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
본문: 창세기 47:27-31
북아메리카에 서식하는 지도거북(Map Turtle)이라는 거북이가 있습니다. 등껍질에 지도 무늬가 새겨져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지도거북은 동면할 때 강이나 호수나 연못을 찾는데, 그중에서도 압도적으로 강을 선호합니다. 강은 흐르는 물이고, 연못이나 호수는 고여 있는 물이기 때문입니다. 봄이 되면 따뜻한 봄볕에 강물이 먼저 데워지고, 이를 통해 봄이 온 것을 빠르게 감지하여 동면에서 일찍 깨어날 수 있습니다. 일찍 깨어나면 겨우내 방전된 체력을 보충할 수 있고, 짝짓기에서도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게 됩니다. 생존과 번식에 훨씬 유리해지는 것입니다.
한편, 비단거북이나 늑대거북은 연못이나 호수를 선호합니다. 이들이 동면할 장소를 찾는 방식은 놀랍습니다. 너무 깊지도, 너무 얕지도 않은 적절한 지점을 정확하게 찾아냅니다. 동면하는 자리가 너무 깊으면 봄이 늦게 찾아와 다른 개체들보다 더디게 깨어나 경쟁에서 뒤처집니다. 반대로 너무 얕으면 포식자의 먹잇감이 됩니다. 그래서 아주 적절한 곳을 찾아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물은 이처럼 자신이 생존하고 번식할 수 있는 고유한 능력, 이른바 필살기를 한두 가지씩 갖추고 있습니다. 식물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을에 나무에서 떨어진 도토리는 다람쥐가 주워 먹지 않으면, 겨울이 오기 전에 재빨리 뿌리를 내립니다. 땅이 굳어지기 전에 뿌리를 먼저 내려야, 봄이 왔을 때 빠르게 자라 큰 나무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 세계의 동식물은 이렇게 생존합니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존재들이 이토록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사람에게 하신 첫 번째 명령은 무엇이었습니까?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다스리라"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생육과 번성이 과연 동식물의 그것과 같은 의미일까요? 단순히 개체 수를 늘리고, 자손을 번식시키고,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 전부라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특별한 존재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뿌리내린 인생의 열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생육과 번성이 과연 어떤 의미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야곱의 가족 70여 명이 이제 애굽(이집트)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흉년이 5년 남았을 때 애굽으로 왔고, 그곳에서 정착했습니다. 7년의 흉년을 지내면서 요셉은 바로를 영화롭게 하고 백성들도 복되게 했습니다. 보통 흉년이 1~2년만 지속되어도 통치자가 그 자리를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7년의 흉년이 지속되는 동안 바로는 온 땅의 돈과 가축과 토지를 자기 소유로 삼아 중앙 집권 체제를 공고히 했습니다. 백성들도 요셉에게 감사하여 그를 구세주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7년의 기근 동안 늙어서 죽은 사람은 있어도, 굶어 죽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토지는 바로의 소유가 되었지만, 세금은 오분의 일만 내면 되었고, 종자도 지급받았습니다. 흉년이 끝난 후에는 그 종자를 땅에 뿌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이윽고 흉년의 시간이 끝납니다. 풍년도 끝나고 흉년도 끝난 뒤, 야곱의 자손들과 요셉의 형제들의 삶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주하며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 (창 47:27)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서 생업을 얻었습니다. 바로 이 지점을 아버지 야곱은 깊이 고민했던 적이 있습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들 요셉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헤브론을 떠나 애굽으로 향하던 중 브엘세바에서 멈추어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땅을 떠나도 됩니까? 아버지 이삭도 이곳에서 복을 받았고, 저도 이곳에서 복을 누리고 있는데, 이곳을 떠나도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애굽으로 내려가라. 내가 너와 함께 내려가겠다." 야곱은 이 약속을 믿고 가족을 이끌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 약속의 증거를 지금 눈앞에서 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흉년의 기간도 무사히 지났고,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약속의 땅이 아닌 애굽 땅에서도 그들은 생업을 얻어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 증거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이 땅에도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우리와 함께 이 땅에 오신 것이 분명하다는 확신을 그들은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130세에 애굽 땅에 온 야곱이 17년을 살다가 147세에 세상을 떠납니다. 그의 아들들도 하나둘 세월이 흐르면서 세상을 떠나고, 요셉은 110세까지 살다가 생을 마감합니다. 가족이 모두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 후손들은 남아 있었습니다. 요셉을 등용해 주었던 바로도 세상을 떠나고, 요셉에게 호의적이었던 이들도 모두 사라졌습니다. 왕조가 바뀌었습니다. 새 왕조는 이전 왕조의 흔적을 지우려 했고, 일개 노예 출신이었던 히브리인 덕분에 기근을 벗어났다는 부끄러운 역사를 지우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 민족은 여전히 그 땅에 남아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출 1:11)
고센 땅에 있던 아름다운 도시 라암셋, 그곳의 목초지는 빼앗겼습니다. 목축업자였던 그들은 양 떼와 소 떼를 모두 잃었습니다. 이제는 벽돌을 구워 피라미드를 짓고, 국고성 비돔을 세우며, 라암셋을 건축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후손 모두가 이집트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야곱과 함께 내려가겠다고 약속하셨고, 생업을 주셨으며, 바로를 통해 보호하셨고, 흉년의 기간도 무사히 지키셨습니다.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자손들은 노예가 되어 있고, 먹고살기 힘들고, 매를 맞고 있습니다. 야곱이 죽었는데, 하나님도 야곱의 죽음과 함께 이 땅을 떠나신 것입니까? 후손들을 남겨놓고 떠나셨습니까? 그들은 이런 의문을 품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은 왜 우리를 건져 주지 않으시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어디 떠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출 2:23-24)
그들이 기도했습니다. 탄식하고 부르짖으며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그리고 지도자 모세를 보내주셨습니다. 모세를 통해 430년 동안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마침내 출애굽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디 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자리에 여전히 계셨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좋은 일이 있습니다. 기쁜 일이 있습니다. 하는 일마다 잘되고, 건강하고, 자녀들도 잘되어 아무 문제 없이 살아가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닥칠 때, 인생의 비바람이 몰아칠 때, 태풍이 불어닥칠 때는 어떻습니까? 마음이 힘들고 무너지고 육체의 고통이 찾아올 때,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시지 않는 것입니까? 결단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방법은 단순하고도 확실합니다. 기도하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처럼 탄식하고 부르짖으며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내가 너를 떠나지 않았다, 지금도 너와 함께하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 주실 것입니다. 인생에 어려운 일이 닥칠 때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여기고 떠나 버리면, 우리에게는 질문만 남게 됩니다. 그 질문을 정답으로 바꾸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부르짖고 탄식하면, 이 순간에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고 고통의 한가운데서 우리 인생을 돕고 계신다는 사실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고통 가운데서 부르짖고 기도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했습니다. 기도하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르짖고 기도하여,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우리 일터에, 내 인생 가운데 여전히 함께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주하며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 (창 47:27)
흉년 이후 그들의 삶을 성경은 두 단어로 정리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였다는 것입니다. '생육'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파라'(פָּרָה)로, '열매를 맺다', '결실하다'라는 뜻입니다. 성경 전체의 흐름에서 열매를 맺는 것은 나무의 이미지와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해 이 열매를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요 15:5-6)
예수님 자신이 포도나무가 되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나무의 가지입니다. 포도 열매는 가지에 달리는데, 가지가 열매를 많이 맺으려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나무에 단단히 붙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무를 떠나서는 안 됩니다. 나무에서 떨어져 나가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 매여 있고 주님께 붙어 있어야 내 인생에 열매가 맺힙니다. 생육하는 삶, 열매 맺는 삶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야곱의 자손들, 요셉의 형제들이 '생육'했다는 말은 곧 하나님께 뿌리를 두고 있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하나님께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었기에, 성경은 '생육', 곧 '파라'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 그들은 총리의 가족이었습니다. 요셉은 바로의 최측근이었고, 바로 왕의 보호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잘 먹고 잘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눈으로 본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삶을 '생육'이라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에스더를 생각해 봅니다. 에스더는 페르시아(바사) 제국 황제의 아내, 왕비였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시시한 한 나라의 왕이 아니라 거대한 제국의 황제였습니다. 남편에게만 뿌리를 내리고 있어도 됩니다. 남편에게만 잘 보이면 됩니다. 남편이 하라는 것, 시키는 것을 다 잘하고, 그의 비위를 맞추며 살면 됩니다. 그러면 평생 동안 사람들이 볼 때 아름다운 열매를 많이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세상의 온갖 진귀한 것을 그녀가 다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만약 에스더가 자기 남편에게만 뿌리를 두고 살았더라면, 에스더는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가짜 열매입니다. 에스더가 하나님께 뿌리를 두고 있는지, 사람에게 뿌리를 두고 있는지를 시험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하만이 유대인 전체를 몰살시키려 한 것입니다. 그때 모르드개가 말합니다. "이제 네가 행동할 때가 되었다. 이 순간 잠잠하면 유대인은 다른 곳에서 구원을 얻겠지만, 너와 네 아버지의 집은 멸망할 것이다.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에 4:14). 그 부르심에 에스더가 순종합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왕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왕 앞에 나아갔습니다. 죽으면 죽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나아간 것입니다. 에스더는 철저하게 하나님께 뿌리박은 인생이었습니다. 그래서 열매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생육한 것입니다. 열매 맺고 결실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결실이고 열매이기에 그 열매는 변하지 않습니다. 빛이 바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추수하시고 거두실 영원한 열매이기에, 지금도 성경에 기록되어 수천 년이 지난 오늘 우리가 읽고 은혜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벨론(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갔지만, 실제로는 유대 귀족 가문의 자녀로서 뽑혀 간 것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침략하는 나라마다 인재를 선발하여 갈대아인의 학문을 가르쳤습니다. 상식적으로라면 바벨론에 뿌리를 내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과 세 친구는 달랐습니다. 왕의 음식과 포도주를 거절하고 열흘 동안 채소만 먹었는데, 오히려 얼굴이 더 윤택해졌습니다. 세 친구는 금 신상 앞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뿌리를 둔 인생이 어떻게 우상에게 엎드릴 수 있겠습니까? 분노한 왕이 풀무불에 던지라 명했지만, 하나님의 천사가 그 자리를 동행하여 머리카락 하나 상하지 않고 나왔습니다. 다니엘은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의 모략을 알면서도 하루에 세 번 창문을 열고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고 예배했습니다. 사자 굴에 던져졌지만,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뿌리를 둔 인생이 맺는 것이 참된 열매입니다.
어떤 열매를 맺기 원하십니까? 하나님 말씀에 뿌리를 두어야, 하나님께 뿌리를 두고 살아야 변하지 않는 참된 열매가 내 것이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부귀, 영화, 권세, 물질의 열매를 맺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모두 썩어 없어지는 것들입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뿌리를 두고 살아간다면, 시간이 흐른 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거두어 가시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뿌리를 두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께 뿌리박은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야곱의 가족들이 애굽 땅에 살면서 그들이 생육했다고 표현하셨습니다. 그들은 바로에게 기대지 않았습니다.
담을 넘는 무성한 가지의 비밀
그들은 권력에 의지하지 않았고, 하나님 말씀에 뿌리박은 인생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성경은 그들의 삶을 정리할 때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고 기록합니다. '번성'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바'(רָבָה)는 '뛰어넘다', '극복하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무엇을 극복하고 무엇을 뛰어넘었다는 것입니까? 히브리 민족으로서 이집트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차별도 많았을 것이고, 그들이 마주한 장벽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것을 뛰어넘었다는 뜻이며, 극복했다는 의미입니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창 49:22)
야곱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아들들을 모아놓고 한 사람씩 축복했는데, 요셉에게 이렇게 축복했습니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샘 곁의 무성한 가지이며, 그 가지가 담을 넘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실 그대로였습니다. 요셉이 원래 살았던 곳은 가나안 땅 헤브론, 시골 촌동네였습니다. 시골뜨기 촌 소년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그 소년이 이집트에 와서 총리가 되었습니다. 단순한 총리가 아니라 이집트의 모든 사람보다 뛰어난 실세 총리가 되었습니다. 바로의 꿈을 해석해 주었고, 국가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던 난제인 7년 흉년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버렸습니다. 그 가지가 담을 뛰어넘은 것입니다. 번성한 것입니다. 뛰어넘은 것입니다. 남들보다 특별하고 탁월하게 된 것입니다.
요셉이 배운 것이 많았습니까? 가진 것이 있었습니까? 그는 시골 출신에 노예 출신이었으며, 감옥에까지 다녀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토록 번성하고 담을 뛰어넘을 수 있었던 까닭은, 그의 뿌리가 샘 곁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샘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의 삶의 근원이 은혜에 뿌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의 삶의 근원이 자기 욕심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뿌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은혜에 깊이 담겨 있었기에, 풍성하게 넓고 넓게 담을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성공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 자녀들이 번성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그들의 뿌리를 점검해 주십시오. 그 뿌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들의 삶의 근원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 뿌리가 샘 곁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닿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번성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자기 일생을 마감하면서 이런 고백을 남겼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등불이시니 여호와께서 나의 어둠을 밝히시리이다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진으로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넘나이다" (삼하 22:29-30)
다윗이 뛰어넘은 성벽들을 살펴봅니다. 그는 골리앗이라는 성벽을 뛰어넘었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위대한 장수 골리앗과 양 치던 소년 다윗이 상대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골리앗을 뛰어넘었습니다. 한 나라의 절대 권력을 가진 사울 왕을 일개 목동 출신인 다윗이 뛰어넘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수많은 나라와 민족의 성벽을 뛰어넘었습니다. 전쟁에서 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가 병사 훈련을 체계적으로 받은 적이 있습니까? 왕으로서의 교육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성벽을 뛰어넘을 수 있었던 까닭은 주를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뿌리가 하나님께 닿아 있었기에 번성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인생을 살다 보면 장애물을 만납니다. 어려운 상황에 부딪힙니다. 그때 어떻게 하십니까? 그 앞에 주저앉습니까? 내 인생을 원망합니까? 되돌아갑니까? 이제부터는 주를 의지하고 힘차게 뛰어넘어야 합니다. 극복해야 합니다. 그것이 번성입니다. 뛰어넘고 극복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인생의 어려운 난관을 만나면 극복할 힘을 하나님께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주를 의지하고 하나님을 붙잡고 나아가면 얼마든지 극복하고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결론
다시 창세기 1장 27~28절로 돌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에게 주신 첫 번째 명령이자 복은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다스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때 생육과 번성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자녀를 많이 낳으라는 것입니까? 자녀를 많이 낳아서 개체 수를 확장하고, 땅을 정복하라 했으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전쟁을 일으켜 이 땅 모두를 차지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너의 뿌리를 하나님 말씀에 두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열매 맺는 인생이 되라는 것입니다. 가짜 열매가 아니라 참된 열매를 맺고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어려움이 닥치고 난관이 찾아오고 고난이 밀려올 때, 하나님을 의지하고 힘차게 뛰어넘어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육과 번성의 의미입니다.
부디 좌절하지 마십시오. 주저앉아 슬퍼하지 마십시오. 힘을 내어 다시 한번 도전하며, 생육하고 번성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우리 인생의 뿌리를 점검합니다. 내 인생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까? 하나님 말씀에 뿌리를 두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열매 맺기를 원하시고 결실하기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세상이 말하는 가짜 열매에 취해 살았습니다. 에스더가 맺었던 참된 열매를 저도 맺겠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맺었던 참된 열매를 우리도 맺기를 원합니다. 가짜 열매를 따라가다가 망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내 욕망의 열매를 맺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주여, 우리의 뿌리가 샘 곁에 있기를 원합니다.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주를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넘나이다. 주여, 내 능력을 의지해서는 한 뼘도 넘어갈 수 없습니다. 주를 의지하고 높고 높은 성벽도 뛰어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에게 힘을 주옵소서. 내 앞에 있는 난관이 힘겹습니다. 그것 때문에 많이 울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낙심하고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뛰어넘겠습니다. 용기를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