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강 / 에브라임과 므낫세 (48:1-22)

에브라임과 므낫세

본문: 창세기 48:1-22

더닝-크루거 효과(Dunning-Kruger Effect)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습니다. 능력은 보잘것없는데 스스로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더닝과 크루거는 미국의 사회심리학자들로, 코넬대(Cornell University) 학생들을 대상으로 간단한 시험을 치렀습니다. 석차를 내고 평가를 했는데, 하위 25%에 속하는 학생들은 평균 9.6개를 맞혔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생각하기에는 14개 이상을 맞힌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석차도 평균 88등 정도 되었는데, 이들은 스스로 32등 정도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더닝-크루거 효과를 자녀들을 키우면서 숱하게 경험했습니다. 시험만 보면 잘 봤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기대해도 좋다며, 자신을 좀 믿어보라고 합니다. 그런데 결과를 보면 참담하지 않습니까? 문제는 내가 무엇을 틀렸는지도 모르고, 내가 모르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학생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 우리 각자에게도 크고 작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내가 아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여기에 대해서는 전문가라고 생각하고 모르는 것이 없다고 여깁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까? 지식의 확장을 위해 노력하지 않고 수고하지 않으려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생각해 보면 알고리즘(Algorithm) 효과를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는 것, 내가 관심 있는 분야가 계속해서 노출됩니다. 그러면 끊임없이 내 마음에 편향적 인상이 형성됩니다. 그래서 내가 경험하는 것의 반대편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경험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지식의 확장을 위해 애쓰고 수고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데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는 어떠합니까? 성경은 한 부분만 읽어서는 곤란합니다. 신구약을 통틀어서 읽어야 하고, 한 가지 개념만 가지고 전체를 안다고 호도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야곱이 요셉의 아들, 곧 야곱의 손자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하는 장면입니다. 성경의 축복은 이 장면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부분만 가지고 성경에 나오는 모든 축복을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창세기로 범위를 넓혀야 하고, 성경 전체의 맥락 속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깨달아야 우리는 종합적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살피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인간의 선택, 하나님의 선택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창 48:5)

사실 이 말씀을 그냥 그대로,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야곱이 자기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해하기 쉽습니다. 이 할아버지가 자기 손자를 자기 아들로 입양하려고 하시는가, 그렇게 생각하기 쉽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야곱의 진심이 그다음에 나옵니다.

"요셉이 그의 아버지에게 아뢰되 이는 하나님이 여기서 내게 주신 아들들이니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그들을 데리고 내 앞으로 나아오라 내가 그들에게 축복하리라" (창 48:9)

이것이 야곱의 진심이었습니다. 두 손자를 축복하겠다는 것, 그러니 데리고 나오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축복을 하려면 손자들을 모두 축복해야 합니다. 야곱의 손자들이 한둘이 아니지 않습니까? 수많은 손자들을 다 데리고 나오라, 내가 오늘을 잡아서 이 아이들을 모두 축복하겠다, 이래야 말이 되는데 다른 손자들에게는 별 관심이 없고 요셉이 낳은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만 데리고 오라, 내가 이들에게 축복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야곱이 이렇게 말한 것은 요셉에게 장자권을 부여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미 가나안 땅에 살 때부터 열일곱 살 소년 요셉에게 채색옷을 지어 입혔습니다. 채색옷을 입고 노동의 면제를 부여받았습니다. 너는 지금부터 이미 형제보다 뛰어난 자이며, 나는 너를 장자로 인정한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세월이 한참 지났습니다. 이제 여기서 못을 박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다른 형제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우선 현실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누구 덕분에 여기 살고 있습니까? 요셉 덕분에 흉년의 7년을 잘 보냈고, 아무런 문제 없이 왕의 가축을 양육하며 잘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현실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아버지가 수십 년 동안 요셉에게 장자권을 주고자 했으니 이제는 아버지 뜻대로 하게끔 내버려 두자, 우리 마음에 좀 들지 않아도 아버지가 그렇게 하시겠다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자, 그런 마음도 자식들에게 왜 없었겠습니까?

율법에 의하면 장자권을 부여받은 사람은 두 배의 몫을 받습니다.

"자기의 소유를 그 아들들에게 기업으로 나누는 날에 그 사랑을 받는 자의 아들로 장자를 삼아 참 장자 곧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보다 앞세우지 말고 반드시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인정하여 자기의 소유에서 그에게는 두 몫을 줄 것이니 그는 자기의 기력의 시작이라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음이니라" (신 21:16-17)

장자에게 두 몫을 주라고 하지 않습니까? 요셉의 두 아들을 데리고 와서 그 두 아들에게 축복하는 것은 두 몫을 주겠다는 뜻입니다. 이제 이 가정의 장자권은 요셉에게 흘러간다는 선언입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선택이었습니다. 아들 중에 요셉을 공식적으로 장자로 세우겠노라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과연 그렇게 생각하셨을까요?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서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못하였느니라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대상 5:1-2)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갔습니다. 이유는 아버지가 요셉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특별한 말씀이 나옵니다.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다고 했습니다. 이 주권자가 누구입니까? 인간 중의 주권자는 이스라엘이 탁월하게 아끼고 사랑하는 왕 다윗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이었습니다. 다윗의 치세에서 이스라엘은 영화를 누렸습니다. 영토는 가장 넓게 확장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인간 왕 다윗이 핵심이 아닙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와 죽음의 문제,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피 흘리시고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유다의 자손 중에 주권자로 오시지 않았습니까?

유다의 자손 중에서 주권자가 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은 유다였다는 뜻입니다. 인간 아버지의 선택은 야곱이었을지, 야곱의 선택은 요셉이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선택은 요셉이 아니라 유다였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운명론을 가르치는 책이 아닙니다. 아버지 야곱이 요셉에게 장자권을 주어서 공식적으로 세웠습니다. 그의 두 아들을 데리고 오라, 내가 두 몫의 축복을 해 주겠다며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서 주권자가 태어났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공식적으로 이 가정의 장자권을 요셉에게 이양하는 날, 그때 유다는 잠자코 가만히 있었습니다.

자리를 지킨 유다, 떠나버린 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유다에게 왜 서운함이 없었겠습니까? 유다도 지분이 있지 않습니까? "아버지, 제가 아니면 베냐민을 누가 지켰겠습니까? 제가 담보 신앙으로 베냐민을 담보하고 제가 책임지겠다고 했고, 제 목숨을 걸었고, 결국은 이렇게 우리 가족이 화목하게 된 것은 저의 지분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는 왜 안 됩니까?" 유다는 이런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있었습니다.

이 장면에서 한 사람이 떠오릅니다. 에서입니다. 에서는 아버지 이삭의 장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남의 권위가, 장자의 축복이 동생 야곱에게 넘어가 버렸습니다. 장자권을 도둑맞았습니다. 물론 에서에게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팥죽 한 그릇에 팔아먹은 사람이 에서가 아닙니까? 그런데 동생과 어머니가 짜고 그를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명분을 가로채 갔습니다.

아버지의 손이 야곱의 머리에 얹어지고 축복 기도하는 날, 그날 이후에 에서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에서가 그의 아버지의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슬피 울며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창 27:34)
"에서가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가 빌 복이 이 하나 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 (창 27:38)

소리를 높여 울었습니다. "아버지, 복이 이 하나뿐입니까? 저에게도 축복하십시오." 울고불고 야단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다음이 문제입니다. 에서는 축복과 장자의 권리가 야곱에게 넘어간 이후에 아버지를 떠나버렸습니다. 은혜의 자리를 박차고 나갔습니다. 세일 산으로 갑니다. 거기서 이방 결혼을 합니다. 자기 민족을 이루고 거기서 한 일가를 이루고 살고 말았습니다. 은혜의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린 것입니다.

만약 에서가 "저에게도 잘못이 있습니다. 제가 장자의 권리와 명예를 가볍게 여겼습니다" 하고 회개하며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면, 그 자리를 지키고 머물러 있으면서 회개하고 돌이켰다면 그에게도 기회가 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은혜를 박차고 나가 버렸습니다. 이제 내 운명은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의 손이 야곱에게 얹어지는 순간 나는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끝나버린 것입니다.

유다는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 자리에서 자기 할 일을 성실하게 감당했습니다. 우리는 유다의 삶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다말 사건 이후에 회개했고, 회개한 이후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합당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의 인생은 담보 신앙으로 온전하게 열매 맺었고, 하나님은 그의 신앙을 기뻐하셨습니다.

결국 자기 하기 나름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목사이기 때문에, 내가 장로이기 때문에, 중직자이기 때문에, 우리 가정이 대대로 신앙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타고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말입니다. 기독교적인 문화와 분위기와 혈통은 이어받았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내 신앙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등의 아무런 상관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나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내 신앙의 실력은 형편없는데, 세상에 나가서 한번 부딪히면 박살나고 깨어지고 내 믿음이 바닥을 보이는데, 그런데도 나는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더닝-크루거 효과가 아닙니까? 나는 형편없는데 자신의 실력을, 자신의 신앙생활을 과대 포장하고 있습니다.

내 아버지가 잘 믿은 것이지, 내 할아버지가 잘 믿은 것이지, 그것은 나의 하나님과의 관계와 상관이 없지 않습니까? 내 머리에 할아버지의 손이 얹어진 것, 그것은 내 신앙생활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내 신앙이 운명론적으로 복받을 것으로 타고났다고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 가롯 유다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선택하신 제자들입니다. 이 세상 인류 중에 단 열두 명에게 부여되는 예수님의 제자라는 특권을 가진 자가 가롯 유다가 아닙니까? 유다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아먹었습니다. 그는 돈궤를 맡은 자였는데 도둑이었습니다. 결국 사도의 직을 박차고 나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활동하실 때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는, 일면식도 없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사도 중에 가장 위대하고 가장 큰 사도가 되지 않았습니까? 하기 나름이라는 뜻입니다. 혈통으로, 우리 가정에 흐르는 피로는 나를 정결하게 할 수 없습니다. 나를 정결하게 하는 그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밖에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로운 힘을 얻고 살아가는 것은 내 하기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권자가 유다 지파에서 나게 하셨습니다. 유다는 야곱이 낳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레아가 낳은 넷째 아들이 아닙니까? 존재감이 전혀 없는 아들이었습니다. 자기 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혈통을, 가문을, 직분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가 어떤 인생을 살아가는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지, 오늘의 나의 신앙이 그다음을 결정할 줄로 믿습니다.

둘째를 향한 하나님의 오른손

이제 요셉이 아버지가 축복해 주신다고 하니 두 아들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 (창 48:14)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입니다. 두 아들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보통이라면 장남 므낫세에게 오른손을, 둘째 에브라임에게 왼손을 얹을 텐데 둘을 데리고 와서 오른손을 둘째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장남 므낫세의 머리에 손을 바꾸어 얹었습니다. 기도 중에 요셉이 이것을 알았습니다.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아버지의 손을 바로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강하게 거부합니다.

"그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아니하며 이르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창 48:19)

이 해석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에브라임 지파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영적으로 인도할 여호수아가 났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오른손에 힘이 크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므낫세 지파에서도 큰 인물이 나지 않았습니까? 사사 중에 위대한 사사 기드온도 므낫세 지파 사람입니다. 이것도 그렇게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 야곱의 입장에서 그는 왜 오른손을 둘째 머리에 얹었을까요? 그의 지난날의 경험으로 우리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은 둘째 아들이 아니었습니까? 쌍둥이로 태어났습니다. 불과 몇 분 차이로 태어났는데 장자 독식의 사회에서 형 에서가 모든 것을 다 가져간다고 했습니다.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둘째로 태어난 것이 그를 힘들게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축복을 받고 싶다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거짓말도 했습니다. 형의 옷을 입었습니다. 어머니와 공모하여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나는 그렇게 비참한 인생을 살고, 그렇게 투쟁적이고 전투적인 인생을 살았는데 내 손자 에브라임은 그렇게 살지 말라고, 너는 비록 둘째이지만 나의 오른손으로 너에게 희망이 있음을, 하나님은 둘째도 버리지 않으셨음을, 하나님은 비록 둘째인 너에게도 사랑의 오른손을 내밀고 계심을 보여주고 깨닫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의미가 있습니다. 이 시대에 첫째들도 있고 둘째들도 있습니다. 태어난 시간의 순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원하는 것 다 누리고 사는 시대, 가장 앞선 부귀영화와 권세를 다 누리고 사는 이 시대에 첫째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몇 안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의 뒷모습을 쫓아가기 바쁩니다. 열심히 살아도, 최선을 다해서 산다 하더라도 먹고살기도 힘듭니다. 2등이 아니라 3등, 꼴등으로 살아가기도 버거운 세상이 아닙니까? 평생 살았는데 일군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생각합니다. 나는 둘째구나, 저 사람이 모든 걸 다 가져가고 저 사람이 복도 받고 부귀영화도 누리고, 나는 가진 것도 없고 이렇게 살고 있구나, 하나님이 왜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 건가. 둘째가 가진 서러움이 있습니다. 이 시대 패배자로 살고 있는 것 같은 서러움과 아픔들이 우리 안에 크고 작게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에브라임에게 오른손을 내밀어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 축복한다고 하시는 분이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가정에 이집트(Egypt)에서 딸려온 한 여종이 있었습니다. 하갈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가나안 땅에 와서 10년째 자식이 없었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부부가 결정합니다. 젊은 여인 하갈에게서 자식을 생산하자고 한 것입니다. 하갈이 임신을 했습니다. 그런데 임신하자마자 사라의 미움을 받습니다. 사라가 이 여인을 괴롭혀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하갈이 집을 나갔습니다. 사막을 떠돌아다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하갈이 하나님께 외치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의 사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창 16:10-11)

이집트(Egypt) 여인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지 않은 아이를 잉태한 것입니다. 그 가정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아이는 사라를 통해서 태어날 이삭이 아닙니까? 그런데 아브라함과 사라의 죄 때문에 잉태된 아들입니다. 그 아들을 잉태하고서도 하나님께 부르짖는데 하나님이 들어 주셨습니다. 아들의 이름까지 하나님이 지어 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런 분입니다. 부르짖는 자, 고통 가운데 매달리는 자, 인생의 2등으로 신음하는 자, 인생의 밑바닥에서 살고 있는 자, 축복받지 않은 아이를 잉태한 이 여인을 사랑하시고 그 고통을 들어주시는 분, 그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오늘 꼴찌로 살아도 오른손을 머리에 대고 축복해 주십니다. 걱정하지 말라고, 내가 너를 축복하겠다고, 너는 복이 될 것이라고, 염려하지 말라고 하나님이 이끌어 주십니다.

누가복음 15장에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둘째 아들입니다. 형이 아버지 돌아가시면 재산의 절반, 자기가 받을 몫의 두 배 이상을 가져가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도 잘 살고 싶었습니다. 아버지 살아생전에 성공한 모습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유산을 미리 상속받아서 나갔습니다. 성공해서 보란 듯이 잘 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거지가 되었습니다. 망했습니다.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유산을 상속받아 나간 것도 경을 칠 노릇인데 다 날리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몸에 손을 댑니다. 따뜻하게 안아줍니다.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해 줍니다.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여 줍니다. 손에 가락지를 끼워줍니다. 껴안아 줍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사랑이 아닙니까?

결론

실패하고 돌아와도, 꼴찌로 살아도, 둘째여도 하나님의 사랑은 한결같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판단하지 말기 바랍니다. 우리가 성공적인 인생을 살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그만큼 나를 향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지 않기 바랍니다. 우리의 모습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최선의 모습은 하나님이 평가하시고 하나님이 판단하실 것입니다. 우리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하시는 하나님,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고 인정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 앞에서 우리도 어깨 펴고 당당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운명론에 사로잡혀 살았습니다. 좋은 집안에 태어나고 믿음의 집안에 태어나면 우리 믿음의 실력이 저절로 갖추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습니다. 인간의 선택은 요셉이었지만 하나님의 선택은 유다였습니다. 주여, 우리도 하나님의 선택을 받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선택받을 수 있도록 잘 살게 하여 주옵소서.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회개하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고, 우리도 유다처럼 담보 신앙을 가지고 믿음의 걸음을 걸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둘째여도 괜찮다고 말씀하시고 오른손을 얹어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비록 연약하다 할지라도, 우리가 비록 모자란 인생을 산다 할지라도, 우리의 현재의 모습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하갈에게 "내가 너의 고통을 들었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둘째 아들, 집 나간 자를 따뜻하게 안아 주시는 아버지, 그 하나님이 오늘 우리를 껴안아 주심을 믿습니다. 둘째여도 용기 내고 힘내고 살아가게 하옵시고, 오늘 우리의 모습을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보여주는 믿음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