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강 / 하나님이 먼저 보내셨나니 (45:1-8)

하나님이 먼저 보내셨나니

본문: 창세기 45:1-8

독일(Deutschland)의 한 잡지에 1892년 처음 실린 그림이 있습니다. 한쪽에서 보면 토끼처럼 보이고, 다른 쪽에서 보면 오리처럼 보이는 이른바 '토끼-오리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1899년 미국의 심리학자 조지프 재스트로(Joseph Jastrow)가 자신의 저서에서 소개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습니다. 재스트로는 이 그림을 소개하면서 의미심장한 말을 남깁니다. "우리는 눈으로 사물을 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눈이 아닌 머리로 본다." 이 말을 곰곰이 되새겨 보면 깊은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바라볼 때, 순수하게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축적된 삶의 경험과 세계관, 가치관이라는 렌즈를 통해 사물을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오리라는 세계관으로 이 그림을 보면 오리가 보이고, 토끼라는 가치관으로 보면 토끼가 보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세계관은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크게 보면 사람들은 세 가지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첫째는 유물론적 세계관입니다. 세상 모든 것이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며, 정신이나 영혼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존재 역시 인정하지 않습니다. 둘째는 진화론적 세계관입니다. 적자생존(適者生存)이 핵심입니다. 여기까지 살아온 인간과 자연의 개체들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살아남았기에 지금 이 자리에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치열한 경쟁을 정당화합니다. 내가 짓밟지 않으면 누군가가 나를 짓밟을 것이라는 논리이며, 이 세계관 아래서는 전쟁마저 정당화됩니다. 셋째는 소수의 사람들이 붙들고 있는 성경적 세계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자기 자신을 관조하는 것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보면 이 성경적 세계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결코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몸은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실상은 유물론적, 진화론적 세계관을 품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요셉의 세계관, 그의 가치관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해석했습니다. 이 놀라운 세계관은 그가 고난을 겪고 험난한 일을 당해도 결코 부서지거나 변형되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원형을 유지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 인생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얼마나 중요한지 함께 살피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한 사람의 희생이 여는 생명의 길

하나님은 요셉과 그의 형제들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요셉은 갑자기 애굽(이집트)의 총리가 되어 7년 풍년을 관장하고, 이어지는 흉년을 관리해야 했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이 막중한 책임을 감당하느라 마음은 있었지만 고향의 형제들을 찾아볼 여력이 없었습니다. 특히 어머니 라헬이 낳은 동생 베냐민을 얼마나 보고 싶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만남의 자리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형제들이 흉년을 피해 애굽에 곡식을 사러 왔고, 바로 그 시간, 그 장소에서 가족이 상봉하게 된 것입니다.

형들을 만나는 순간, 요셉의 마음속에는 단 하나의 소원이 생겼습니다. 형제들이 회개하기를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형제들이 진심으로 회개해야 비로소 화해가 가능하고, 회개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형제들을 하나님 앞에 세우기 위해 그들을 절망의 끝자락까지 몰아붙입니다. 정탐꾼이라는 누명을 뒤집어씌우고, 심지어 베냐민의 자루에 자신이 사용하는 은잔을 넣어 두었습니다.

이처럼 깊은 수렁 속으로 밀어 넣었을 때, 유다의 입에서 한마디 말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 아이를 대신하여 내가 당신의 종이 되겠습니다." 이것은 담보 신앙이 확장되고 열매를 맺는 순간이었습니다. 유다의 이 한마디에 요셉의 굳건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리고 형들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냅니다.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창 45:3-4)

형제들은 처음에 어리둥절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20여 년 전 당신들이 팔아넘긴 사람이 바로 나입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들은 눈앞에 서 있는 이가 요셉임을 믿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요셉의 마음이 무너지는 데, 요셉이 형제들을 용서하는 데 열 명 형제 모두의 회심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논리적으로 말하면 열 명이 똑같이 요셉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유다처럼 자신의 과거를 회개하고 돌이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의 회심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단 한 사람, 유다의 담보 신앙이면 충분했습니다. 유다 한 사람이 자신을 내어놓고 "내가 이곳에서 종이 되겠습니다"라고 선언하는 순간, 막혀 있던 뚝이 무너지듯 요셉의 마음이 순식간에 허물어져 내린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십자가 원리를 발견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전 15:21-22)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후로 오고 오는 모든 인류가 그 안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한 분의 십자가, 단 한 분의 보혈이면 충분했습니다. 그분의 희생, 그분의 죽음이면 온 세상 모든 인류가 구원받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열 명의 형제를 살리는 데 유다 한 사람의 희생이면 충분했습니다.

훗날 야곱의 아들들과 그 가족, 70여 명 이상이 애굽으로 이주해 옵니다. 아직 5년이나 남은 흉년 동안 그들이 먹고 살아갈 모든 것을 요셉이 해결해 줍니다. 누구 덕분입니까? 유다 한 사람 덕분입니다. 한 사람의 희생, "내가 이곳에서 종이 되겠습니다"라는 결단의 실천, 그 한 가지가 70여 명 이상의 생명을 살리게 된 것입니다. 한 명이면 충분했습니다.

올해 우리 교회의 표어는 "우리는 생명을 살리는 공동체입니다"로 정했습니다. 지금까지 어떤 가정이, 어떤 공동체가 수십 년째 문제없이 유지되고 있다면, 그 안을 깊이 들여다보면 한 사람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가정이 깨어지고 문제가 생기고 어려움을 겪는다면, 그 희생하는 한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공동체와 각 부서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성장하고 발전하려면 한 사람의 희생이면 충분합니다. 한 사람의 수고와 헌신이면 교회의 모든 부서가 문제없이 성장하고 자라날 수 있습니다.

유다 한 사람의 희생이 70여 명의 생명을 살리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바로 그 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누군가의 희생에 빚진 사람들입니다. 누군가가 희생하고 헌신하고 수고해서, 우리는 그 은혜 위에 올라탄 인생들입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렇게만 살겠습니까? 우리도 나를 통하여 생명이 흘러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희생하고, 내가 수고하여, 유다처럼 70여 명 이상의 생명을 살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거룩한 소망을 가지고, 이러한 꿈과 희망을 품고 2025년 새해를 출발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 같은 보잘것없는 한 사람을 통해서도 위대하고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가실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생각해 보면,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생명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과 마찬가지로, 사망도 한 사람으로부터 왔습니다. 에덴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뱀이 하와를 유혹했고, 하와가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선악과를 먹은 하와가 곁에 있는 아담에게 주었고, 아담도 그것을 먹었습니다. 두 사람은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때 이후로 아담의 모든 후손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 한 사람의 죄로 인해 우리의 본성 자체가 죄를 품은 인간으로 태어납니다. 생각하는 것, 계획하는 것, 꿈꾸는 것, 소망하는 것이 가만히 두면 모두 죄를 향해 달려가는 인생들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한 사람의 죄가 온 인류를 죄로 물들게 한 것입니다.

죄짓는 것은 나 혼자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탄이 우리를 유혹하면, 나 홀로 죄를 짓고 넘어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죄에는 영향력이 있습니다. 죄는 흘러갑니다. 내가 죄를 지으면 가족이 죄로 물듭니다. 가족에게 사망의 음침함이 넘실거리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지고 죄의 자리로 들어가 버리면, 내가 속한 공동체가 죄로 물들어 갑니다. 이것은 생명의 원리와 죽음의 원리가 동일하게 작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죄짓는 것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출발점이 될 것인지, 사람을 죽이는 사망의 관문이 될 것인지는 오로지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죄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 생명과 사망의 문제 앞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우리 자신이 선택해야 합니다. 부디 유다처럼 생명을 살리는 출발의 첫 시작점이 되시기 바랍니다.

회개가 빚어낸 담보 신앙

그렇다면 유다는 어떻게 해서 이 위대한 결단을 내리고, 생명을 살리는 첫 시작이 될 수 있었을까요? 창세기 38장이 그 비밀을 전해 줍니다. 창세기를 읽다 보면 38장이 다소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37장은 형제들이 요셉을 이스마엘 상인에게 팔아넘기는 이야기로 끝나고, 39장은 팔려간 요셉이 애굽 보디발의 집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38장이 없으면 37장과 39장이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그런데 38장에는 유다가 어떤 인간이었는지에 관한,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첫째, 그는 이기적인 인간이었습니다. 큰아들에게 다말(히브리어: תָּמָר, 타마르)이라는 며느리를 맞이했지만 큰아들이 후사 없이 죽었습니다. 당시 관습인 역연혼(levirate marriage, 수혼 제도)에 따라 둘째 아들을 며느리에게 주어야 했고, 둘째 역시 자식 없이 죽자 셋째 아들 셀라를 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이 며느리가 불길한 여인이라 여겨 친정으로 내쫓아 버렸습니다. 율법대로 하지 않은, 이기적인 인간이었습니다.

둘째, 유다는 정욕에 사로잡힌 인물이었습니다. 양털 깎는 날, 길가에서 얼굴을 가리고 앉아 있던 며느리 다말을 창녀로 착각한 유다는 자신이 지니고 있던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담보로 주고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순간의 정욕을 채우기 위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까지 내어 준, 정욕에 지배당한 인간이었습니다.

셋째, 유다는 이중적인 인간이었습니다. 그 일로 며느리가 임신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유다는 "그를 끌어내어 불태워 죽이라"고 명합니다. 자신은 온갖 추악한 행위를 저지르면서, 며느리는 죽이려 하는 이중성의 극치였습니다. 그때 다말이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내밀며 말합니다.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내가 임신하였나이다."

"여인이 끌려나갈 때에 사람을 보내어 시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나이다 청하건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이니이까 한지라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하지 아니하였더라" (창 38:25-26)

"그는 나보다 옳도다." 유다는 자신의 추악함을 그대로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 여인을 가까이하지 않았다는 것은 단순히 다말만 멀리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회개하고 정욕적인 삶, 이중적인 삶을 청산했다는 선언입니다. 창세기 38장이 그 자리에 기록된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회개하기 전 유다의 민낯을 보여 주고, 동시에 그가 철저하게 회개한 이후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회개한 이후의 유다는 이전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버지 야곱 앞에서 담보 신앙을 결단했고, 과거의 피해 의식에 매여 살지 않았습니다. 그의 담보 신앙은 성장하고 발전하여 마침내 "그 아이를 대신하여 내가 여기서 종이 되겠습니다"라는 결단으로 꽃을 피웠습니다. 이것은 회개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그래서 회개가 중요합니다.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이켜 세우는 일입니다. 회개는 1년에 한 번 하는 행사가 아닙니다. 우리는 추악한 원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기에, 매일매일 살아가면서 하나님 앞에 나를 말씀에 비추어 보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살피고, 돌이키고, 회개해야 합니다. 유다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이처럼 맺어 가지 않았습니까? 회개한 자는 과거의 추악한 모습에서 변화되어 생명을 살리는 아름다운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과거가 어떠하든 하나님 앞에서 중요하지 않습니다. 매 순간 회개하고 돌이키며 하나님 앞에 서면, 하나님은 우리를 생명을 살리는 사람으로 사용해 주실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가 우리 인생 각 사람에게 임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섭리의 눈으로 본 인생

이제 형들 앞에서 울고 통곡하며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요셉이 감정을 추스르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창 45:5)

형제들은 20여 년 전에 요셉을 팔았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고백을 주목하십시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습니다." 주어가 바뀌어 있습니다. 형제들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이 고백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이어서 다시 한번 선언합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창 45:7)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고백합니다. 요셉은 결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닙니다. 과거의 기억을 깡그리 잊어버린 것도 아닙니다. 형제들이 20여 년 전에 자신을 팔아버린 사실은 변할 수 없는 팩트(fact)입니다. 그 사실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우주적 관점에서, 섭리의 관점에서 자신의 인생을 새롭게 바라보았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섭리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자신의 인생을 원한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1인칭의 좁은 시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관점, 섭리의 관점에서 자신의 인생을 관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관점에서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니, 형제들이 나를 팔았지만 그 이면에는,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주관하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 일을 주관하셨습니까? 생명을 살리시려고 하나님이 그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요셉의 신앙 고백입니다.

이것은 마치 이러한 경우와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가난한 집에 태어나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학대받고 모진 매를 맞으며 힘겨운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결혼 생활도 평탄하지 못한 험난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를 전도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은혜가 비 오듯, 물 붓듯 그에게 쏟아졌습니다. 인생의 말년에 이르러 그가 고백합니다. "하나님, 제가 만약 아무 걱정 없고 넉넉한 부잣집 자녀로 태어났다면 과연 하나님을 믿었을까요? 어린 시절의 고난과 어려움이 있었기에,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을 때 즉각 응답했고, 구원받은 백성이 되었고, 이제는 내가 죽어서 천국에서 눈 뜰 줄로 믿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하신 일입니다."

이렇게 고백한다고 해서 유년 시절의 상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질게 매질하던 아버지에 대한 아픔도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모든 인생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섭리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 이것이 요셉의 위대한 점입니다.

이 고백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인생을 치열하게 버티고 견디고 이겨내며 살아온 사람만이, 인생의 마지막에 고백할 수 있는 단 한 줄의 귀한 신앙 고백입니다. 요셉은 어떤 인생을 살았습니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인생 앞에서, 당장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노예의 인생, 죄수의 인생 앞에서 그는 한 번도 하나님을 저버리고 하나님을 모른다고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믿음의 인생을 지키며 살아왔던 믿음의 수호자였기에 요셉만이 할 수 있는 고백인 것입니다.

만약 요셉의 형제 중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다면 어떻겠습니까? "야, 이제 보니 네가 출세했구나. 네가 애굽 총리가 된 건 다 우리 덕분이야. 우리가 너를 팔았기 때문에 네가 이렇게 된 거야. 우리한테 감사해. 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야." 이것은 가해자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남이 대신 해 줄 수 있는 말도 아닙니다. 그 고난의 시간을 홀로 견디고 버티고 이겨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이곳에 보내셨습니다." 이 고백이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요셉의 고백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창 45:8)

자신이 애굽의 총리가 된 것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고백합니다. 요셉은 형들 앞에서 "제가 꿈을 잘 꾸지 않습니까, 바로가 꿈을 꾸었는데 제가 기가 막히게 해몽해 주었기 때문에 총리가 되었습니다"라고 자랑하지 않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준 것도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출세한 것, 총리가 된 것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고백합니다.

섭리 신앙, 하나님 관점의 신앙을 가지면 교만이 사라집니다. 섭리 신앙을 가지면 원수도 없어집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이곳으로 팔아넘긴 것은 형제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것이라고 고백하는데, 원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내 인생의 원수도 사라지고, 내가 이룬 업적도 사라지고,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셨다고 고백하는데 교만이 끼어들 자리가 없습니다. 교만은 사람을 죽이는 병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결코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섭리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론

세계관이 이처럼 중요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성경적 가치관과 섭리 신앙의 세계관을 가져야 합니다. 같은 인생의 사건을 놓고도 유물론의 눈으로 보면 우연이 되고, 진화론의 눈으로 보면 적자생존의 경쟁이 되지만, 섭리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의 역사가 됩니다. 요셉은 바로 그 섭리의 눈으로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았기에 원한 대신 감사를, 교만 대신 겸손을, 복수 대신 용서를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우리도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다시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나온 고난의 시간 속에서도, 이해할 수 없었던 아픔의 순간에도, 그 배후에는 생명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음을 고백하는 것, 이것이 요셉의 신앙이요, 오늘 우리에게 요청되는 신앙입니다. 이 섭리의 눈으로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고, 세상을 보며, 2025년 한 해를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생명을 살리는 사람으로 사용하여 주옵소서. 한 사람 유다로 말미암아 많은 생명이 구원받고 살았습니다.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오고 오는 모든 인류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주여, 우리가 죄를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할지, 생명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할지 선택하게 하옵소서. 매일매일 회개하는 자들이 되어서, 생명을 전하는 자, 유다와 같은 자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섭리 신앙을 갖기를 원합니다. 좁고 좁은 소견으로 살지 않도록 도와주시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내 인생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이리로 보내셨습니다"라는 이 고백을 통하여 원수도 사라지고, 나의 업적도 사라지며, 오직 하나님만 남아 있는 아름다운 성경적 세계관, 섭리 신앙의 가치관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