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제사를 드리니
본문: 창세기 46:1-27
조선시대 실학자 이익(李瀷)이 자신의 저서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노인이 겪는 비탄과 슬픔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고기를 먹으면 뱃속에 들어가기 전에 이에 끼어 버리고, 대낮에는 잠이 쏟아져 견딜 수 없다가도 저녁이 되어 잠자리에 누우면 잠들기가 어렵고, 울어야 할 때는 눈물이 말라 울 수가 없는데 크게 웃을 때 눈물이 나서 민망하기 그지없고, 원래 하얗고 고왔던 얼굴은 세월이 흐르면서 검게 변하고, 까맣게 아름다웠던 머리카락은 날이 갈수록 하얗게 세어가고, 삼십 년 전 일은 또렷이 기억나는데 사흘 전 일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노인이 겪는 피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인생의 노화를 겪으면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변화 가운데 몇 가지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인생의 슬픔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평생 신앙을 붙잡고 살아온 이들에게 늙어간다는 것이 마냥 슬프지만은 않습니다. 잠언은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잠 16:31)고 선언합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젊은 시절에는 알 수 없었던 영화와 기쁨, 놀라운 은혜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는 과정에서 지혜가 되고 빛이 되어 삶 속에 녹아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삶이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력이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130세 된 노인 야곱의 삶이 그의 가족과 자손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기쁨이 되고 은혜가 됩니다. 야곱은 이집트(Egypt)에서 돌아온 자녀들을 보고 크게 기뻐했습니다. 베냐민이 무사히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자녀들이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살아 있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믿을 수 없는 소식이었지만, 밖에 나가 보니 요셉이 보낸 선물이 가득 쌓여 있었습니다. 생전 보지도 듣지도 못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집트의 왕 바로(Pharaoh)가 아버지를 모시고 오라며 보낸 수레가 눈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 모든 것을 보아도 이집트의 각종 특산물도 필요 없고, 오직 내 아들이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족하다고 야곱은 고백했습니다.
이제 자녀들이 말합니다. "아버지, 요셉이 아버님을 모시고 오랍니다. 흉년이 아직 오 년이나 남았는데 아버님을 건강하고 안전하게 모시겠다고 가족 모두를 초대했습니다. 짐을 싸서 내려갑시다." 야곱은 그 말에 기뻤습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요셉을 볼 수 있다는 기쁨이 그의 마음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래서 짐을 싸고 채비를 갖추어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브엘세바에 이르러 돌연 행렬을 멈춥니다. 희생제사를 드리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니 그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창 46:1-2)
헤브론에서 남서쪽으로 약 40km를 가면 브엘세바가 나옵니다. 야곱은 그곳에 이르자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희생제사를 드렸습니다. 이 희생제사는 한두 시간에 끝나는 예배가 아닙니다. 양을 잡고, 소를 잡고, 염소를 잡아야 합니다. 며칠이 걸립니다. 피를 흘리고, 각을 뜨고, 제단을 만들어 태우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야곱은 장막에 들어가 하나님과 홀로 대면합니다. 그 기도가 언제 끝날지 아무도 알 수 없었습니다.
멈추어 선 자의 성숙
상식적으로 보면, 길을 떠나기 전 헤브론에서 예배를 드리고 출발하는 것이 마땅했습니다. 그곳에는 제단도 있고 예배에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혹은 출발할 때 예배를 드리지 못했다면, 도착해서 이집트에서 감사 예배를 드려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것도 저것도 아닌, 길 가던 중에 갑자기 행렬을 세우고 희생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 이유가 있었습니다. 브엘세바는 가나안 땅 가장 남쪽에 위치한 곳입니다. 이 경계를 넘어가면 이집트로 향하는 길이 됩니다. 떠날 때는 기쁜 나머지, 자식을 본다는 설렘에 겨워 길을 나섰는데, 40km쯤 오다가 문득 생각이 든 것입니다. 이 땅이 약속의 땅, 가나안입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받은 약속의 땅이며, 아버지 이삭은 평생 이 땅을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야곱 자신도 밧단아람에 갔다가 다시 돌아와 130세까지 이곳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땅을 떠나고 있습니다. 불현듯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아무리 자식을 보고 싶다 해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이 땅을 떠나 이집트로 가도 되는가. 이런 생각이 드니까 그 경계에서 발걸음을 멈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깨닫습니다. 130세가 된 야곱의 모습입니다. 이제야 그가 성숙해졌습니다. 그의 성숙은 두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첫째, 간절히 원하는 것을 앞두고 그것을 움켜쥐려 달려들지 않고 기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자기 평생에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일생 동안 야곱은 그런 적이 없었습니다. 젊어서 장자권을 갖고 싶었습니다. 태어나 보니 형이 장자였고, 승자독식의 원리에 따라 형이 모든 것을 가져갑니다. 억울했고 가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부르짖거나 기도하지는 않았습니다. 가지고 싶으니 온갖 인간적인 방법과 수단을 동원합니다. 형의 허술함을 노려 팥죽을 준비하고, 형에게 먹여 장자권을 손에 넣었습니다. 그런데 장자권을 확정하려면 아버지의 축복 기도를 받아야 했습니다. 어머니와 공모하여 형의 옷을 입고, 시력이 약해진 아버지를 속여 머리를 드리밀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이 있으면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면서도, 단 한 번도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결혼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인생에서 결혼보다 중요한 것이 있겠습니까.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갔더니 아리따운 라헬이 있었습니다. 외삼촌과 임금 협상을 하다가 돌연 선언합니다. "한 푼 주지 않아도 됩니다. 이 여인을 위해 칠 년 동안 일하겠습니다. 칠 년을 일하면 이 여인을 아내로 주십시오." 그토록 라헬과 결혼하고 싶었지만, 인생에서 그처럼 중대한 결혼 문제를 앞두고도 하나님께 단 한 번 기도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인생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기 무덤을 자기 손으로 판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때부터 고난의 행로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과거에 장자권을 손에 넣고 싶었던 것보다, 젊을 때 라헬과 결혼하고 싶었던 열망보다, 이 순간의 열망이 훨씬 강하지 않겠습니까. 언제 죽을지 모르는 130세의 노인이, 수십 년 전 길을 떠나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들 요셉을 보러 가는 길입니다. 요셉을 만나 한번 끌어안고, 눈물로 회포를 풀고 싶은데, 그 자리에서 멈추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을 때 어떻게 합니까. 내 손에 꼭 쥐고 싶은 소원이 있을 때 어떻게 합니까. 그것을 위해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여전히 달려들고 있다면, 아직 성숙하지 못한 것입니다. 믿음의 백성은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이 있어도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 여쭤보아야 합니다. 욕심에 사로잡혀 덮어놓고 달려들다가는 사탄이 그 길을 타고 들어올 수 있습니다. 욕망에 겨워 분별력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장자권을 가지고 싶고 그 여인과 결혼하고 싶다면, 방법 또한 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이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은 기도해야 합니다. 야곱은 나이 130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 성숙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우리 믿음의 백성 한 분 한 분 모두가 야곱처럼 성숙한 신앙인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 야곱이 성숙했다는 증거는 멈춘 것입니다. 칠십여 명이 넘는 식구가 한꺼번에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출발할 때 예배를 드리지 않고 그냥 떠났습니다. 한참 가고 있는데 갑자기 멈추었습니다. "우리 여기서 예배를 드려야 하겠다. 양을 잡자, 소를 잡자, 염소를 잡자."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거기서 지체하는 것을 누가 반기겠습니까. 자녀들은 이미 이집트의 영광을 보고 왔습니다. 동생 요셉이 이집트 총리가 되어 있는 것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바로가 선언했습니다. "이집트의 모든 좋은 것이 너희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행렬을 세우고 장막에 들어가 기도하고 있습니다.
뒤에서 수군거렸을 것입니다. 소리를 높였을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이 가지 말라고 하시면 안 가실 겁니까? 오 년의 흉년이 남아 있는데 그 기간을 어떻게 버티실 겁니까?" 원망이 자자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아랑곳하지 않고 멈추었습니다. 이것이 용기입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멈출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일단 시작했으니 계속 갑니다. 그런데 계속 가다 보면 잘못될 것이 뻔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지도 않았고, 문제는 계속 커집니다. 그러나 체면 때문에, 주변의 원망이 두려워, 사람들의 시선이 무서워 멈추지 못하고 계속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성숙하지 못한 태도입니다. 그 자리에서 멈추고 자신의 인생을 다시 관조하며 돌아보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럴 때일수록 그래야 더 큰 화를 막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멈추는 것이 복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창 2:3)
하나님께서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셨습니다. '복되게 하다'는 히브리어 '바라크'(בָּרַךְ)인데, '무릎을 꿇다'라는 뜻입니다. 달리면서 무릎을 꿇을 수 있겠습니까. 무릎을 꿇으려면 달리던 발걸음을 멈추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무릎을 꿇을 수 있습니다. 안식일은 바로 그런 날입니다. 엿새 동안 자신을 위하여 힘껏 달리고 열심히 뛰었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에 멈춥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무릎을 꿇고 무엇을 하라는 것이겠습니까.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지난 엿새간의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했는지, 올바른 방향이었는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에 합당한 삶이었는지를 살피고 돌아보는 날이 안식일입니다. 그러므로 어쩌면 안식일은 지난 엿새보다 훨씬 중요한 날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일을 그저 육신을 쉬는 날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안식일을 오해한 것입니다. 먹고 쉬며 엿새간의 노동을 보상받는 날이 주일이 아닙니다. 주일은 하나님 앞에 멈추고 내 삶을 돌아보는 날입니다. 지금 이 발걸음이 이대로 가도 되는 것인지, 일주일간 살아온 이 삶으로 계속 살아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인지, 멈추고 나를 살피고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복되게 하신 것입니다. 멈추고 무릎을 꿇는 자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십니다.
사도 바울이 사울이었던 시절, 다메섹(Damascus)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 후 아라비아(Arabia) 사막으로 갔고, 고향 다소(Tarsus)로 돌아갔습니다. 그곳에서 바나바가 그를 데려다가 안디옥(Antioch) 교회 성경 교사로 함께 사역하게 됩니다. 바울이 아라비아 사막에서, 고향 다소에서 놀고 있었겠습니까. 자신의 삶을 돌이키고, 무릎을 꿇고, 멈추어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왜 그렇게 살았는지 자신의 인생을 살피고 관조하는 기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깨닫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새로운 바울로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멈추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고 믿음이 필요합니다.
다윗이 사무엘하 7장에서 성전 건축을 결단합니다. 좋은 일이고 기쁜 일이었습니다. 나단 선지자에게 말했고, 나단도 기뻐하며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멈추라고 하셨습니다. 다윗은 그 말씀을 듣고 그대로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대하신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때까지 다윗의 일생은 전쟁터에서 열심히 뛰어다니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앉아서 독대한 시간보다 전쟁터에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적진을 뚫고 다닌 시간이 훨씬 많았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쉬지 않고 여전히 먼지를 뒤집어쓰며 성전을 건축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지금 다윗에게 필요한 것은 무릎을 꿇고 하나님과 독대하는 것이라고, 멈추라고 하신 것입니다. 명색이 왕인데, 왕이 입으로 한번 뱉은 말인데, 체면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멈추었습니다. 이것이 성숙입니다. 걸어가는 발걸음 가운데 때로는 체면도 있고, 때로는 멈추면 손해를 볼 것 같은 의식이 있더라도, 하나님이 멈추라 하시면 멈추는 것이 복입니다.
함께하시는 곳이 거룩한 땅
야곱의 이러한 성숙한 모습에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창 46:3-4)
이 세 가지 약속 가운데, 야곱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그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한 약속은 몇 번째였겠습니까. 인간적으로 보면 세 번째, 요셉이 눈을 감겨 준다는 약속일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의 고민을 한순간에 녹이고 풀어 버린 약속은 두 번째 것이었습니다. "내가 애굽으로 함께 내려가겠다"는 이 약속을 듣는 순간, 야곱은 자신이 품고 있던 고민이 단번에 해소되었습니다.
어떤 고민이었습니까. 가나안 땅에 대한 고민이었습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을 거쳐 가나안 땅에 왔습니다. 그런데 기근이 들었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이집트로 내려갔고, 하나님이 징계하셨습니다. 아내를 빼앗길 뻔했으며, 우여곡절 끝에 겨우 찾아 돌아왔지만, 함께 갔던 조카 롯의 믿음을 잃어버렸습니다. 롯이 소돔 땅으로 떠나 버렸고, 그 가정이 파탄 났습니다. 야곱은 이러한 역사를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이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기근이 들자 이집트로 내려가려 했으나 하나님이 막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창 26:2-3)
아버지 이삭에게도 하나님이 내려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에게 이 가나안 땅을 떠나는 것이 죄스럽고 고민이 되었습니다. 가도 되는 것인가. 그런데 하나님이 명쾌한 답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이집트로 같이 내려가겠다." 그때 야곱은 깨달았습니다. 가나안 땅이라는 이 땅 자체가 거룩한 것이 아니구나. 이집트라는 땅 자체가 더럽고 추악한 땅이 아니구나.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그곳이 바로 가나안 땅이로다. 이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비로소 야곱의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원래부터 가나안이 따로 있고 이집트가 따로 있고, 원래부터 거룩한 땅이 따로 있고 악한 땅이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모든 곳이 거룩하고 아름다운 땅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장소를 지나치게 신성시합니다. 어떤 물건을 지나치게 신성하게 대합니다. 신앙인들이 주로 신성하게 여기는 장소는 성전, 교회입니다. 그러나 교회 자체가 신성한 곳이 아닙니다. 성전 자체가 어떻게 신성하겠습니까. 성전이 그토록 거룩하고, 성전 자체를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지키시는 곳이라면, 예루살렘의 모든 것이 불타도 그곳만은 안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깨끗하게 보존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않고 무너지게 하셨습니다. 그 안에서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거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영적 수준이 엉망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을 내버려 두신 것입니다. 공간 자체는 결단코 거룩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39장을 기억합니다. 요셉이 가장 깊은 수렁에 빠져 있을 때였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종으로 살았고,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더라"는 말씀이 창세기 39장에 세 번이나 나옵니다. 이집트, 그것도 보디발의 집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하셨습니다. 그러니 그곳이 거룩한 곳이 된 것입니다. 요셉에게는 그곳이 예배당이요 성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셨으니, 요셉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성소가 되었습니다. 감옥에도 교회가 없고 예배드릴 공간이 없었지만,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셨기에 그곳이 성소가 된 것입니다. 이집트가 원래부터 더럽고 악하고 하나님이 버리신 땅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그 땅이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이 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이 떠나가면 건물은 건물일 뿐입니다.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불량한 자들이었고, 예배를 멸시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과 전쟁할 때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지고 나갔습니다. 전쟁에 졌습니다. 언약궤를 빼앗기고 홉니와 비느하스는 전사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아버지 엘리는 의자에서 넘어져 죽었으며, 마침 산기가 있던 며느리는 "이가봇, 여호와의 영광이 떠났다"고 말하며 세상을 떠났습니다. 언약궤는 하나의 궤짝에 불과합니다. 그 속에 십계명의 두 돌판이 있고, 만나를 담은 항아리가 있고,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있다 해도, 언약궤를 가지고 나간 사람들이 거룩하지 않다면, 하나님의 예배를 멸시하고 무시하는 자들이라면, 언약궤 자체가 거룩할 수 없습니다.
결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의 거룩함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전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자가 되어야 우리가 가는 모든 곳이 성소가 됩니다. 예배당 안에서는 경건한 모습이면서 가정에서는 엉망이고, 일터에서는 믿음의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성전만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분별 없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믿음의 사람은 내가 거룩해지면 우리가 가는 모든 곳에 하나님이 함께하실 줄 믿습니다.
130세 야곱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 두 가지 도전을 던집니다. 하나는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을 때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것이 아니라, 멈추어 서서 하나님의 뜻을 여쭙는 성숙함입니다. 다른 하나는 가나안이든 이집트든, 예배당이든 일터든,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곳이 거룩한 땅이라는 깨달음입니다. 부디 우리의 일생이 세상과 교회를 구분 짓는 분리된 삶이 아니라, 어디서든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룩하고 복된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인생 말년 13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성숙한 모습을 보인 야곱을 보았습니다. 간절히 가지고 싶은 것이 있는데, 지금까지는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으나, 이제는 멈추어 서서 기도하는 야곱을 보았습니다. 주여, 우리도 욕망을 걷어내고 잠시 멈추어 기도하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멈출 수 있는 용기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가나안과 이집트가 원래부터 거룩하고 원래부터 악한 땅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곳이 거룩한 땅임을 믿습니다. 주여, 우리의 삶이 분리된 삶이 아니라, 예배당에서의 삶과 직장과 일터와 가정에서의 삶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거룩한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