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강 / 고센 땅에 살게 하소서 (46:28-47:6)

고센 땅에 살게 하소서

본문: 창세기 46:28-47:6

야곱의 가족이 애굽(이집트)으로 이주하는 이야기를 살피기 전에, 먼저 고대 로마(Roma)의 정치 제도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가 위대한 나라로 성장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 가운데 핵심적인 요소는 그들의 정치 제도에 있었습니다. 로마는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Augustus)가 황제로 즉위하기까지 공화정의 나라였습니다. 공화정이란 문자 그대로 '모두가 화합하는 정치 제도'를 의미합니다. 이상은 아름다웠지만, 실제로 모두가 화합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겠습니까?

로마의 수많은 정치인 가운데 최고 자리에는 집정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집정관은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어떤 법안이 통과되려면 두 집정관 모두의 동의가 필요했으며, 그 임기는 고작 1년에 불과했습니다. 여기에 호민관 제도도 운영되었습니다. 호민관은 귀족들의 횡포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하는 관리였습니다. 원로원 제도도 있었습니다. 원로원은 퇴역한 정치인들의 자문 기구였지만, 실제로는 생각보다 훨씬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습니다. 집정관 두 사람이 서로 담합하여 부당한 제도를 통과시키려 한다면 원로원에서 제동을 걸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국가가 균형 있게 운영되도록 했습니다.

이런 구조 아래서 하나의 법안이 통과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겠습니까? 한쪽에서 반대하면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모두가 동의하는 제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대화가 필요했고, 타협도 필요했습니다. 자기 욕심을 내려놓아야 했고, 고도의 정치적 기술과 협상 능력이 요구되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정치인들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고자세를 취하는 사람은 시민의 지지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자기 주장을 내세우지 않고 기꺼이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로마에서 가장 존경받는 정치인이었습니다. 로마는 이러한 공화정의 바탕 위에서 근 500년 동안 단련되고, 성장하고, 발전해왔습니다.

그런데 로마가 몰락의 길을 걸어간 데에는 역설적이게도 포에니(Punic) 전쟁이 있었습니다. 로마는 카르타고(Carthago)와의 세 차례 전쟁에서 모두 승리합니다. 지중해의 해상 무역을 독점하면서 로마로 막대한 부가 유입되기 시작했습니다. 로마 시민들이 돈맛을 알아버린 것입니다. 땅을 정복하면 돈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공화정이라는 정치 제도는 더 이상 합당하지 않았습니다. 전쟁을 신속하게 수행해야 하는데 언제 서로 타협하고 토론하겠습니까? 한 사람이 반대하면 멈춰야 하는 구조로는 전쟁을 치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공화정을 버리고 왕정을 택합니다. 강력한 권력을 가진 황제에게 힘을 몰아주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치명적인 패착이었습니다. 네로(Nero), 코모두스(Commodus) 같은 폭군이 연이어 등장했지만, 그들을 통제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 길로 로마는 멸망하게 됩니다.

어떤 국가든, 공동체든, 개인이든 자신이 가진 힘과 권력을 오랫동안 유지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더 큰 힘이 아닙니다. 그것은 관용이며, 겸손입니다. 겸손을 지닐 때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고, 공동체를 유지하며 이어갈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바로 요셉의 겸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요셉이 보여준 겸손의 의미를 살피고, 우리도 겸손한 자가 되기를 결단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쟁취하는 자의 자리

야곱은 요셉의 초청을 받아 가족 70여 명과 함께 길을 떠납니다. 가나안 땅 가장 남쪽인 브엘세바에 이르러 발걸음을 멈춥니다. 이곳을 벗어나면 약속의 땅을 떠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멈추어 서서 하나님 앞에 희생제사를 드립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안심하고 내려가라,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고 하십니다. 야곱은 이 말씀 앞에서 깨닫습니다. 가나안 자체가 선하고 애굽이 악한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그곳이 바로 선한 곳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결단하고 가족들과 함께 먼 길을 떠납니다.

드디어 요셉이 있는 곳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야곱은 가족 중 대표를 요셉에게 먼저 보냅니다.

"야곱이 유다를 요셉에게 미리 보내어 자기를 고센으로 인도하게 하고 다 고센 땅에 이르니" (창 46:28)

이 말씀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 이 가족의 대표가 유다라는 점입니다. 원래 이 가족의 장자는 르우벤이었습니다. 둘째는 시므온이고, 셋째는 레위입니다. 그런데 넷째 아들 유다가 가정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유다가 대표가 되었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를 지닙니다. 장남 르우벤은 아버지의 침상을 범하는 대죄를 저질렀고, 둘째 시므온과 셋째 레위는 세겜 땅에서 피비린내 나는 살육을 벌였습니다. 그 사이에 유다가 아버지의 고민이었던 베냐민 문제를 해결합니다. "내가 책임지겠습니다"라고 나선 것입니다. 요셉 앞에서 위기가 닥쳤을 때에도 유다는 "나를 대신 잡아두고 베냐민은 보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담보 신앙을 결단했고, 그 결단을 삶으로 실천했습니다.

야곱은 이 일을 깊이 감사하게 여겼습니다. 이 일로 인해 요셉과의 만남이 이루어졌고, 이제부터 가정의 모든 대표 권한은 유다에게 맡겨지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중요한 진리 하나를 깨닫게 됩니다. 원래부터 타고난 자리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가인과 아벨 가운데 가인이 장남이었고, 에서와 야곱 가운데 에서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으며, 열두 아들 가운데 르우벤이 타고난 장남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택은 아벨이었고, 야곱이었고, 유다였습니다.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는 말씀처럼, 결단과 의지를 가지고 희생하는 자가 얻는 자리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자리입니다.

야곱의 아들 모두에게 공평하게 기회가 열려 있었습니다. 베냐민 문제가 불거졌을 때, 그 문제는 누구나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희생을 작정하기만 한다면, "내가 헌신하겠습니다, 내가 대신 잡혀가겠습니다, 내가 희생하겠습니다"라고 결단만 하면 누구든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장남 르우벤을 비롯한 모든 형제가 가만히 있을 때, 유다만이 나섰습니다. 그 자리를 책임지겠다고 나서고 희생을 결단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가족의 대표가 되는 권한을 부여하셨습니다. 유다의 후손 가운데 왕이 나오고, 그 후손 가운데 왕 중의 왕이신 그리스도가 나셨습니다. 이 놀라운 축복은 유다가 쟁취한 것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은 본래 왕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이 40일 동안 아침저녁으로 이스라엘 진영 앞에 나타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저주하고 이스라엘 군대를 조롱했습니다. 사울왕을 비롯하여 그 누구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기회가 공평하게 열려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떨쳐 일어나 나섰다면 그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받았을 것입니다. 다윗의 형들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엘리압도, 다른 형들도 모두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오직 다윗 한 사람만이 나섰고, 하나님은 그런 다윗을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그의 생명을 보존하시고, 더 나아가 그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셨습니다.

우리 앞에도 기회가 열려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열려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기회를 잡는 사람이 그 자리에 서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원래부터 타고난 자리는 없습니다. 원래부터 보장된 자리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가 나서서 희생하겠다고 결단하는 사람, 그 사람에게 하나님은 그 자리를 선물로 주십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다양한 유형의 성도를 만나게 됩니다. 누군가 나를 알아주기를, 누군가 나를 그 자리에 세워주기를, 누군가 나를 권해서 등 떠밀어주기를 기다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내가 나서야 합니다. 내가 스스로 희생해야 합니다. 내 눈에 일이 보이면, 내 눈에 희생해야 할 자리가 보인다면, 내가 나서면 그 자리가 내 자리가 됩니다. 누가 나를 세워주고 떠받들어 주어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욕심이 있다면, 유다처럼 비록 레아가 낳은 넷째 아들이지만 이 가정의 대표가 되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의 명문 가문을 이루겠다는 열망이 있다면, 내가 찾아서 그 일을 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 자리가 내 자리가 됩니다. 우리 모든 주의 백성이 적극적인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헌신과 희생의 자리에 서기를 바랍니다.

수십 년 만의 상봉, 눈물의 포옹

이제 야곱과 요셉이 수십 년 만에 만납니다.

"요셉이 그의 수레를 갖추고 고센으로 올라가서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을 맞으며 그에게 보이고 그의 목을 어긋맞춰 안고 얼마 동안 울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 (창 46:29-30)

야곱에게 이런 날이 올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20여 년 전에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들을 지금 눈앞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 장면을 짧게 기록하고 있지만, 이 부자(父子)가 얼마나 오랫동안 껴안고 울었겠습니까? 요셉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일곱 살 소년으로 애굽에 팔려 와서, 고된 세월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기에 이 놀라운 영광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살아 있을 때 아버지를 만나게 되고, 연로하신 아버지를 모시고 함께 손을 잡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이고 기쁨이었겠습니까?

겸손이 열어준 고센의 문

이 아름다운 상봉을 뒤로하고, 요셉은 형제들에게 중요한 말을 남깁니다.

"바로가 당신들을 불러서 너희의 직업이 무엇이냐 묻거든 당신들은 이르기를 주의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들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살게 되리이다" (창 46:33-34)

바로왕 앞에 인사하러 가야 하는 상황에서, 요셉은 형제들이 바로에게 해야 할 말을 미리 알려줍니다. 직업이 무엇이냐고 왕이 물을 때, "우리는 목축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서도 목축을 하기 위해 왔습니다"라고 대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당시의 상황 때문입니다.

요셉은 자신과 가족을 둘러싼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바로의 입장에서 요셉은 큰 은인이었습니다. 바로가 꿈을 꾸었을 때 그 꿈을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요셉 한 사람이 해석해 주었습니다. 심각한 국가적 위기가 닥칠 것이라고 예고했고, 그 위기를 극복할 대안까지 제시했습니다. 바로는 그의 말을 듣고 파격적으로 경제 담당 총리에 임명했습니다. 이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왕실에는 바로와 요셉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정통 관료가 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곳에서 훈련받고 성장한 사람들이 대단히 많았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요셉은 바로가 일방적으로 올려세운 인물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인정하면서도 속으로는 불편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저 자리가 내 자리인데, 저 자리가 내가 가야 할 곳인데' 하는 생각을 품은 사람이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언젠가는 끌어내리겠다고 벼르는 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일을 너무 잘했습니다. 그의 말대로 7년 동안 풍년이 이어졌고, 이어서 흉년이 닥쳤을 때에도 곡물 관리를 탁월하게 수행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미끄러지기만 하면 공격하려던 자들이 입을 열 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요셉의 가족 70여 명이 이민을 왔습니다. 지금은 풍년의 시기가 아니라 흉년의 시기였습니다. 흉년 동안 백성들은 비축된 곡식을 돈을 내고 사 먹어야 했습니다. 총리의 가족이 이곳에 이민을 온 상황에서, 이 70명이 곡식을 무상으로 받는 것인지, 어디에서 살 것인지,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지가 초미의 관심사였을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비판적인 언론이 있었다면 매일 추궁했을 것입니다.

요셉은 이러한 상황을 누구보다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하라고 한 것입니다. 이 말에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이곳에서 다른 직업을 얻을 생각이 없습니다"라는 선언입니다. 조상 대대로 양과 소와 염소를 치던 사람들이니, 애굽에 와서도 목축업을 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천하게 여기는 그 일을 자신들이 맡아서 하겠다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결혼을 통한 신분 상승을 도모하지 않겠습니다"라는 약속이었습니다. 천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이 결혼하려 하겠습니까? 고센 땅에서 그들끼리 모여 살겠다는 것은 곧 애굽 사회의 기득권에 일절 손대지 않겠다는 의미였습니다. 왕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순간, 옆에 있던 관료들은 안심했을 것입니다. 경계심이 풀어졌을 것입니다.

요셉이 보여주는 이 태도에서 우리는 겸손의 본질을 깨닫게 됩니다. 많은 사람은 겸손을 단순히 자기를 낮추는 것이라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때로 자기를 지나치게 낮추는 것은 비굴함이 될 수 있으며, 그것은 겸손의 참된 의미가 아닙니다. 요셉이 보여주는 겸손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 번째는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바로의 권위를 훼손하지 않았고, 애굽 사람들의 기득권을 그대로 인정했습니다. 그들이 가진 힘과 권력과 현장 경험을 있는 그대로 존중한 것입니다. 이것이 정직한 태도입니다. 빌립보서 2장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빌 2:3)

나보다 나은 사람을 나은 사람으로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보다 실력이 있고, 나보다 권세가 있고, 나보다 권력이 있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겸손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는 못된 본성이 있습니다. 끌어내리려 하고, 어떻게든 흠집을 내려 합니다. 상대가 가지고 있는 권위와 능력을 인정하지 않으면 어떻게 공동체의 질서가 세워지겠습니까? 요셉은 비록 애굽의 총리이자 바로에게 큰 은혜를 베푼 사람이었지만, 바로 앞에서 겸손하게 처신했습니다. 현재의 권력 구조를 그대로 인정하고, 주변 관료들이 느낄 법한 박탈감을 세심하게 헤아렸습니다. 이것이 겸손의 시작입니다.

두 번째는 자신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요셉은 애굽에서 오랫동안 살았기에, 애굽 사람들이 목축을 천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 집안이 대대로 목축업을 해온 것이 애굽의 기준에서는 부끄러운 일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것을 그대로 인정합니다. "우리 할아버지 때부터, 우리 조상 대대로 우리는 목축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형제들이 이곳에 와서도 어떤 권력도 탐하지 않겠습니다. 여기서도 목축을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천하게 보면 어떻겠습니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목축인데, 남들이 이상하게 여기면 어떻겠습니까?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 이것이 겸손입니다. 나의 상황과 처지와 내가 가진 것을,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이 겸손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을 지나치게 포장하려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지나치게 비하하려 합니다. 둘 다 겸손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고후 10:13)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범위 안에서, 그 한계 안에서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 가족의 직업이 목축업이라면 그것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 최고의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 해서 형제 가운데 누구라도 말단 관직에 취직시키려 하지 않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바라시는 겸손입니다. 이 겸손의 삶이, 이 겸손의 모습이 오늘 우리의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겸손한 자가 되면 하나님께서 때가 되어 높여 주십니다. 바로가 이들에게 큰 선물을 내립니다.

"애굽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땅의 좋은 곳에 네 아버지와 네 형들이 거주하게 하되 그들이 고센 땅에 거주하고 그들 중에 능력 있는 자가 있거든 그들로 내 가축을 관리하게 하라" (창 47:6)

바로의 가축을 관리하게 되었습니다. 임금의 가축은 곧 나라의 재산입니다. 나라의 모든 재물을 이들이 관리하는 직분을 얻게 된 것입니다. 국가의 공식적인 직분을 부여받았기에 주변의 악한 사람들이 이들을 해할 수 없었습니다. 신분이 보장되었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인정하고 보여주었을 때, 바로는 이들에게 합당한 보상을 내렸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시는 방식이 바로 이러합니다.

요셉은 지혜로웠고, 솔직했으며, 겸손했습니다. 그래서 이 가족 70여 명이 애굽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아무 문제 없이 살게 되었습니다. 유다의 헌신은 우리에게 나서서 희생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자리를 주신다는 진리를 가르쳐주고, 요셉의 겸손은 상대를 인정하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참된 겸손임을 보여줍니다. 이 겸손 위에 하나님의 높이심이 임합니다. 오늘 이 요셉의 지혜를 배우고 겸손을 닮아가기를 바랍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유다처럼 희생하는 자리에 서기를 원합니다.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기회가 열려 있었으나, 그 기회를 붙잡은 것은 유다 한 사람이었습니다. 주여, 우리에게도 기회를 주실 때 기회를 붙잡는 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흘려보내고 한탄하지 않게 하옵시고, 스스로 나서서 그 자리에 서서 그 자리를 내 것으로 만들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도 요셉처럼 지혜롭고 겸손한 인생을 살기를 원합니다.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게 하옵시고, 그가 가진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겸손한 자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우리의 약한 모습은 약한 모습대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가지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이시는 그때를 기대하고 소망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