "다시 가서 곡식을 조금 사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비정하지 않습니까? "내가 베냐민을 내어줄 테니 시므온을 데려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시므온이 지금 감옥에서 얼마나 힘겹겠느냐, 그가 얼마나 외롭겠느냐, 이제는 내가 졌으니 베냐민을 내어주겠다, 시므온을 데려오라—이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곡식을 조금 사오라고 말할 뿐, 시므온에 대해서는 일체의 언급이 없습니다.

이 상황에서 가장 가슴 아프고 힘겨운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시므온입니다.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이제나저제나 형제들이 나를 구하러 오겠지, 내가 갇혔다는 소식을 아버지가 들으면 베냐민을 내어주시겠지, 그런 기대로 오늘도 내일도 기다리고 있는데 아무 소식이 없습니다. 요셉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형제들이 가서 아버지를 설득해서 돌아오겠지. 그런데 소식이 없습니다. 시므온은 낙심했고, 요셉은 실망했습니다.

우리가 이 상황을 통해 깨달아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모두의 일이 누구의 일도 아닌 상황이 빚어져 버렸습니다. 시므온의 문제는 이 가정 모두의 일입니다. 시므온이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이 문제는 모두가 함께 힘을 모아 해결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모두의 일입니다. 그런데 누구도 이 문제에 관심이 없고, 누구도 맞서서 책임지려 하지 않고, 피하고만 있습니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수학 시간에 집합을 배웠습니다. A 집합, B 집합, C 집합이 있습니다. 서로 겹쳐진 부분이 있습니다. A와 B의 교집합, B와 C의 교집합, C와 A의 교집합이 있습니다. 세 집합 모두가 겹쳐지는 교집합이 있습니다. 수학적으로는 이 공통 교집합이 가장 먼저 색이 칠해집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겹쳐지니까 진하게 색이 칠해집니다. 그런데 현실의 문제에 있어서는 A는 B에게 미루고, B는 C에게 미루고, C는 A에게 미룹니다. 세 집합의 교집합인데, 모두의 문제인데, 가장 늦게까지 그 자리만 텅 비어 있습니다. 누구도 그 자리에 색을 칠하지 않습니다. 논리적으로 보면, 수학적으로 보면 세 번이나 겹쳐 칠해져야 하는데, 현실의 문제는 가장 늦게까지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내가 하지 않아도 누군가 하겠지. 굳이 내가 왜?"—이런 마음이 모두에게 팽배합니다. 그러는 동안 시므온은 말라 죽어갑니다. 이것은 우리 공동체에서도, 우리 가정에서도, 이 세상에서도 매일 일어나는 일입니다. 모두의 일인데 누구의 일도 아닌 이 역설적이고 기이한 상황.

연초에 교회 모든 성도님들에게 부탁드린 것이 있었습니다. 노약자들과 어린이들을 제외하고, 교회 식당에서 식사하시는 분들은 1년에 두 번만 도와달라고, 설거지와 식당 청소로 도와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면, 매월 주방 봉사자 명단을 벽에 붙여놓는데 칸이 비어 있다면 그 주는 식사를 드릴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드시는 분은 있는데 설거지와 청소를 해 주시는 분이 없다면 어떻게 식사를 드리겠습니까? 1년 동안 은혜롭게도 식사 한 번 거르지 않고 매주 잘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봅니다. 우리 가운데 1년에 두 번씩 꼬박꼬박 설거지도 하고 청소도 했습니까? 그렇지 않은데 잘 돌아갔습니다. 교회에 할 일이 많고 곳곳에 봉사자가 필요한데, 내가 그 역할을 감당하지 않는데도 교회는 1년 동안 또 잘 돌아갔습니다.

그렇다면 역설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하지 않았는데 잘 돌아갔다면, 누군가 나 아닌 사람이 시므온처럼 고통받고 괴로웠던 것입니다. 식사하는 것은 모두의 문제입니다. 모두가 함께 식탁의 교제를 나누는 것은 우리 모두가 같이 책임지고 풀어가야 할 공동의 과제입니다. 모두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누구의 일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니, 마음이 쓰이는 사람, 수고로이 봉사하는 사람만이 지속적으로 그 일을 감당하는 기이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 나라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가 잘 되고, 나라가 부강하고, 나라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것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모두의 문제인데 누구의 문제도 아닌 것이 되고 외면해 버리니, 야망 있는 사람, 욕망 있는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나라가 불안정하고 문제가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것입니다. 모두의 문제는 우리 모두가 함께 우선적으로 풀어가야 합니다. 먼저 그 자리를 채워가야 공동체가 안정적으로 아름답게 유지될 수 있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미루지 말고, 우리가 먼저 앞서서 그 문제부터 해결하고 풀어가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공동체를 든든하게 세우시고, 우리 가정과 일터에 은혜를 부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바닥을 드러내는 시간의 곳간

또한 우리는 이 상황을 통해 두 번째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곡식 자루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것도 아홉 개나 아귀까지 가득 차 있었습니다. 먹지 않아도 배부릅니다. 든든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서 보니 절반밖에 없습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니 바닥을 보입니다. 시간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우리 앞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까? 무한정의 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고 생각합니까? 우리에게 인생의 종말이 오지 않을 것 같습니까? 앞으로도 수십 년, 혹은 백 년, 이백 년 더 살 것 같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시간은 하나님만 아십니다. 분명한 사실은, 하루하루 지나갈수록 남아 있는 시간은 곡식 자루의 곡식이 줄어드는 것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을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명한 진리입니다.

그런데 왜 회피합니까? 왜 우리가 이 시간의 한계 가운데 살면서, 우리 안에 있는 긴급하고 시급한 문제를 풀어내지 않고, 해결하지 않고, 자꾸만 회피하고 물러섭니까? 죄 문제입니다. 세례 요한이 이 땅에 와서 가장 먼저 외친 말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놀랍게도 동일합니다.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마 3:1-2)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마 4:17)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세례 요한이 하신 말씀이 동일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 땅의 종말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심판하실 그때가 얼마 남지 않았고, 우리 앞에 남아 있는 시간의 곳간이 얼마 되지 않았으니, 이제는 죄 문제를 빨리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오셔서 우리의 영혼을 거두어 가신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 저는 이러이러한 일을 하다가 왔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죄 문제를 깨끗하게 해결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시간의 곳간이 아직 가득 차 있는 줄 압니다. 영원할 줄 압니다. 지금 당장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가장 심각한 인생 문제인 죄 문제를 풀어내고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 지금 서도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 직면하지 않습니다. 돌아가고 해결하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세례 요한의 음성과 예수님의 음성을 귀하게 들으시고, 매 순간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정결하게 내어 드리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담보의 신앙, 희생의 고백

이렇게 시므온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는 아버지의 말에 누가 대응합니까?

"유다가 아버지에게 말하여 이르되 그 사람이 우리에게 엄히 경고하여 이르되 너희 아우가 너희와 함께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창 43:3)

유다가 나섰습니다. 유다가 말합니다. 아버지, 곡식 사러 가야 합니다. 옳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베냐민을 데려오지 않으면 그 사람의 얼굴도 볼 수 없다고 했습니다. 곡식은커녕 잡혀 있는 시므온조차 데려올 수 없습니다. 그러니 아버지, 베냐민을 보내 주십시오. 그런데 왜 유다가 나서서 말해야 합니까? 유다는 레아가 낳은 네 번째 아들입니다. 첫째 르우벤은 아버지와 심하게 다툰 후에 말하지 않습니다. 파괴적인 언사가 오간 이후에는 더 이상 대화가 없습니다. 둘째 시므온은 억류되어 있습니다. 셋째 레위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넷째 유다가 나서서 말합니다. 다른 형제들은 모두 회피합니다. 모두의 문제인데 모두가 자기 문제가 아니라고 회피합니다.

그런데 유다의 말에 대한 아버지의 응답이 어떠합니까?

"이스라엘이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너희에게 또 다른 아우가 있다고 그 사람에게 말하여 나를 괴롭게 하였느냐" (창 43:6)

아버지는 변하지 않습니다. "어찌하여"로 시작합니다. 왜 동생이 있다고 그 사람에게 말해서 나를 괴롭게 하느냐고 나무랍니다. 왜 입방정을 떨었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대화가 풀리겠습니까? 지금 문제는 어떻게 하면 시므온을 데려올 수 있느냐, 베냐민을 줄 것이냐 말 것이냐인데, 아버지의 논점은 그 핵심을 한참 벗어나 있습니다. 얼마 전 르우벤과의 대화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유다도 속이 타올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르우벤과 달랐습니다. 유다는 이렇게 응대합니다.

"유다가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아이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창 43:8-9)

유다의 이 말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갈등 요소를 해결할 수 있는 핵심적 분기점이 되는 고백입니다. 유다의 말은 르우벤의 말과 다릅니다. 르우벤은 "내가 만약 베냐민을 데려오지 못하면 내 두 아들을 죽이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말 같지 않은 말이었습니다. 파괴적인 대화였습니다. 그 이후로 야곱과 르우벤뿐 아니라 가정의 모든 대화가 단절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담보가 되겠습니다. 내 손에서 베냐민을 찾으소서. 반드시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이 말이 중요한 이유는 담보 신앙의 고백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야곱의 가정에서 자기 희생을 언급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자기 희생을 언급한 최초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유다였습니다. "내가 담보가 되겠습니다."

요셉이 떠보고 싶었던 것이 바로 이 문제였습니다. 요셉은 이것을 알고 싶었습니다. 아홉 명이 남고 한 명을 보내라—아홉 명이 희생하라는 말입니다. 한 명이 남고 아홉 명이 가라—한 명이 희생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희생할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누구도 희생하려 들지 않으니, 누구도 자기를 내어주려 하지 않으니, 누구도 자기를 포기하지 않으려 하니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런데 드디어 유다가 문제를 풀 열쇠를 가져옵니다. "내가 담보가 되겠습니다." 담보라는 말에 사용된 히브리어 '아라브'(עָרַב)는 '보증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동사적 의미로 더 중요한 것은 '서로 섞이다', '서로 엮이다', '하나가 되다'라는 뜻입니다. 실과 실을 가지고 서로 짜면 하나의 옷이 됩니다. 그러면 하나의 옷이지 않습니까? A라는 컵에 든 물과 B라는 컵에 든 물을 섞어서 하나로 만들면, 나중에 다시 분리할 수 있습니까? 서로 섞이면 그것은 하나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담보가 되겠습니다"—이 말은 "나와 베냐민은 지금부터 하나입니다"라는 선언입니다. 내가 곧 베냐민이고, 베냐민이 곧 나입니다. "아버지, 이제부터 나와 베냐민은 공동 운명체입니다." 그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라고 말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야곱 가정의 자녀들은 6대2대2대2의 법칙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레아가 낳은 여섯 명, 라헬이 낳은 두 명—요셉과 베냐민, 여종들이 낳은 각각 두 명씩입니다. 평상시에는 이 구도로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요셉을 편애하거나 베냐민을 편애할 때는 10대2로 대립했습니다. 지금까지 그들은 담보의 신앙으로 서로 하나 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물과 기름처럼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누가 누군가를 책임지려 한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레아가 낳은 여섯 아들조차도 시므온이 잡혀 있는데 시므온을 위하여 "내가 담보가 되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책임지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누가 있었습니까?

그런데 드디어, 수십 년 동안 한 지붕 아래 살아도, 오랫동안 같이 먹고 같이 자고 같이 살아도 한 번도 베냐민의 문제를 자기 문제로 여기지 않았던 유다가 말합니다. "아버지, 이제 베냐민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나와 베냐민은 하나의 공동 운명체로 담보가 되었습니다. 서로 섞이고 엮여 있습니다."

이 고백은 위대한 신앙고백입니다. 담보 신앙의 최초의 고백자가 유다입니다. 담보 신앙의 완성자가 누구이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엡 1:7)

우리는 누구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았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받았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세상의 법칙에 의하면, 내가 죄를 지으면 내가 죽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형제들이 바로 그랬습니다. 시므온에게 죄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필 요셉 앞에 서 있다가 끌려 들어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형제들은 "그건 시므온의 문제이지 내 문제가 아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네 운명이 그런 것이다. 네가 하필 그 자리에 있었으니 그건 네가 책임져야 한다. 우리가 왜 책임지느냐?" 형제들은 지금까지 그래 왔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 내가 지은 죄는 내가 책임지고 가는 것이 세상의 법칙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천 년 전,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으신 예수께서 나를 위한 담보가 되셨습니다. 나를 위해 세상에 담보 잡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그 피의 권세 아래 우리가 들어가게 되었고, 예수님과 내가 하나로 엮이게 되었습니다. 아무런 상관이 없던 내가,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 아래에서 예수님과 하나로 섞이게 된 것입니다. 더 이상 나와 예수님은 보혈 안에서 분리될 수 없습니다. 물과 물이 하나가 되면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것처럼, 예수께서 이 세상에 담보가 되셨으므로 나와 예수님은 더 이상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사탄의 권세가 아무리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려 해도 끊어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친히 담보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복음이고, 이것이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유다 지파에서 나셨습니다. 인간적 흠결이 적지 않았던 유다가 "내가 내 형제를 위한 담보가 되겠습니다"라고 고백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담보의 완성을 예표합니다. 이 놀라운 고백이 아버지 야곱의 마음을 바꾸어 놓습니다.

"그들의 아버지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러할진대 이렇게 하라 너희는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그릇에 담아 가지고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예물로 드릴지니 곧 유향 조금과 꿀 조금과 향품과 몰약과 유향나무 열매와 감복숭아이니라 너희 손에 갑절의 돈을 가지고 너희 자루 아귀에 도로 넣어져 있던 그 돈을 다시 가지고 가라 혹 잘못이 있었을까 두렵도다 네 아우도 데리고 떠나 다시 그 사람에게로 가라" (창 43:11-13)

야곱이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젖힙니다. 이때까지 자식들을 기르면서 이것들 때문에 골치 아프고 힘들었는데, 유다가 베냐민의 담보가 되겠다는 말,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라는 이 고백이 그의 얼었던 마음을 녹여 버렸습니다. 동생을 데려가라고 선언합니다.

이 놀라운 일은 아버지를 기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기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억만금 헌금을 드린다고 기뻐하시겠습니까? 온 세상 만물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온 세상을 하나님이 지으시고 지금도 통치하시는데,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그것으로는 하나님을 본질적으로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신 이유는, 보좌의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한 담보가 친히 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한 것입니다. 희생하지 않으면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내가 손해 보아야 하나님의 기쁨이 됩니다. 얽히고설킨 문제를 풀려면 손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친히 그 공동체를 위하여, 그 가정을 위하여, 다른 이들을 위한 담보가 될 때 비로소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조금의 손해도 보려 하지 않습니다. 물질적 손해, 시간의 손해, 노동의 손해, 하나도 감수하려 하지 않고 오로지 다른 사람의 것을 가져오려고만 합니다. 그러면 문제 해결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려면 손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희생하는 담보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결론

내친김에 야곱이 선언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창 43:14)

용기가 생겼습니다.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닫혀 있던 아버지의 마음을 열고, 용기 없던 아버지에게 용기를 주고, 피하던 아버지를 직면하게 한 것은 바로 그 한마디—"담보가 되겠습니다"라는 고백이었습니다.

대림절 기간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친히 담보가 되셔서 오셨습니다. 우리가 이 기간을 보내면서, 입으로만 아기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지 말고, 우리도 예수님을 닮아 희생하고 헌신하고 손해 보는, 세상을 위한 공동체를 위한 담보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모두의 문제가 누구의 문제도 아니라는 이 현실 앞에서, 우리는 서로 외면하고 살았습니다. 누군가가 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지냈습니다. 시간의 곳간에 아직 허락된 시간이 가득 차 있을 것이라 착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들여다보니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먼저 희생하게 하옵소서. 손해 보게 하옵소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음을 깨닫고 죄 문제를 정리하고 해결하기 원하오니, 주님 앞에 우리의 죄를 털어놓을 때 받으시고 우리를 정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을 위한 담보가 되셔서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를 친히 품으신 그리스도, 그 뒤를 따라 우리도 세상을 위한 담보가 되겠습니다. 우리 가정을 위한 손해를 감수하겠습니다. 내가 손해 보고 희생하여 친히 담보가 되어 얽혀 있는 문제를 풀어내겠습니다. 주여, 우리를 이 세상의 문제를 풀어가는 담보로 받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