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 길
본문: 창세기 47:7-12
영국의 소설가 조너선 스위프트(Jonathan Swift)가 1726년에 발표한 『걸리버 여행기(Gulliver's Travels)』는 크게 네 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소인국, 거인국, 공중에 떠 있는 섬나라, 그리고 말의 나라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작품을 어린아이들이 읽는 동화 정도로 여기지만, 사실 이 소설은 발표 당시 영국 사회를 신랄하게 풍자하고 비판하는 어른들을 위한 작품이었습니다.
이 소설 제4부에는 특별한 종족이 등장합니다. '스트럴드브러그(Struldbrugg)'라는 종족으로, 이들은 불로장생합니다. 200년도 살고 300년도 삽니다. 주인공 걸리버는 이 종족을 만나러 갈 때 마음이 설레었습니다. 200년, 300년을 산 이들에게서 깊은 지혜를 배울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대감은 곧 실망으로 바뀝니다. 실제로 만나본 그들은 몹시 고집이 세고, 완고하고, 소통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들여다보니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젊은 시절 학교에서 배움을 가졌지만 이후로는 더 이상 배우지 않았습니다. 책도 읽지 않았습니다. 과거에 읽었던 몇 권의 책으로 평생을 살았기에, 젊은 세대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탐욕적이었습니다. 나이가 들어 식욕은 떨어지는데 식탐은 더 생겨, 젊은 시절만큼의 양을 상 위에 차려놓고 남에게 나누어 주지 않았습니다. 쌓아놓고 먹다가 썩히고 버리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저자가 이들을 통해 풍자하고자 한 바는 분명했습니다. 당시 영국 사회의 기득권 세력, 상류사회의 일원들은 과거에 학교에서 배웠던 지식으로 평생을 살며, 독서하지 않고 소통하지 않으며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쓰는 언어와 젊은 세대가 쓰는 언어가 같은 말이었지만 서로 통하지 않았습니다. 서로에게 걸림돌이 되면서도 내려놓지는 않았습니다. 자기 욕심껏 모든 것을 차지하는 자들을 비판한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들은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자기를 객관화하는 것, 타인의 시각으로 나를 보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야곱이 바로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130세 된 노인 야곱이 자기 인생을 객관화하여 두 가지 키워드로 정의했습니다. 나그네길과 험악한 세월입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우리 인생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새롭게 조망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거류하는 인생, 나그네의 정체성
야곱이 바로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바로에게 축복합니다. 곁에 있던 요셉도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이 축복은 특별한 사건이었습니다. 야곱은 본래 남의 복을 가로채고, 움켜잡고, 붙들려는 사람이었지 누군가를 축복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이 될지라, 가는 곳마다 축복하고 살라" 하셨는데, 그의 손자 야곱이 13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타인을 축복한 것입니다.
바로는 이 축복을 받고 의아했을 것입니다. 그 당당함에 놀라 궁금해졌습니다. 도대체 이 당당함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그래서 야곱에게 묻습니다. "네 나이가 얼마냐?"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짧고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창 47:9)
야곱은 130이라는 숫자가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나그네길'이라 정의했습니다. 이 '나그네'라는 말은 여기서 처음 나오는 말이 아닙니다. 히브리어 원어를 보면 '마구르(מָגוּר)'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 단어가 창세기에서 다양한 형태로 등장합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창 17:7-8)
여기서 '거류'라는 말이 바로 '마구르'입니다. '거류'는 '정주(定住)'의 반대말입니다. 정주란 한곳에 정착하여 뿌리를 내리고 오래도록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류란 잠깐 머물렀다가 떠나는 것입니다. 뿌리를 박고 사는 것이 아니라 잠시 그곳에 머물렀다가 떠나는 삶, 이것이 거류하는 인생이며 나그네 인생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아브라함에게 하신 때는 할례 언약 직후였습니다. 창세기 16장에서 아브라함이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은 뒤 13년 동안 이스마엘에게 푹 빠져 하나님을 한 번도 찾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99세 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말씀하시고 할례 언약을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너는 여기에 영원히 머무르는 존재가 아니다. 잠시 왔다가 떠나는 거류하는 자, 나그네 같은 존재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에게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 이후에 오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다 나그네이며, 거류하는 인생들입니다.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의 아버지가 거류하던 땅에 거주하였으니" (창 37:1)
야곱의 아버지 이삭도 거류하는 인생이었습니다. 잠깐 머물렀다가 가는 인생이었습니다. 구약 전체가 이 나그네 이야기를 말하고 있으며, 이것은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히 11:9-10)
거류하는 인생이기에 장막에 거한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그러했고, 믿음의 사람 모두가 정주하는 인생이 아니라 거류하는 나그네 인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실제로 어떻게 살았습니까? 130세가 될 때까지 거류하는 나그네로 살았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뿌리를 내리고 제대로 한번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정주하는 인생을 살고 싶었습니다. 밧단아람 라반의 집에서 20년 이상을 살며 고생을 했고, 고향으로 돌아올 때는 많은 가축과 네 명의 아내, 열두 명의 자녀를 거느린 부자가 되어 왔습니다. 그 당시 그의 유일한 인생 문제를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자, 야곱은 날개를 달았습니다. 숙곳에 가축을 위한 우리를 짓고 세겜 땅에 가족을 위한 멋진 집을 지었습니다. 정주하는 인생을 위한 토대를 마련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지지 않았습니다. 평생 행복하게 살려 했는데 디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아들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 사람들을 학살했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꼈습니다. 가축 떼를 다 이끌고 갈 수 없었고, 우리도 짊어질 수 없었습니다. 멋지게 지어놓은 집도 버리고 떠나야 했습니다. 나그네길로 나선 것입니다. 정주하고 싶었지만,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 뒤 헤브론에서 제대로 뿌리 내리고 살고 싶었는데, 사랑하는 라헬이 길에서 죽었습니다. 자녀들과 잘 살고 싶었지만 요셉을 잃었습니다. 20여 년 동안 지옥 같은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요셉이 살아서 그를 이집트(애굽)로 초대했습니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이집트(애굽)에서 살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로 앞에 서서 자기 인생을 이야기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이제 와서 돌아보니,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하셨던 말씀 — 너희는 정주하는 인생이 아니라 나그네 인생이다 — 이것이 자신에게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봅니다.
천국을 향한 가벼운 발걸음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 인생을 나그네로 살게 하신 것입니까? 고생시키려고, 골탕 먹이려고 그러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그네길을 요청하시는 이유는, 저 하늘 천국이 우리의 목적지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그네가 나그네답게 살려면 짐이 가벼워야 합니다. 과거 과거(科擧) 보러 가던 선비들은 괴나리봇짐 하나 메고 짚신 몇 켤레 매어 달고 길을 떠났습니다. 복잡하게 짐을 차려서 밀고 끌고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숙곳에 우리를 짓고 세겜에 집을 짓고 살다가 떠나야 할 때, 그 모든 것을 두고 떠나야 하는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렇게 이 땅에 붙들려 있어서는 천국의 소망을 품고 살 수 없습니다. 이 땅에서 짐을 가볍게 하고 천국 소망을 바라보며 살라고 하나님께서 나그네로 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네 보물 있는 그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 하시며,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의 조상들에게는 땅이, 집이, 소유물이 그 보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볍게 하라고 나그네로 살라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그 보물이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가족들은 사랑스러운 존재입니다. 자녀, 부모님, 배우자, 친구 — 모두가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나그네로서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나그네들을 모여 살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시간 안에서 서로 만나 사랑하고, 떡을 떼고, 교제하며, 하나님 안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사람에게 지나치게 집착하여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마음에 상처가 깊어집니다. 부모님이 떠나신 후, 자녀가 시집 장가간 뒤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운 것은 그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13년 동안 이스마엘에게 빠져 있을 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할례 언약을 명하시고 "너는 이 땅에 거류하는 자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마엘을 영원히 데리고 살 것처럼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이야기도 같은 맥락입니다. 필생의 동반자인 줄 알았던 롯과 헤어져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거류인으로 살았지만, 롯은 그것이 싫었습니다. 정주하는 자로 살고 싶었던 롯은 소돔 땅으로 떠나 자신의 전 생애를 쏟아부었습니다. 젊음을 쏟고, 재산을 투자했습니다. 그런데 그 성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불타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중보 기도를 들으시고 천사들을 보내 롯을 끄집어내려 하셨지만, 롯은 쉽게 떠나지 못했습니다. 거기에 너무 많은 것을 묻어두었기 때문입니다. 소유에 대한 미련이 아니었다면 롯의 아내가 돌아보다 소금 기둥이 되었겠습니까? 롯도 미련을 거두지 못해 그 성에서 가까운 곳에 피해 성이 정말 망하는지 지켜보았습니다. 그 결과는 패가망신이었습니다.
롯이 그 땅에 정주하려 했으나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않고, 물질에도 소망을 두지 않고, 천국 소망을 바라보며 나그네 인생길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천국에서 눈 뜰 자들입니다. 이 땅에서 살아봐야 100년 남짓한 인생에서, 철없는 시절과 병약하여 흐릿한 세월을 제외하면 건강한 육체와 정신으로 살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습니다. 그 짧은 시간과 마음을 이 땅에 묻어두고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영원함은 천국에 있습니다.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나그네 인생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인생입니다.
험악한 세월, 자기를 발견하는 고백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짧고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창 47:9)
야곱은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험악한 세월'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이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동의할 것입니다. 밧단아람 라반의 집에서 얼마나 많은 고역을 치렀습니까?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힘든 훈련을 이기고 견뎌냈습니다. 나중에는 아들 요셉이 죽은 줄 알고 무덤 같은 삶 속에서 20년 넘게 지내야 했습니다. 그것이 험악한 세월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험악한'이라는 말의 히브리어 '라(רַע)'에는 '해롭게 하는', '누군가를 해하는'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야곱 자신도 험악한 인생을 살았지만, 야곱 자신 때문에 누군가를 해롭게 한 인생을 살았다는 자기 고백입니다. 야곱 때문에 해로움을 입고 산 사람들이 떠오릅니다. 에서, 레아, 요셉과 베냐민을 제외한 열 명의 아들들, 그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야곱으로 인해 고통을 겪었습니다. 130세가 되어 자신의 인생을 반추하고 객관적으로 돌아보니, 자신의 잘못이 떠오른 것입니다. "내 인생은 남을 괴롭히는 인생이었구나. 내가 험악한 세월을 산 것에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도 나로 인해 험악한 세월을 살게 만들었구나." 이것이 야곱의 반성입니다. 이 반성은 단순한 후회가 아니라 대단히 중요한 자기 발견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러한 자기 반성에 이르려면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말씀이고 또 하나는 기도입니다. 말씀은 나를 비추는 거울과 같습니다. 말씀의 거울에 나를 비추면 내가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기도하며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면, 나의 과거가 하나님께서 비추어 주시는 성령의 조명 아래 환하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말씀을 읽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라는 존재를 스스로 발견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야곱이 이런 사람이었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야곱의 변화는 요셉이 그를 이집트(애굽)로 초대했을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기쁜 나머지 곧장 길을 나서다가 브엘세바에서 멈추어 섰습니다. 그곳에서 희생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때부터 야곱은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존재가 되었으며, 자기를 반성하며 타인에게 해를 끼쳤던 존재였음을 고백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지금 이 말이 바로 앞에서 하는 말이지만, 사실은 하나님 앞에 올려드리는 자기 고백이요, 신앙 고백과 같은 말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나이 들수록 어렵고, 지위가 높을수록 어렵습니다.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이런 고백은 결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를 봅시다. 젊은 시절의 바울은 열정이 넘치고 성격이 급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실수도 있었고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도 주었습니다. 1차 선교 여행을 떠날 때 바울과 바나바와 마가 요한이 함께 떠났는데, 마가 요한이 중도에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날 이후로 바울에게 마가 요한은 상종해서는 안 될 사람이었습니다.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바울이 인생 말년에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면서 "마가를 데려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 4:11)고 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변했을까요? 어떻게 그의 심경에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요?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딤전 1:15)
사도 바울은 교회를 수십 개 개척한 인물이자 탁월한 설교가이며 신학자입니다. 감히 누가 바울에게 "당신은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위치와 지위가 있는데, 감히 누가 그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밖에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탁월한 설교가요 신학자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한 줌 흙밖에 되지 않는 연약한 존재임을 알았기에,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고 말씀을 보며 자신을 매 순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러다 젊은 시절의 잘못이 떠올랐습니다. 젊디젊은 마가 요한의 한 번의 실수를 용납하지 못하고 품어주지 못했던 자신의 과오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돌이킨 것입니다. 멋진 어른의 모습입니다.
130세가 된 노인 야곱에게 "아버지는 남을 해롭게 한 나쁜 사람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녀가 있었겠습니까? 그 당시 분위기에서 아무도 아버지에게 그렇게 질책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 앞에서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말씀 앞에 서고 기도하니 자신이 보였습니다. 우리가 어린 시절에는 부모님에게 책망을 많이 받았습니다. 회초리도 맞고, 꾸중도 듣고, 그러면서 기분이 나빴지만 고쳤습니다. 반성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어 갔습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 가정을 이루고 나면 아무도 나에게 책망하지 않습니다. 신혼 초에 배우자의 버릇을 고쳐보겠다고 지적했다가 크게 다투고 나서는 피하게 됩니다. 그 사람이 완전해서가 아니라 피해가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 60이 되고 70이 되고 80이 되면, 아무도 나에게 지적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완벽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변 사람들이 눈치도 있고 사회화가 되어 있기에, 이 이야기를 해봐야 분위기만 나빠지니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올바르게 나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필요합니다. 목회자인 사도 바울이라 하더라도, 130세 노인이라 하더라도, 교회의 목사라 하더라도, 장로라 하더라도, 누구라도 예외 없이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워야 합니다. 그래야 멋진 어른이 될 수 있습니다.
결론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스트럴드브러그 같은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탐욕스럽고, 소통하지 못하고, 굳은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자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는 실패도 있고 잘못한 것도 많습니다. 우리는 완전하지 못한 인간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갈 때까지 우리는 지속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책망받아야 합니다.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고칠 것은 고치고, 사과할 것은 사과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날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지혜로운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그네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그네임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롯처럼 소돔 땅에 정착하려 했고, 야곱처럼 세겜 땅에 정착하려 했고, 헤브론에 뿌리를 내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뜻한 바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이제서야 깨닫습니다. 이 땅에 소망 두지 않고 천국 소망 두고 살아가라는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습니다. 주여, 우리가 나그네임을 기억하고 천국 소망 두고 달려가고 걸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돌아봅니다. 성찰합니다. 하나님 말씀의 거울 앞에 나를 비추어 세웁니다. 기도함으로써 내 내면을 보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책망받고 싶습니다. 잘못한 것 고치겠습니다. 이웃의 눈으로 나를 보고, 가족의 눈으로 나를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나를 보겠습니다. 주여,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질책하여 주시고, 책망하여 주시고,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