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를 대신하여
본문: 창세기 44:18-34
사마천(司馬遷)이라는 인물은 중국 전한(前漢) 시대에 활동했던 역사가였습니다.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가 남긴 『사기(史記)』라는 저서는 한 번쯤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그만큼 위대한 역사가였습니다. 사마천은 『화식열전(貨殖列傳)』이라는 책도 남겼는데, 이 책은 중국(中國) 역대 부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부를 축적했으며, 그 부를 어떻게 계승하고 이어갔는지를 기록한 책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선곡(宣曲)에 사는 임씨(任氏) 가문의 이야기가 흥미롭습니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했던 진시황(秦始皇)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뒤, 전국 각지의 군웅들이 할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마다 권력을 잡으려는 이들이 곳곳에서 일어났는데, 그들에게는 권력 외에 공통된 관심사가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진시황의 창고였습니다. 금은보화를 탈취하려는 자들이 앞다투어 몰려들었고, 그들의 표적은 보석과 귀금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임씨는 달랐습니다. 다른 이들이 금붙이와 보석을 쓸어 간 뒤 텅 빈 창고에 종들을 데리고 가서 곡식을 차근차근 자기 집 지하 광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사람들이 의아해하며 물었습니다. 곡식은 있을 만큼 있을 텐데, 왜 금은보화 대신 무거운 곡식을 끌고 가느냐고. 임씨는 빙그레 웃으며 답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것이라고.
세월이 흘렀습니다. 혼란기는 쉽게 수습되지 않았습니다. 진시황 사후 천하의 군웅들은 초나라(楚)의 항우(項羽)와 한나라(漢)의 유방(劉邦) 두 세력으로 나뉘었습니다. 그 싸움이 장기화되면서 전국이 초토화되었고, 백성들은 농사를 지을 수 없었습니다. 곡물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습니다. 결국 금은보화를 가져갔던 자들이 그 모든 것을 내놓고 임씨에게서 곡식을 사 갔습니다. 사마천이 이 이야기를 통해 들려주고 싶었던 것은, 큰 부자가 되려면 세상의 흐름을 맹목적으로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교훈이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안목, 곧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마천은 이어서 의미 있는 말을 남겼습니다. 임씨 가문이 당대에 그치지 않고 오랫동안 부를 유지할 수 있었던 까닭은 세 가지 원칙을 지켰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첫째, 검소하고 소박하게 살면서 직접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길렀습니다. 아무리 큰 부자라도 직접 땀 흘리지 않으면 현장의 감각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둘째, 좋은 땅이 있으면 웃돈을 얹더라도 반드시 그 땅을 사들였습니다. 욕심에 겨워 필요 없는 땅을 사지 않으나, 땅을 보는 안목을 길러 좋은 땅은 반드시 확보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셋째, 공적인 일을 할 때는 그 일이 다 끝난 뒤에야 비로소 고기와 술을 즐기라고 했습니다. 평소에 음주가무를 삼가라는 교훈이었습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세 가지 원칙은 지극히 평범합니다. 누구나 알고 있는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런데 이 원칙을 일관되게 지켜 나가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임씨 가문은 오랫동안 부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믿음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는 읽어서 알고,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말씀은 우리 안에 차고 넘칩니다.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지키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말씀이 내 삶이 되고, 그 삶으로 말씀을 살아내는 일은 무겁고 어려운 일입니다.
은혜를 향한 첫 발걸음
오늘 본문에서 유다가 바로 그 어려운 일을 해내고 있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막내 베냐민을 데려가도록 허락했고, 형제들은 막내를 데리고 요셉 앞에 섰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을 초대하여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배불리 먹고 하룻밤을 총리의 관저에서 묵은 뒤, 이튿날 아침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얼마 가지 못해 총리가 보낸 청지기가 뒤따라왔습니다. 총리가 아끼던 은잔을 훔쳐 갔다는 것입니다. 형제들은 펄쩍 뛰며 부인했습니다. 자루를 열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발견되었습니다. 유구무언이었습니다.
형제들은 모두 끌려가 요셉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한 마음으로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 함께 책임지겠습니다, 여기서 종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은잔이 발견된 베냐민만 종이 되고, 나머지는 평안히 아버지에게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이제 결단해야 할 순간이 왔습니다. 베냐민을 두고 올라갈 것인지, 아니면 다른 길을 찾을 것인지.
이때 유다가 담담하게 자기 집안 이야기를 총리에게 풀어놓습니다.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막내를 데려오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 하나가 집을 나간 뒤 소식이 끊겼고, 그래서 막내에게 이토록 집착하는 것이라고. 만약 이 아이를 데려가지 못하면 아버지가 돌아가실 것이라고 호소했습니다. 그 대화 가운데 유다가 의미심장한 말을 남깁니다.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흰 머리로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창 44:30-31)
지금 유다가 누구를 걱정하고 있습니까. 베냐민이 아니라 아버지 야곱입니다. 유다가 아버지를 걱정하다니,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유다는 편애의 피해자였습니다. 레아가 낳은 네 번째 아들이었습니다. 열두 명의 아들이 한창때 뛰어다닐 그 집에서 아버지의 시선은 늘 요셉과 베냐민에게만 머물러 있었습니다. 자기가 사랑하지 않는 레아가 낳은 네 번째 아들, 그 이름을 아버지가 제대로 알았는지조차 장담할 수 없습니다. 열두 아이가 오가는 가운데 아버지가 확실하게 아는 아들은 요셉과 베냐민뿐이었을 것입니다. 사랑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한 채, 편애의 상처를 가슴 깊은 곳에 안고 살아갔던 아들이 바로 유다입니다.
그런 유다가 지금 아버지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올라가지 않으면 아버지가 죽을 것이라고, 아버지가 죽는 모습을 어떻게 눈 뜨고 볼 수 있느냐고 호소합니다.
유다가 어떻게 이렇게 변했습니까. 은혜를 향하여 한 발짝을 내디뎠기 때문입니다. 유다가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내 손에서 이 아이를 찾으십시오. 내가 이 아이 베냐민을 위한 담보가 되겠습니다." 이것이 결단이었고, 은혜를 향한 첫 발자국이었습니다.
은혜를 향하여 첫발을 뗀 사람은 두 번째, 세 번째 발자국도 내디딜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이 중요합니다. 첫 발자국, 그 첫 발자국을 은혜를 향하여 내딛기 시작하면 그 다음부터는 가속이 붙습니다. 이것은 은혜를 향하여 믿음의 여정을 시작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놀라운 은총입니다. 은혜 밖에 머물러서는, 변방에 있어서는 이 비밀을 알 길이 없습니다.
유다가 베냐민의 담보가 되겠다고 선언한 순간, 유다의 생명과 베냐민의 생명이 하나로 묶였습니다. 두 사람이 공동 운명체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유다의 생명과 아버지 야곱의 생명이 하나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사실 지금 유다가 아버지를 담보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목숨을 위하여, 아버지가 쓰러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 아이를 반드시 데려가야 한다고 간청합니다. 은혜의 여정을 이미 시작했기에 첫 발자국이 두 번째, 세 번째 발자국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발을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을 생각해 봅니다. 바울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1차, 2차, 3차 선교 여행을 감행했고, 로마에까지 이르렀으며, 나아가 스페인(Hispania) 선교까지 꿈꿨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목회를 시작할 때 처음부터 이토록 원대한 선교의 꿈을 품고 시작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난 뒤 고향 다소에 머물러 있을 때, 바나바가 찾아와 함께 목회하자고 권했습니다. 그렇게 안디옥 교회의 교사가 되었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아름답게 성장하던 중 성령께서 바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우라는 말씀을 주셨고, 바울은 결단하여 1차 선교 여행의 길에 나섰습니다. 돌에 맞아 죽을 뻔한 고초도 겪었습니다. 갖은 고생을 다 했습니다. 그러나 그 첫발을 내딛고 나니 은혜가 놀라웠습니다. 받은 은혜가 가슴을 뜨겁게 했고, 이 한 번으로 그칠 수 없었습니다. 2차 선교 여행으로 유럽에 갔습니다. 거기서 더 놀라운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3차 선교 여행으로 에베소에 이르렀으며, 예루살렘을 거쳐 투옥되었다가 다시 로마까지 갔습니다. 그리고 스페인 선교를 꿈꾸기에 이르렀습니다. 믿음의 첫발을 떼기가 어려운 것이지, 그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면 가속이 붙어서 속도감 있게 계속 달려갑니다.
바울은 자기 인생을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 3:13-14)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한 번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고 나니 속도가 붙어 열심히 달려갑니다. 잠시라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들어간 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역사입니다. 가만히 있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머물러 있어서는 은혜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그러했습니다. 캄캄한 밤중에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베드로도 물 위를 걷고 싶었습니다. "주님, 저도 물 위를 걷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한마디로 말씀하셨는데, 예수님을 향하여 물 위를 걸어가려면 먼저 배에서 내려야 합니다. 배에서 내리는 것이 쉽겠습니까. 캄캄한 밤, 풍랑이 치고, 앞이 보이지 않고, 눈앞에 파도가 일렁이는데, 배에서 내리면 곧 죽음인데, 그런데 베드로는 용감하게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배에서 내렸습니다. 그 다음은 걸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걸어갑니다. 물에 빠져도 괜찮았습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부르짖으니 주님이 다시 건져주셨습니다. 이렇게 베드로는 인류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물 위를 걸은 위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첫발을 떼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음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유다는 형제들보다 한 걸음 앞서 나아갔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핑계거리가 참으로 많습니다. 새해를 준비하면서 믿음의 자리에서 한번 섬기고 봉사하고 일해보겠다는 마음이 들면서도, 동시에 여러 현실과 상황이 발목을 잡습니다. 이건 이래서 안 되겠고, 저건 저래서 안 되겠고, 이런저런 염려와 걱정과 근심이 우리를 붙잡습니다. 그러면 믿음은 성장할 수 없습니다. 믿음의 발을 떼어 그 자리로 들어가기 시작하면 거기에 은혜가 있습니다. 그 은혜는 또 다른 은혜를 우리에게 가져다줍니다.
유다가 받은 은혜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의 마음속에 있던 편애의 상처, 그 깊은 트라우마가 치유된 것입니다. 편애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고서야 어떻게 아버지를 염려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상처가 아물었습니다. 그 흔한 상담 치료 한 번 받지 않았습니다. 정신과에 가서 의사 선생님을 만나 약 처방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수십 년 동안 자기를 괴롭혔던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원망과 상처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열심히 섬기고 일하는 동안 덮이고 녹아 없어져 버렸습니다.
우리가 언제까지 과거의 상처에 매여 있겠습니까. 언제까지 과거의 아픔 때문에 발목 잡혀서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된다고 말하며 살겠습니까. 은혜의 자리로 발걸음을 옮겨야 합니다. 누군가를 위하여 담보가 되고, 헌신하고, 수고하겠다고 나서면 그 자리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은혜는 우리의 과거를 치유하고도 남습니다.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의 아픔을 치료하고도 남습니다. 여기서부터 격차가 만들어집니다. 유다의 형제들 모두가 상처받았습니다. 나머지 아홉은 그 상처를 안고 그대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오직 유다만 치유되었습니다. 그가 담보의 자리로 달려갔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머물러 있지 마십시오. 믿음의 자리로 걸어가고 달려가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과거도 치유하시고, 상처도 치유하시며,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셔서 우리를 세우시고 회복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대신 짊어지는 믿음
이제 유다가 하고 싶었던 말의 핵심에 이르렀습니다.
"주의 종이 내 아버지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짐을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창 44:32-33)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베냐민을 대신하여 자기가 종이 되겠습니다. 자기를 붙잡아 두고, 영원히 이곳에서 종이 될 테니 베냐민은 형제들과 함께 보내달라는 것입니다. 이 고백이 위대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유다는 그 어디에서도 베냐민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요셉이 꾸민 일이었지만, 형제들의 눈앞에서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나온 것을 그들은 직접 목격했습니다. 베냐민이 총리의 은잔을 도둑질했다는 의혹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약속도 있었습니다. 이 아이를 안전하게 데려오겠다고. 그런데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아버지, 이 아이가 알고 보니 도둑이었습니다"라고 말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상황을 핑계 대지 않았습니다. 베냐민의 잘못을 들추어내지 않았습니다. 상황이 바뀌었다고 해서 자신이 한 말을 뒤집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받아들이고, 베냐민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으며, 그 모든 죄를 자기가 짊어졌습니다.
이것은 유다의 먼 후손 가운데 오신 예수님의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약속하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인간들의 죄짐을 지고, 죄와 죽음과 사망의 권세에서 그들을 구원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를 포함하여 삼십삼 년을 사셨습니다. 살아보니 인간들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겉은 멀쩡하나 속은 회칠한 무덤처럼 탐욕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앞에서 하는 말과 뒤에서 품고 있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입에서는 거친 말이 쏟아지고, 마음에는 살의가 가득하며, 몸은 정욕에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민낯이었습니다.
"하나님, 이 땅에 와서 보니 이런 인간들을 위해 내가 죽을 이유가 없습니다. 이들은 이 죄로 자기 죄를 자기가 감당해야 합니다. 아버지와 맺은 약속은 취소입니다.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기까지 사람들을 향한, 인간들을 향한 저주와 원망을 토해내신 적이 한마디도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 모든 인류의 죄를 주께서 다 지고 가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한 번도 누군가를 탓하신 적이 없습니다. 환경이 바뀌었다고, 상황이 바뀌었다고 약속을 손바닥 뒤집듯이 뒤집으신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상황을 핑계합니다. 환경을 핑계합니다. 사도 바울이 사랑장에서 말했습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이라고. 그러나 우리는 늘 나를 사랑하고, 나의 유익만 구합니다. 입으로 약속하고 그 자리에 섰는데, 환경이 받쳐주지 못하면 일 못 하겠다고 합니다. 주변 사람들이 악하니 여기서 일하는 것은 취소라고, 못 하겠다고 합니다. 우리 입으로 그런 말을 얼마나 내뱉었습니까. 하나님과 약속한 것이라면 환경이 바뀌고 상황이 달라져도 우직하고 올곧게 지켜내야 합니다. 유다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상황이 바뀌어도 환경이 바뀌어도 베냐민을 단 한 번도 원망하지 않고, 아버지와 맺은 약속을 끝까지 지켜 나갔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행함으로 온전해지는 믿음
유다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야고보 사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약 2:14)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약 2:22)
입으로 떠드는 일은 많습니다. 우리가 결단한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해야 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입으로 내뱉은 말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우리 삶으로 실천되고 지켜져서 열매가 된 것이 과연 몇이나 됩니까. 한 해를 돌이켜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입으로 다짐한 것들,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하겠다고 약속한 것들. 그런데 나에게 손해가 되고, 나에게 유익하지 않다는 이유로 지키지 않아서 공중에 흩어지는 모래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을 과연 믿음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유다처럼 아버지 앞에서 약속한 대로, "이 아이를 위한 담보가 되겠습니다"라고 입으로 선언한 것을 이제 몸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제가 여기 잡혀 있겠습니다. 제가 여기서 종이 되겠습니다. 이 아이를 보내주십시오." 이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이 믿음이 귀한 까닭은, 이렇게 실천하는 사람이 극히 드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짜 믿음, 위선의 믿음, 거짓의 믿음이 아니라, 참된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인정받고 사랑받는 믿음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부디 결단한 것을 행하고 지켜 가야 합니다.
결론
새해를 앞두고 새롭게 결단할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세운 결심과 결단, 주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들을 향해 믿음의 발자국을 내딛고, 실천하고, 살아내어 아름다운 열매가 되기를 바랍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조상이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담보의 자리에서 시작된 그의 첫 발걸음은 편애의 상처를 치유하고, 형제를 대신하여 자기 몸을 내어놓는 헌신으로까지 나아갔습니다. 가만히 머물러 있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믿음의 자리로 걸어가고 달려가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과거도 치유하시고 상처도 치유하시며,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셔서 새로운 은총으로 우리를 세우시고 회복하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구원받은 백성입니다. 그 은혜 가운데 함께 거하고 머물기를 바랍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믿음의 첫 발걸음을 떼는 것이 어렵습니다. 자꾸만 주저하고 망설입니다. 여러 가지 상황들을 바라보고, 하지 못할 이유들을 찾습니다. 그러나 유다를 보며 다시 용기를 냅니다. 베냐민을 위한 담보가 되기를 결단한 유다가 아버지 야곱을 위한 담보로 성장하고 나아갔습니다. 그러는 사이 그의 마음에 있던 상처가 치유되고 회복되었습니다. 주여, 우리도 이제 믿음의 여정을 시작하고, 다시 한번 그 길을 달려가게 하여 주옵소서. 멈추지 않게 하시고, 머물지 않게 하여 주시며, 오로지 한 길 가는 순례자로 바울처럼, 베드로처럼 달려가고 주님을 향하여 물 위를 걸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결단한 것을 실천하기 원합니다. 환경과 상황을 핑계하지 않겠습니다.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내 삶으로 믿음을 살아내겠습니다. 주여, 그리하여 우리의 삶에 열매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원하오니, 아버지 하나님 우리와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