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강 /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된지라 (44:1-17)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된지라

본문: 창세기 44:1-17

축구 경기 중계를 보면 '빌드업(build-up)'이라는 용어를 자주 듣게 됩니다.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이 단어는 낯선 것이었습니다. 과거 우리나라 축구는 수비수가 공을 잡으면 저 멀리 공격수에게 무조건 띄워 보내는, 이른바 '뻥 축구'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프로 수준의 경기에서는 수비수가 미드필더에게 공을 연결하고, 미드필더는 상대와 치열하게 싸워 공격수에게 공을 전달하며, 공격수는 자신의 기량으로 골을 넣습니다. 골로 향해 가는 이 모든 과정이 빌드업입니다. 뛰어난 감독이란 상대 팀의 전력, 자기 팀 선수의 역량, 부상이나 퇴장 같은 돌발 상황에 따라 다양한 빌드업 전략을 구사할 수 있는 감독입니다.

빌드업은 축구에만 해당되는 용어가 아닙니다. 우리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적용됩니다. 청춘 남녀가 만나 서로 호감을 느꼈을 때, 한쪽이 더 깊은 관심을 품게 되면 고도의 빌드업 전략이 필요합니다. 선물을 잘 준비하고, 주변 사람들을 통해 호감을 살 수 있는 접근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마음에 든다고 다짜고짜 사랑한다, 결혼하자고 말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만 외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 방식으로 마음 문을 여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전도 대상자를 정했으면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그 사람과 깊은 관계를 형성해야 합니다. 충분한 신뢰가 쌓였을 때 비로소 "우리 교회에 한번 가보자, 내가 믿는 예수를 한번 믿어보지 않겠느냐"고 권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요셉과 그의 형제들 이야기에서, 요셉은 형제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도록 빌드업을 진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요셉이 바라는 것, 그의 유일한 소망은 형제들의 회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정직하게 돌아보는 것, 그것이 회개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지난 이십여 년 동안 형제들은 자신들의 죄를 묻어놓고 살았습니다. 동생을 팔아버린 그 죄를 한 번도 진지하게 꺼내어 직면한 적이 없었습니다. 회개가 일어날 리 만무합니다. 그래서 요셉은 형제들을 하나님 앞에 세우고, 자신을 정직하게 돌아보도록 다양한 방법과 수단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빌드업의 절정에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은잔이 드러낸 절망의 심연

아버지의 허락을 받은 형제들이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각종 예물과 갑절의 돈을 가지고 요셉에게 찾아옵니다. 그러나 총리 요셉의 관심은 예물에도, 갑절의 돈에도 있지 않았습니다. 오직 한 사람, 베냐민에게 있었습니다. 불안해하는 형제들에게 요셉은 안심하라 이르고, 억류되어 있던 시므온을 풀어주며, 식탁의 교제를 베풀어 줍니다. 좋은 음식을 마음껏 먹고, 밤이 깊어갑니다. 요셉은 알고 있었습니다. 열두 형제가 한자리에 모여 이렇게 함께 식사하는 것이 생애 처음이라는 사실을. 형제들은 알 턱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도 기쁨으로 벅차올랐습니다. 이제 날이 밝으면 이 모든 긴장이 끝나기 때문입니다.

아침이 됩니다. 길을 떠날 채비를 갖추는 형제들의 발걸음은 가볍기 그지없습니다. 정탐꾼의 누명도 벗었고, 아버지가 그토록 걱정하시던 베냐민도 데리고 안전하게 귀향합니다. 곡식 자루에는 곡식이 가득 차 있어 식구들을 굶길 염려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요셉에게는 아직 끝나지 않은 과제가 있었습니다. 형제들의 회개 문제입니다.

"요셉이 그의 집 청지기에게 명하여 이르되 양식을 각자의 자루에 운반할 수 있을 만큼 채우고 각자의 돈을 그 자루에 넣고 또 내 잔 곧 은잔을 그 청년의 자루 아귀에 넣고 그 양식 값 돈도 함께 넣으라 하매 그가 요셉의 명령대로 하고 아침이 밝을 때에 사람들과 그들의 나귀들을 보내니라" (창 44:1-3)

곡식 자루에 곡식을 한가득 넣고, 돈도 다시 채워 넣는 것까지는 요셉의 사랑이자 호의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냐민의 자루 아귀에 요셉이 아끼던 은잔을 숨겨 넣었다는 것, 이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까맣게 모르는 형제들은 날이 밝자 가벼운 발걸음으로 고향을 향해 길을 떠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요셉은 청지기를 보내 그들을 추격하게 합니다. 총리가 아끼던 은잔을 도둑질해 갔으니 잡아오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청지기가 따라가 은잔 도둑 혐의를 제기하자, 형제들은 격분합니다. 우리는 도둑질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때 돈도 다시 가져오지 않았느냐고 억울함을 호소하며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당신의 종들 중 누구에게서 발견되든지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는 내 주의 종들이 되리이다" (창 44:9)

얼마나 억울했으면 이 자리에서 죽겠다고, 모두가 종이 되겠다고까지 말했겠습니까. 그러면 한번 열어보자. 자루를 풉니다. 나이 많은 형부터 시작하여 한 사람 한 사람 자루 안을 조사합니다.

"그들이 각각 급히 자루를 땅에 내려놓고 자루를 각기 푸니 그가 나이 많은 자에게서부터 시작하여 나이 적은 자에게까지 조사하매 그 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된지라" (창 44:11-12)

열 명의 형제를 뒤질 때까지 은잔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오해한 것이라고 안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내 베냐민의 자루를 열자 아귀에서 은잔이 반짝이고 있습니다. 그 순간 형제들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절벽 끝에 서 있는데 누군가가 등을 밀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아득함이 아니었겠습니까.

형제들은 베냐민에게 배신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데려왔는데, 네가 이런 아이였느냐는 원망이 치밀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증거가 나와버렸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당사자 베냐민은 또 얼마나 당혹스러웠겠습니까. 도대체 이것이 왜 자기 자루에 들어와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형제들의 머릿속에는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스쳐 지나갑니다. 베냐민은 감옥에 갇힐 것이고, 아무리 울며 탄원해도 총리는 들은 체도 않을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돌아갈 면목이 없습니다. 야곱에게 뭐라고 말해야 합니까. 있을 수도 없고 돌아갈 수도 없는 이 불안감과 복잡함이 그들의 머릿속과 가슴을 가득 채웁니다. 이 복잡한 감정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절망입니다.

절망이 드러내는 사람의 진가

요셉은 왜 형제들을 절망의 깊은 심연으로 밀어 넣는 것입니까.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분명히 알려면 절망의 시간을 어떻게 이겨내는지를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진가도 절망의 시간에 드러나는 법이고, 그 사람의 정체도 절망의 시간에 극명하게 나타나는 법입니다.

요셉은 이미 그것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요셉의 절망은 비교적 일찍 찾아왔습니다. 열일곱 살 소년이었을 때 형제들에 의해 팔려가지 않았습니까. 아버지 심부름을 왔다가 이스마엘(Ishmael) 상인들의 손에 이끌려 이집트(Egypt)로 팔려갑니다. 한순간에 노예가 되어버렸습니다. 아버지에게 작별 인사를 고할 겨를도 없이 비정한 형제들의 손에서 팔렸습니다. 그것이 절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 절망의 상황에서 요셉은 두 가지를 붙잡았습니다. 첫째는 성실이요, 둘째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우선 주인 보디발(Potiphar)의 마음에 들려고 혼신을 다해 일했습니다. 성실을 인정받아 그 집의 가정 총무가 됩니다. 그런데 시험이 찾아옵니다. 주인의 아내가 그를 유혹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여호와 신앙을 붙들고 있었기에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절망의 시간에 그를 견디게 하고 지탱하게 한 것은 성실이었고,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를 붙들고 그는 절망을 버티고 이겨냅니다.

그런데 그 대가가 무엇이었습니까. 모함입니다. 또 다른 절망으로 깊이 떨어집니다. 감옥에 들어갑니다. 감옥에서도 그는 성실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의 안색을 살필 정도로 섬세하게 일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에 걸친 깊은 절망 속에서 성실과 여호와 신앙을 굳건히 붙잡았고, 하나님은 그 깊은 수렁 속에 있던 요셉을 건져 올려 이집트의 총리로 세우십니다.

요셉은 그 절망을 몸소 경험했기에, 절망을 이겨내려면 하나님 앞에 서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을 절망 속으로 밀어 넣은 것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대처하는지 보려고, 그들이 하나님을 붙잡기를 기대하며 그렇게 한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도 절망이 찾아옵니다. 인생의 주기마다 크고 작은 절망이 찾아올 때, 우리는 이 절망을 어떻게 다룹니까. 다윗은 인생을 살면서 두 번에 걸친 광야 경험을 합니다. 첫 번째는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 십수 년간 광야를 떠돌아다녔습니다. 그때는 견딜 만했습니다. 비교적 나이가 젊었고, 그를 따르는 사백 명의 용사들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를 쫓아다니는 사람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었습니다. 견딜 만했고, 견디고 버티고 이겨냅니다.

그런데 절망의 극치는 노년에 겪었던 광야 생활이었습니다. 자신의 아들 압살롬(Absalom)이 왕위를 찬탈합니다.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습니다. 자식 관리에 실패해서 다시 광야로 내몰리는 그의 인생, 그것은 절망이고 낙심이었습니다. 그때 다윗이 지어 하나님께 올려드린 시편이 시편 3편입니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시 3:1-2)

대적이 많았습니다. 그 대적 중 최고의 대적은 자신의 아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손가락질합니다. 다윗은 끝났다고, 이제 구원받지 못한다고 조롱합니다. 절망과 낙심이 그를 에워쌉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 절망을 어떻게 이겨냅니까.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시 3:3-4)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절망의 상황에서 하나님을 붙들고 이 절망을 다루고 이겨냅니다. 쉬운 것 같지만 쉽지 않습니다. 절망이 닥치면 그 근원을 스스로 찾아 해결하려는 본능이 작동합니다. 다윗의 경우 남아 있는 군사들을 모아 압살롬의 군대와 전쟁할 수도 있었습니다. 수치와 부끄러움에 자신의 목숨을 끊어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무모한 전쟁을 벌이지 않았고, 자신의 목숨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절망의 시간을 견디고 버텨냈습니다.

쉬운 것 같지만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가롯 유다(Judas Iscariot)가 있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긴 제자입니다. 예수님을 팔고 난 뒤 그는 뉘우쳤습니다. 후회가 밀려옵니다. 잘못했다는 자각이 마음속 깊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받았던 은 삼십을 가지고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갑니다. 그러나 그들은 냉랭했습니다.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 네가 책임지라고 합니다.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마 27:3-5)

유다는 돈을 들고 성소까지 갔습니다. 성전까지 간 것입니다. 성소에 돈을 던져 넣고 스스로 목매어 죽을 것이 아니라, 성소에 갔으면 그 앞에서 울어야 했습니다. 뉘우쳤다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절망적인 상황을 아뢰는 것이 순서였습니다. 성소까지 가 놓고서는 은 삼십을 던져 넣고 자기 스스로 책임지겠다며 목을 매어 죽어버렸습니다.

절망의 상황에서 내가 내 인생을 책임질 수 있습니까. 절망이란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끊어진 상황을 뜻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책임진다 말합니까. 어리석은 사람은 절망의 상황에서 자기가 책임지겠다며 자기 목숨으로 장난칩니다. 어리석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절망의 상황에 해결할 수 없는 벽에 부딪히면, 그때야말로 하나님을 붙잡아야 할 때입니다. 요셉이 그랬고 다윗이 그랬습니다. 유다는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지려 했습니다. 그것은 책임지는 것이 아닙니다. 비겁하게 피하는 것이지, 결단코 책임지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은 형제들이 절망의 한계에 내몰렸을 때,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의 희망이 끊어졌을 때, 그때 하나님을 붙잡기를 기대하며 그들을 절망 속으로 몰아넣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절망의 시간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여호와 신앙을 굳게 붙잡고 그 시간을 견디고 버티고 이겨내시기를 바랍니다.

반복되는 선택 앞에 선 형제들

이제 절망 속에 던져진 형제들 가운데 대표인 유다가 요셉에게 말합니다.

"유다가 말하되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정직함을 나타내리이까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 (창 44:16)

형제들은 요셉에게 돌아오면서 합의에 이른 것으로 보입니다. 연대 책임을 지자, 함께 종이 되겠다고 말하자고 뜻을 모은 것입니다. 이것만으로도 형제들은 과거에 비해 크게 성장하고 성숙한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요셉은 그들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오히려 더 강하게 압박합니다.

"요셉이 이르되 내가 결코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잔이 그 손에서 발견된 자만 내 종이 되고 너희는 평안히 너희 아버지께로 도로 올라갈 것이니라" (창 44:17)
  • *"평안히"**라는 말이 비수처럼 가슴에 와닿지 않습니까. 평안하지 않은데 평안히 돌아가라고 합니다. 이 "평안히"라는 말을 곱씹어 보면, 이십일 년 전 요셉이 소리 지르며 팔려갈 때 평안히 집으로 돌아갔던 형제들을 겨냥한 책망의 언어입니다.

이제 선택은 형제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십여 년 전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이 놀라울 만큼 닮아 있습니다. 본질은 동일한데, 세부 내용이 조금 다릅니다. 이십일 년 전 형제들은 요셉을 은 이십에 팔아버렸습니다. 구덩이에 가둬놓고 음식을 먹으면서 자기들끼리 웃고 즐거워하다가, 상인들이 오자 은을 받고 팔아치웠습니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안히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지금은 명분이 있습니다. 빼도 박도 못하는 도둑이라는 명분입니다.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할 말이 있지 않습니까. "아버지, 아버지께서 그토록 아끼시는 막내아들이 알고 보니 도둑이었습니다. 총리의 은잔에 손을 댔습니다. 잡혀서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충분한 명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비슷해도 내용이 달라도, 본질은 동일합니다. 형제를 유기하는 것, 그 본질은 똑같습니다. 과거에는 없던 명분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요셉의 옷을 벗기고 짐승을 잡아 피를 묻혀 아버지에게 던져 주며, "오다가 주웠습니다. 요셉이 맹수에게 잡아먹힌 것이 틀림없습니다"라고 거짓말했습니다. 없던 명분을 억지로 만들었고, 지금은 명분이 이미 갖추어져 있는 것뿐입니다. 형제를 버려두고 떠나는 상황의 본질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이 살다 보면, 과거에 지었던 죄의 상황과 놀랍도록 닮은 상황을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과거에도 그 죄에 넘어졌는데, 시간이 흘러 동일한 상황을 맞이했을 때 또다시 넘어져 버린다면, 십수 년이 지나고 이십 년이 지나는 동안 신앙의 성장이 있었던 것입니까, 없었던 것입니까. 신앙의 성장이 없는 사람은 같은 상황이 오면 동일한 죄를 반복하고, 같은 문제에 계속 넘어집니다. 믿음의 성장이 있는 사람이야말로 같은 상황이 왔을 때 반성하고 돌이켜 그 죄에 넘어지지 않습니다.

나이가 이십에서 사십이 되고 육십이 되어도 이십 대에 지었던 죄가 육십까지 반복되면, 그 사람은 늙은 것이지 성장한 것이 아닙니다. 사십 대에 지은 죄가 팔십이 지나도 고쳐지지 않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 있는 죄인이지 성장한 것이 아닙니다. 성장이란 과거의 잘못을 철저하게 반성하고 돌이켜, 동일한 상황이 왔을 때 하나님께서 기회로 주시는 그 순간을 붙잡고 두 번 다시 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한 번은 넘어질 수 있습니다. 두 번 실패하고 세 번 넘어지면 그것은 믿음의 실력이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같은 죄에 거듭 넘어지는 사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벧후 2:22)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서, 적어도 개와 돼지보다는 나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과거에 넘어졌던 그 죄에 또다시 걸려 넘어지고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인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결론

요셉은 형제들에게 기회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를 두고 떠나는 어리석은 죄를 반복하지 말라고, 선택의 기로 앞에 세워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이와 같은 선택의 기회를 주십니다. 과거의 실패와 놀랍도록 닮은 상황 앞에 우리를 다시 세우실 때, 그것은 심판이 아니라 은혜의 기회입니다.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요셉처럼, 다윗처럼 하나님을 붙잡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유다처럼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지겠다며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택의 기회 앞에서, 과거와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는 것, 그것이 믿음의 성장입니다. 그 기회를 붙잡아 하나님 앞에 믿음의 성장을 보여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요셉처럼 다윗처럼 하나님을 붙잡겠습니다. 하나님을 붙잡고 성실하게 믿음으로 살아내겠습니다. 가롯 유다처럼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게 하옵소서. 절망의 상황에서 우리 인생을 우리가 책임질 수 없사오니,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이 상황을 건너가고 돌파하고 견디고 이겨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이가 들어도 성장이 없으면 늙어 가는 것밖에 별다른 것이 없다고 하셨사오니, 주여 우리가 나이 들어 가며 믿음의 성장이 있게 하여 주옵소서. 과거에 넘어졌던 것에 다시는 넘어지지 않게 하옵소서. 사탄에게 한 번은 속아도 두 번은 속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고 선택하게 하실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주여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붙잡아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