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강 /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다 (47:7-8)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다

본문: 창세기 47:7-8

고대 사회의 민간에는 남을 저주하는 주술 문화가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중국에서도 그러했고, 중국의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중국을 거쳐 조선 사회에 유행했던 민간 저주 주술 가운데 '고독(蠱毒)'이라는 주술이 있었습니다. 벌레 고(蠱)에 독 독(毒)을 쓰는 고독입니다. 그 주술 방법은 이렇습니다. 거대한 항아리를 하나 준비한 뒤, 그 안에 각종 독을 가진 벌레들을 최대한 모아 집어넣습니다. 거기에 파충류 몇 마리도 함께 넣은 다음, 뚜껑을 꼭 닫아 며칠을 둡니다. 그리고 나서 뚜껑을 열면 어떤 일이 벌어져 있겠습니까. 모두 죽어 있거나 한 마리만 살아남습니다. 모두 죽어버리면 주술이 실패한 것이고, 한 마리가 살아남으면 그것을 꺼내어 불에 태워 가루를 만듭니다. 그 가루를 저주하고 싶은 사람의 음식에 타서 먹이는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실제로 그 가루를 먹고 사람이 죽느냐 죽지 않느냐의 여부를 떠나서, 이것은 그 자체로 소름 끼치는 악행입니다. 그래서 조선 사회에서는 고독의 주술을 사용하다가 발각되면 엄벌에 처했습니다. 사면도 해주지 않을 만큼 중죄로 다스렸습니다.

사람이 이처럼 악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이 이토록 악하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사람은 본성적으로 누군가가 잘되는 것을 눈뜨고 보지 못합니다. 누군가 성장하고 형통하면 축복하고 진심으로 축하해 주어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웬만하면 깎아내리려 하고, 흠집을 잡으려 합니다. 심지어는 자신이 가진 모든 살기를 동원해서 그 사람을 해하려고까지 합니다. 이것이 주술에 드러난 인간의 악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입고 주님의 보혈로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은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믿음의 백성이 가진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상대방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잘되기를 빌어주고 복을 빌며 축복하는 것, 이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의 말씀에는 야곱이 바로를 축복한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 본문을 통해 인생의 연약함과 악함을 돌아보고, 우리도 누군가를 위해 축복하며 복을 비는 사람이 되는 은혜를 결단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30년 만에 터진 축복의 입술

흉년이 2년째 지나고 아직 5년이나 남아 있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와 가족들을 이집트로 데려왔습니다. 요셉은 대단히 지혜로운 인물이었습니다. 흉년의 시기에 가족 70여 명이 이집트에 와서 산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미리 헤아렸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에게 바로 앞에서 할 말을 미리 일러주었습니다. 형제들은 바로에게 분명히 말했습니다. "우리는 목축업자로서 이곳에 온 것이지, 이집트 사람들의 직업이나 관직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결혼을 통한 신분 상승도 바라지 않습니다." 바로는 이에 대한 응답으로 자신의 가축을 치게 하여 야곱의 가족들을 공식적으로 보호해 주었습니다.

형제들이 바로를 만나는 장면이 끝나고, 이제 가족의 대표인 야곱이 바로에게 인사하러 나갑니다. 요셉이 자기 아버지를 모시고 바로 앞에 섰습니다.

"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 (창 47:7)

이 장면을 상상해 보면, 요셉이 당황했을 법합니다. 요셉은 지혜롭고 치밀한 인물이었습니다. 형제들에게 바로 앞에서 할 말을 미리 알려줄 정도로 세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갑자기 바로에게 축복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형태로 축복했을까요. 성경에 나타나는 축복의 형태는 다양합니다. 족장인 아버지가 자녀를 축복할 때는 자녀를 앞에 앉히고 머리에 손을 얹어 안수기도를 해줍니다. 또는 믿는 사람들끼리 한자리에 모여 식탁의 교제를 나누면서 눈을 감고 하나님을 향해 기도한 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을 빌어 줍니다. 그러나 야곱이 바로에게 그런 형태의 축복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현실적으로 바로를 무릎 꿇릴 수도 없고, 머리에 손을 얹을 수도 없으며,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모두 눈을 감으라고 한 뒤 축복기도를 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복을 빌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야곱이 누군가에게 축복했다는 사실 그 자체입니다. 야곱의 이력을 살펴보면 그 의미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야곱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남에게 복을 빈 적이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야곱의 이야기가 창세기에서 대단히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는 남의 복을 가로챈 사람이었고 복을 갈망했던 사람이었을 뿐, 자기 입으로 누구도 축복하지 않았던 인물입니다.

야곱은 형 에서의 복을 가로챘습니다.

"야곱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내가 하였사오니 원하건대 일어나 앉아서 내가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아버지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창 27:19)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복을 받기 위해 에서의 옷을 입고, 눈이 어두운 아버지 앞에 가서 "제가 아버지의 맏아들입니다"라고 속였습니다. 사냥한 고기를 마음껏 잡수시고 축복해 달라고 거짓말한 것입니다. 남의 복을 가로챈 인물, 복을 지나치게 갈망한 나머지 형의 장자권까지 빼앗은 인물이 야곱이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야곱은 하나님 앞에서도 복을 갈구했습니다. 얍복 강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창 32:26)

이 정도로 야곱은 복을 사모했습니다. 하나님을 붙잡고 놓지 않으며 축복해 달라고 매달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복을 사모하는 것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복 받기를 원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 그러나 남을 속였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다양한 형태로 다양한 사람들을 속이고 거짓말했습니다.

어쨌든 야곱은 그렇게 해서 복을 받고 그 복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문제는 복을 받아 평생 동안 움켜쥐고만 살았을 뿐, 한 번도 복을 베풀어 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130세가 될 때까지 성경을 보면 그가 두 차례에 걸쳐 남에게 복을 비는 장면이 나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이 그 첫 번째이고, 두 번째가 자식들을 침상 위에 모두 불러놓고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부르며 축복한 장면입니다. 결론적으로, 피붙이가 아닌 사람을 축복한 것은 바로에게 한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시냇가에 심긴 나무의 열매

믿음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시편 1편을 보면 복 있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시편 기자가 말하는 복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긴 나무와 같습니다. 여러 나무 가운데 시냇가에 심겼다는 것 자체가 은혜를 받은 것이요, 복을 받은 것입니다. 어떤 나무는 메마른 사막에 심겨져 있기도 하고, 어떤 나무는 황폐한 외딴곳에 심겨져 살아남기조차 힘겨운 처지에 놓여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는 뿌리가 깊이 내려가면서 물 근원과 닿게 됩니다. 그러면 땅 위가 아무리 말라도, 아무리 건조해도, 그 나무는 생존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백성들의 삶이 이와 같습니다. 세상이 힘겨워도, 어려운 인생이 지속되어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뿌리박은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복받은 사람들이요, 은혜가 풍성한 사람들입니다. 이 나무가 성장하고 자라서 열매를 맺게 됩니다. 뿌리가 튼튼하면 당연히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열매는 누구의 것입니까. 나무가 열매를 맺었다고 해서 그 나무가 열매를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냇가에 쉬러 온 사람들, 그 나무 곁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나무는 그늘을 제공하고 열매를 제공합니다. 내가 열매를 맺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열매를 나누어 주고, 복을 나누어 줄 때 비로소 믿는 사람의 삶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복을 받았고, 그 복을 나누며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야곱의 인생은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엉망이었습니다. 130세가 될 때까지 누구에게도 복을 나누어 주지 않았고 복을 빌어본 적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할아버지인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창 12:1-2)

"너는 복이 될지라." 여기서 말하는 복, '베라카'라는 말은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이 될지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가는 곳마다 선물이 되어라"라는 뜻입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아브라함이라는 인격 그 존재 자체가 만나는 사람에게 선물이 되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의 존재와 인격, 그의 말과 행위, 모든 것이 만나는 사람에게 선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을 만나는 사람은 행복했고, 아브라함을 만나는 사람은 즐거웠습니다. 선물을 받은 것처럼, 그는 선물로서의 가치와 존재 의미를 지키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은 어떠했습니까. 야곱의 인생을 돌아보면, 그를 만나는 사람에게 야곱은 선물이 아니라 재앙이었습니다. 피하고 싶은 존재, 부담스러운 존재였습니다. 형 에서의 입장에서 야곱은 자신을 속인 존재였습니다.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에게 아들 야곱은 평생 큰 근심을 안겨 준 존재였습니다. 네 명의 아내 중 레아에게 남편 야곱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사랑받고 싶고 존중받고 싶었지만, 한평생 사랑하지 않고 인정해 주지 않으며 따뜻한 말 한마디 해주지 않은 남편이었습니다. 레아에게 남편 야곱은 선물이 아니라 평생 마음에 대못을 박은, 마음의 큰 짐이요 부담이었습니다. 열 아들에게 아버지 야곱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편애하는 아버지 야곱 때문에 내 인생이 망가졌다고 느꼈을 그 아들들에게도 야곱은 선물이 아니었습니다.

부인에게도, 만나는 사람에게도,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도, 130세가 될 때까지 야곱의 존재는 선물은커녕 재앙덩어리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존재입니까. 우리는 믿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부르고 닮고 싶어 합니다. 입장을 바꿔 놓고 상대방의 관점에서 나라는 존재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는 내 가족에게,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인격체인가,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물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선물의 삶을 살아내야 할 것입니다. 복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어떠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공생애 3년의 짧은 삶을 사셨습니다. 복음서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그 자체로 큰 은혜요 선물이셨습니다. 남편 문제로 고민하던 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고 물동이를 버려둔 채 마을로 내려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인생이 바뀐 것입니다. 유대인의 관원이자 부자였던 니고데모는 아무 걱정 없이 살던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진리가 무엇인지 깊이 고민하며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고, 결국 그의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병 낫기를 구하며 주변 사람들을 원망하고 살았지만, 예수님을 만나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수많은 사람이 예수라는 선물을 받고 인생이 완전히 변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 사는 수많은 사람에게는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습니다. 죽음의 문제, 죄의 문제를 어떤 인간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선물을 받고 보니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죄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우리도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선물이 되어야 하고 복이 되어야 합니다.

그 복을 선포하라고, 그 복을 나누어 주라고, 예수님을 3년간 따라다닌 베드로가 이렇게 전합니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3:8-9)

복을 빌라고 합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창세기 12장 1-2절의 말씀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 된 것은 상대방에게 복을 나누어 주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너희가 복을 이어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내가 누군가에게 복을 빌고 내가 가진 복을 나누어 주면, 내 인생의 곡간에 하나님이 복을 가득 채워 주신다는 것입니다. 베풀지 않으면, 복을 선포하지 않으면, 나누어 주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채워 주실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복받은 자로 이 땅에 왔기에 복을 베풀고 선포하고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매 순간 우리 인생에 꼭 필요한 것들로 곡간을 가득 채워 주실 것입니다. 복을 빌라는 것은 곧 선포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천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말씀의 권능이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존재입니다. 우리에게도 말에 권세가 있습니다. 내가 복을 빌면, 내가 누군가를 향하여 복을 선포하면 그 복이 권세를 가지고 현실로 이루어집니다. 부디 주변 사람들, 나와 함께하는 이들을 위해 복을 빌어 주십시오. 기도할 때도 복의 기도를 해 주시고, 일상생활에서도 행복한 언어, 좋은 언어로 상대방을 축복해 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곡간도 가득 채우시고 말의 권세를 허락하셔서 그 복이 현실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파라오의 놀라움, 믿는 자의 신비

이제 바로는 색다른 경험을 했습니다. 평생 살면서 생전 처음 만나는 130세의 노인에게 축복을 받은 것이 아마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누가, 어떤 존재가 이집트의 절대 왕권을 가진 지존한 파라오에게 와서 축복을 해주었겠습니까. 이 축복을 받은 바로가 색다른 질문을 합니다.

"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 (창 47:8)

바로에게 궁금증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가면 있던 자신감도 사라지고, 자존감도 떨어지며, 과거에 잘하던 일도 불안해지고 자신감을 잃게 됩니다. 그런데 이 노인은 행색도 초라하고 가진 것도 없어 보이는데, 도대체 어찌하면 이토록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것인지 바로는 궁금했습니다. 자신이 이 나라의 절대 주권을 가진 파라오라는 것을 알기는 하는 것인지, 나에게 와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해 주다니, 이것은 대단히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바로는 이러한 경험을 야곱의 아들 요셉에게서도 한 적이 있었습니다. 9년 전 바로가 이상한 꿈을 두 번 꾸고 꿈 해석을 잘하는 사람을 찾았을 때, 감옥에서 갓 나온 청년이 바로 앞에 섰습니다. 행색은 별 볼 일이 없었지만, 그의 눈은 빛났고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바로가 "네가 꿈 해석을 잘해서 이 자리에 불렀다"고 하자, 요셉은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그 아들도 하나님을 말했고, 지금 만난 이 아버지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을 축복합니다. 바로는 궁금해졌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이 믿는 하나님은 누구인가, 나이가 이만큼 되었는데도 어찌하면 이토록 당당하고 자신감이 있는가.

바로가 "네 나이가 얼마냐"라고 묻는 이 질문에는 깊은 존재론적 고민이 담겨 있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에게 파라오는 이미지 메이킹이 잘되어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파라오를 태양신의 아들이라고 믿었습니다. 태양신의 아들은 죽어서는 안 됩니다. 영생불사해야 합니다. 파라오가 죽으면 거대한 피라미드를 만들고 미라로 만듭니다. 죽었으나 죽지 않고 신이 되었다고 선전합니다. 하지만 바로 자신은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 아버지도 죽었고, 가족도 모두 죽었고, 자신도 곧 죽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것이 딜레마였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죽지 않는 신처럼 행세하지만, 자신의 존재는 갈수록 자신감이 없어지고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관심이 대단히 많았습니다. 왕이 죽고 나면 무덤에 부장품으로 함께 묻어 주는 책이 있었는데, 바로 '사자의 서(死者의 書, Book of the Dead)'입니다. 이 책을 그림으로 나타낸 벽화에는 그들의 세계관이 담겨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죽으면 심장을 꺼내서 저울에 달아본다고 합니다. 심장이 저울 한쪽에 올라가고, 반대편에는 깃털이 놓여 있습니다. 평소에 죄를 많이 지으면 심장이 무거워져 깃털이 올라가고 심장이 내려갑니다. 그러면 짐승의 탈을 쓴 존재가 심장을 먹어버리고 그 사람을 지옥으로 끌고 갑니다. 반대로 평소에 선하게 살면 심장이 가벼워서 깃털이 내려가고, 그 사람은 천국으로 인도됩니다. 이것이 그들이 가지고 있던 세계관이었습니다.

삶과 죽음에 대한 관심이 이토록 많았다는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그만큼 컸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바로는 궁금해진 것입니다. 저 할아버지를 보니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데 저렇게 당당하니, 저 사람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는 것인가. 나는 모든 권력을 가지고 있는데도 죽음을 향해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데 말입니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궁금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저 사람은 가진 것도 별로 없고 잘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저렇게 행복할까. 저 사람은 어떻게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을까. 저 사람은 어떻게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저 사람은 죽음에 대한 공포 없이 어찌하면 저렇게 하나님을 자랑할 수 있을까." 이런 궁금함을 자아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믿는 사람은 나와 차별화되는 사람, 같은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하여 찬양할 수 있는 사람, 도대체 저 사람이 저렇게 살 수 있는 배후에 존재하는 분은 누구이신가 하는 궁금함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에게 그 궁금함이 일어났습니다. 아들 요셉을 먼저 경험하고 아버지 야곱을 경험하니,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훗날 이러한 삶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 6:9-10)

이런 사람이 바로 우리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볼 때 이것은 신비로운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유명한 사람 같고, 가난한 것 같은데 모든 것을 가진 부요한 사람 같으며, 분명히 근심하고 눈물 흘려야 할 상황인데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 같습니다. 도대체 배후에 누가 계신 것인가, 궁금하게 여기고 질문하게 됩니다. 질문하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내 배후에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고 나는 지금 죽어도 천국에서 눈뜰 것을 믿습니다." 그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결론

우리가 믿음의 백성이라면, 야곱처럼, 요셉처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궁금함을 자아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야곱은 130년의 세월 동안 복을 받기만 하고 움켜쥐기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바로 앞에 선 그 순간, 비로소 받은 복을 내어놓았습니다. 그때 야곱은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너는 복이 될지라"라는 언약의 자리에 비로소 서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야곱처럼 13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축복하는 삶을 시작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받은 것을 베풀고, 가진 것을 나누며,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복을 선포하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곡간을 채우실 뿐 아니라, 우리의 존재를 통해 하나님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의 은혜로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에 복을 더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복을 나누지 않았습니다. 내 것으로만 부여잡고 살았습니다. 움켜잡고 살았습니다. 아버지, 용서하여 주옵소서. 나이가 130이 되어서야 비로소 타인을 축복하는 야곱처럼 살지 않게 하시고, 순간순간 내가 받은 것, 내가 가진 것을 베풀고 나누며, 복을 전하고 흘려보내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또한 기도합니다. 믿지 않는 자들이 우리를 궁금하게 여기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신비로워서, 비록 가난하나 부요한 자처럼 살아가고,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지지 않으며, 저 천국을 소망하며 당당하게 어깨 펴고 살아가서, 바로도 부러워하고 바로도 궁금해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