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강 /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 (43:15-34)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

본문: 창세기 43:15-34

옛날 수십 년 전, 어린아이들에게는 놀거리가 별로 없었습니다. 장난감도 부족하고 마땅한 놀이도 없어서 주로 마당에서, 운동장에서, 골목길에서 뛰어놀았습니다. 남자아이들에게 골목길에서 가장 좋은 놀이감은 축구공이었습니다. 공 하나만 있으면 수십 명의 아이들이 몰려다니며 놀 수 있었습니다. 축구 경기란 원래 열한 명 대 열한 명, 스물두 명이 공을 차는 경기입니다. 그러나 동네 축구에서 스물두 명을 모으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다섯 명이 있으면 5대 5로, 열두 명이 있으면 6대 6으로 편을 갈라 시합을 했습니다. 문제는 홀수일 때였습니다. 아홉 명, 열한 명, 열세 명일 때 편가르기가 애매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방방곡곡 어디서나 통하는 규칙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깍두기 제도였습니다. 이 제도는 두 가지 방식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실력이 출중한 아이가 있으면 그 친구가 전반전은 이쪽 편에서, 후반전은 저쪽 편에서 뛰었습니다. 반대로 실력이 부족하거나 나이가 어린 아이가 있으면 한 편에서 전후반 내내 뛰어도 상대편이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깍두기 제도의 핵심은 승부가 아니라 함께 노는 것이었습니다. 같이 어울리고, 누구도 소외되는 아이 없이 함께 운동장에서 뒹굴며 놀자는 것, 이것이 깍두기 제도의 본질이었습니다.

깍두기 제도의 유래를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학교에서 배운 적도 없고, 부모에게서 배운 적도 없고, 책에서 읽은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이 제도가 통용되었고,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놀면서 평등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체득해 갔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이 은혜의 시절이었습니다. 가난했고, 셋방살이를 했고, 동네에 아파트 한 동이 세워지면 "저 아파트에는 누가 살까, 우리 집도 저런 집에 한번 살아보고 싶다" 꿈꾸던 시절이었습니다. 옹기종기 모여 살던 많은 식구들이 셋방살이하던 그때, 그 시절에는 온기가 있었고 따뜻함이 있었고 누구 하나 배제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한참 지나 오늘날은 각 집마다 자가용이 두 대 이상씩 있고, 따뜻한 물이 나오는 아파트에 살고, 모두가 잘 사는 시절이 되었는데, 사람들은 집단적으로 무리 지어 다닙니다. 그 집단 속에 내가 속하지 않으면 사람 취급받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를 써서라도 무리 속에 들어가려고 합니다. 어린아이들부터 어른들까지 그러합니다. 그런데 그 집단은 서로 강대강으로 충돌하고 갈등합니다. 정치인들부터 어린아이들까지 대립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신앙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자들이고, 은혜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무차별적으로 부어집니다. 그 은혜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쉼을 누립니다. 우리는 그런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하십니다. 은혜받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요셉의 형제들은 은혜가 아닌 율법에 머물러 있고 행위에 머물러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 어디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물과 갑절의 돈, 그 너머에 있는 것

아버지 야곱을 대하는 르우벤과 유다의 태도는 사뭇 달랐습니다. 르우벤은 "만약 제가 베냐민을 데리고 오지 못하면 우리 집에 있는 저의 두 아들을 죽이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대화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상대하지 말자는 뜻이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 야곱과 형제들의 대화가 끊어졌습니다.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 유다가 말합니다. "내가 담보가 되겠습니다. 내 손에서 이 아이를 찾으십시오." 유다가 베냐민을 책임지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이 신의(信義)의 고백이 아버지 야곱의 마음을 녹였습니다. 굳게 닫혀 있던 야곱의 마음이 활짝 열렸습니다.

수십 년 동안 한집에 함께 살았어도 서로 아무런 상관없이 지냈던 유다와 베냐민이, 이제는 서로 엮이고 하나 되는 존재가 되겠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책임지겠다는 이 고백이 설령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아버지는 그 고백을 들은 것만으로 행복했습니다. 아버지가 결단합니다.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그리고 베냐민을 보냅니다.

이제 형제들은 떠날 채비를 합니다. 요셉이 있는, 그리고 시므온이 갇혀 있는 이집트(Egypt) 땅을 향해 길을 떠날 준비를 합니다.

"그 형제들이 예물을 마련하고 갑절의 돈을 자기들의 손에 가지고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요셉 앞에 서니라" (창 43:15)

형제들은 세 가지를 가져갑니다. 첫째는 예물이었습니다. 이 예물은 아버지 야곱이 준비해 준 그 지역의 특산품이었습니다. 그 땅에서만 나는 귀한 특산품들을 나귀에 가득 실었습니다. 둘째는 갑절의 돈이었습니다. 처음에 이집트에 가서 곡식을 샀을 때 지불했던 돈이 자루 속에 그대로 돌아왔습니다. 이번에 또 곡식을 사야 하니 그때의 돈과 이번 곡식 살 돈을 합하니 갑절의 돈이 되었습니다. 셋째는 베냐민이었습니다. 예물과 갑절의 돈을 가지고 요셉에게로 갔습니다.

형제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드디어 이 악연이 끝나는구나. 베냐민을 보여주면 시므온을 풀어주겠지. 이 예물을 받고 기뻐하시겠지. 곡식을 사오면 끝이다."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행길이 길게 느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침내 요셉 앞에 섰습니다. 요셉의 반응을 주목해야 합니다.

"요셉은 베냐민이 그들과 함께 있음을 보고 자기의 청지기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을 집으로 인도해 들이고 짐승을 잡고 준비하라 이 사람들이 정오에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니라" (창 43:16)

드디어 베냐민이 요셉 앞에 섰습니다. 요셉의 마음이 얼마나 뜨거워졌겠습니까. 껴안고 울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이십여 년이 지났지만 금방 알아봤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동생 베냐민을 껴안고 울고 싶은 마음을 억제하고, 형제들을 총리의 관저로 인도합니다. 총리 관저에서 식사를 준비합니다. 잔치를 준비했습니다. 수많은 형제들이 왔지만, 요셉의 눈에는 베냐민 한 사람만 들어옵니다.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되니 형제들이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자기들이 가져간 예물과 갑절의 돈을 생각해 보십시오. 나귀에 예물을 잔뜩 실었고, 갑절의 돈을 청지기에게 드렸습니다. 그러면 요셉이 지나가는 말이라도, 인사치레라도 "이런 걸 왜 가져왔느냐, 여기 이집트에 차고 넘치는 것들인데, 그래도 가져왔으니 고맙다"라고 청지기에게 시켜 창고에 넣어두라고 하면 그 한마디로 끝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 말을 하지 않습니다. 요셉의 눈이 베냐민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물이나 갑절의 돈에는 일절 관심이 없습니다. 아무리 많이 쌓아도 그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베냐민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형제들은 이 예물을 총리가 받아줘야 마음이 편해집니다. 갑절의 돈을 받아줘야 "이제 우리가 용서받았구나, 정의의 심판을 벗었구나" 하며 안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안합니다.

"그 사람들이 요셉의 집으로 인도되매 두려워하여 이르되 전번에 우리 자루에 들어 있던 돈의 일로 우리가 끌려드는도다 이는 우리를 억류하고 달려들어 우리를 잡아 노예로 삼고 우리의 나귀를 빼앗으려 함이로다 하고" (창 43:18)

이들도 딱한 것이, 그 총리가 나귀를 빼앗아서 어디에 쓰겠습니까. 쓸데없는 불안감을 이들이 품고 있습니다. 두려워하고 불안해하고 이상한 상상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들의 모습을 보면, 이방 종교에 깊이 길들여진 종교성이 드러납니다. 이방 신전에 제사하는 사람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바알(Baal) 신, 아세라(Asherah) 신, 말록(Molech) 신을 섬기는 사람들은 화려한 신전에 엄청난 재물을 가지고 갑니다. 많은 물질을 가져다 드립니다. 두렵기 때문입니다. 신들을 달래서 내 농사 좀 잘되게 해 달라고, 복 받게 해 달라고, 돈 좀 많이 벌게 해 달라고 신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물질을 쌓습니다. 심지어 자기 아들을 불에 태워 드리는 인신제사까지 행합니다. 가장 존귀하고 귀한 것을 바치면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온 세상 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이 세상 만물을 지금도 다스리시고,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얼마를 드려야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겠습니까. 갑절의 돈을 가져간다고 하나님이 눈 하나 깜짝하시겠습니까.

지금 이들을 보면, 종교성에 잠식된 잘못된 신앙인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요셉의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것은 바로 사람입니다. 요셉이 베냐민만 주목해서 보지 않습니까. 쌓아놓은 예물과 갑절의 돈에는 관심조차 없습니다. 하나님도 오늘 우리 각 사람을 살피고 그 사람을 사랑으로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믿음 생활을 잘한다는 것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것을 우리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우리도 기뻐해야 하고,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에서 우리가 떠나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입니다. 많은 물질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곧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 사람을 기다리고 오래도록 고대하며 잘 섬기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사람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눈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말씀이 누가복음 15장의 탕자 비유입니다. 둘째 아들은 참으로 방탕한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신데 유산을 미리 상속받았습니다. 집을 나가 친구들과 허랑방탕하게 다 써버렸습니다. 어느 농장에 취직했지만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씹어 먹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내 아버지 집에는 배부른 품꾼들이 넘치는데"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집으로 돌아옵니다.

누가복음 15장 20절을 보면,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달려 나가 아들을 맞이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보자 달려갔습니다. 그 자리에 앉아서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아들을 보니 신발이 없습니다. 새 신을 신깁니다. 아들을 보니 옷이 다 해어져 있습니다. 새 옷을 갈아입힙니다. 아들의 손을 보니 거친 노동에 상해 있습니다. 손에 가락지를 끼웁니다. 아들의 볼을 만지니 뼈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먹지 못해 여윈 아들을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잔치를 벌입니다. "많이 먹어라" 하며 고기를 먹입니다. 동네 이웃들을 불러 "내 아들을 찾았다"고 선포합니다.

아버지의 입에서 단 한 번도 "네가 가지고 나간 돈을 돌려놓기 전에는 이 집에 들어올 수 없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이 아들이 가지고 나간 돈에는 일절 관심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눈에는 아들만 보입니다. 아들의 거친 발이 보이고, 아들의 거친 손이 보이고, 아들의 말라버린 볼이 보이고, 아들의 연약해진 모습이 보입니다. 그것 외에 아버지에게는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온 큰아들의 눈에는 무엇이 보입니까. 동생 손에 있는 가락지가 보이고, 동생이 입고 있는 새 옷이 보이고, 동생 상에 차려진 송아지 요리가 보입니다. 불평합니다. 화가 납니다. 아버지에게 마구 대듭니다. 아버지는 그런 큰아들을 점잖게 타이릅니다. 큰아들의 눈에는 동생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의 손에 있는 가락지, 그의 발에 있는 새 신발, 그의 몸에 있는 새 옷, 그의 상에 놓인 식탁만 보이지,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우리가 보는 것이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내어주신 그 사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 사랑의 대상인 바로 그 사람이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다른 것이 보인다면, 많은 물질로 갑절의 돈으로 엄청난 예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착각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을 우리도 보고,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을 어느 정도의 가치로 여기시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Samaria) 성에 가서 복음을 전한 일이 있습니다. 교회가 부흥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성령께서 빌립 집사에게 "일어나 남쪽으로 가라" 명령하십니다. 무조건 순종해서 일어나 남쪽으로 갔더니, 그 길은 광야였습니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계속 가보니 한 사람을 만납니다.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행 8:27-28)

한 사람이 성경을 읽고는 있지만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빌립이 그 수레에 올라탑니다. 거기서부터 시작하여 이사야의 글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을 전합니다. 그를 회심시키고 세례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이 사건이 우리에게 전하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빌립 집사는 부흥하는 큰 교회를 사역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그에게 그 교회를 내려놓고 한 사람에게로 가라고 보내셨습니다. 한 사람의 가치가 곧 교회의 가치라는 뜻입니다. 한 사람이 곧 교회입니다. 한 사람은 그냥 한 사람이 아니라, 그 한 영혼 자체가 교회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이처럼 귀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습니다.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때 세상은 한 사람이 곧 온 천하입니다. 한 사람이 교회요, 한 사람이 온 천하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이 사람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람에게 관심을 두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눈이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율법을 넘어 은혜의 자리로

이제 요셉이 불안에 떨고 있는 형제들을 위로합니다. 그 불안과 두려움을 안심시켜 줍니다.

"그가 이르되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너희 돈은 내가 이미 받았느니라 하고 시므온을 그들에게로 이끌어내고" (창 43:23)

요셉도 자기 아버지 야곱이 어떤 인물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 아버지를 설득해서 베냐민을 데려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압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너희 돈을 내가 이미 받았다." 갑절의 돈을 가져온다고 이것이 너희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아무 의미가 없다, 이 예물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베냐민을 데려온 것으로 되었다,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갇혀 있던 시므온을 풀어주었습니다. 걱정하지 말라고, 이제는 이런 것들을 가지고 마음의 짐을 해소하려 하지 말라고, 이 율법에 더 이상 얽매여 살지 말라고 위로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형제들에게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부담스러워합니다.

"요셉이 집으로 오매 그들이 집으로 들어가서 예물을 그에게 드리고 땅에 엎드려 절하니" (창 43:26)

결국 나귀 등에 있던 예물을 집 안으로 끌고 들어와 요셉 발 아래 놓고 그 앞에서 엎드려 절합니다. 율법이라는 것이 이토록 사람을 괴롭힙니다. 괜찮다고 하는데, 안심하라고 하는데,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는데, 돈을 이미 다 받았다고 하는데, 계산이 끝났다고 하는데, 이제 자유하라고 하는데도 여전히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서 그 율법에 매여 있는 이들의 모습이, 오늘 종교성에 젖어 있는 우리의 모습과 닮지 않았습니까.

사람들은 이런 오해를 합니다. 내가 하는 일이 잘되지 않으면, 내가 계획한 대로 뭔가 잘 풀리지 않으면 자신을 돌아봅니다. 거기까지는 좋습니다. 그런데 지나치게 죄의식을 가집니다. "내가 혹시 올해 하나님께 뭔가 잘못한 것이 없나, 내가 혹시 예배 시간에 이런저런 것을 잘못해서 하나님이 나를 미워하시는 것은 아닌가" 하며 자꾸 죄책감을 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자꾸 조심하려 하고 옷깃을 여미려 합니다. 자기를 돌아보는 것은 좋으나, 죄책감과 죄의식에 사로잡히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사탄은 바로 그것을 지속적으로 이용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갑절의 돈을 가지고 나오면 내 죄책감이 해소될까, 많은 예물을 가지고 나오면 내가 지은 죄가 가려질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사랑하시는 마음을 가지면,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런 형제들에게 요셉이 선포합니다.

"요셉이 눈을 들어 자기 어머니의 아들 자기 동생 베냐민을 보고 이르되 너희가 내게 말하던 너희 작은 동생이 이 아이냐 그가 또 이르되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 (창 43:29)

요셉은 베냐민에게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선포는 베냐민에게만 한정된 말이 아닙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형제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이미 은혜가 이 형제들에게 시작되었습니다. 형제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지금 요셉 때문에 괴롭지만, 이미 은혜가 흘러가고 있고 이미 은혜가 시작되었습니다.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 이들을 구원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지금 이들에게 은혜인 줄 전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이곳에 부르신 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이곳에 불러 곡식을 사게 하셨는데, 마침 그때 요셉과 만나게 하신 것이 은혜입니다. 이들이 이십여 년 전에 자기 동생을 팔아버렸는데, 하나님이 그를 이집트 총리로 세워 이들의 가난과 기근을 구원하게 하신 것, 이것이 은혜입니다. 요셉이 총리가 되는 데 이들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용돈을 한 번 보내 주었습니까. 기도를 한 번 해 주었습니까. 아무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미 은혜가 시작되었습니다. 구원을 향한 위대한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요셉은 이 과정을 거친 후에 야곱의 온 가족을 이집트로 초대하여 기근에서 구원하고 건져낼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은혜라는 것은 자격 없는 사람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말합니다. 사람들은 "나는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격이 없기에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사건이 나옵니다. 그를 불러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을 왜 부르셨는지,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될 만한 자격이 있었는지에 대해 성경에 기록이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이요, 하나님의 주권이요, 하나님의 전적인 신비입니다.

사사기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사사들을 세우십니다. 왼손잡이 에훗을 세우셨습니다. 왼손에 힘이 있어서 왼손잡이가 아니라, 오른손을 못 쓰는 장애인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왜 부르셨습니까.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기드온은 겁쟁이요 회의주의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드온을 불러 사사로 쓰십니다. 드보라는 여성이었습니다. 그 당시 여성은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인구 수에도 들지 못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여성 사사 드보라를 세워 이스라엘을 구원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요셉의 형제들을 이 자리에 불러 구원하시는 것, 이들은 자격이 없는 자들입니다. 이십여 년 전에 동생을 팔아넘겼고, 파렴치하고 무책임했으며, 발뺌을 하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은혜 입을 자격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은혜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은혜라고 부릅니다.

오늘 우리는 요셉의 형제들과 다를 바 없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도 거짓말쟁이입니다. 우리도 무책임한 자들입니다. 우리도 돈을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보다는 자기 공로를 주장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오늘 이 자리에 있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주권적 선택의 은혜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롬 8:30-31)

미리 정하신 자들, 예정하신 자들을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부르신 자들을 하나님이 의롭다 하셨습니다. 의롭다 하신 자들을 하나님이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거기에 대해 누가 이의를 제기하겠습니까. 누가 하나님께 "왜 이렇게 하셨느냐"고 따지겠습니까. 탕자를 받아들이고 그를 위하여 잔치를 베푸는 것, 이것은 아버지가 하시는 일입니다. 그 일에 이의를 달던 장남이 책망을 받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자격 없는 자들인데,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은혜를 받은 자들입니다. 받은 은혜는 베풀고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은혜를 받았는데, 여전히 사람을 가리고 사람을 차별합니다. 여전히 내 집단에 들어와야 할 사람과 소외시켜야 할 사람을 계산합니다. 가까이해야 할 사람, 멀리해야 할 사람, 함께해야 할 사람, 함께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나눕니다.

대림의 계절은 은혜가 무차별적으로 내리는 시간입니다. 은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은혜는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내려옵니다. 받은 은혜를 나누고 베풀어서 은혜의 전달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요셉의 형제들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돈을 좋아했고 무책임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요셉을 이집트의 총리로 세우시고, 그들의 악을 선으로 바꾸셔서 그들을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그들은 입었으나, 여전히 예물로, 갑절의 돈으로 은혜를 사려 했습니다. 아버지,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봉사하고 시간을 헌신하고 물질을 많이 드리면 은혜를 살 수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은혜는 거저 주시는 것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흘려보내는 자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은혜를 내 안에만 가두지 않고 머물지 않게 하여 주시고, 베풀고 나누어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