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강 / 르우벤 시므온 레위 (49:1-7)

르우벤, 시므온, 레위

본문: 창세기 49:1-7

아침이면 교회에 출근하여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청소입니다. 사무실 문을 열고 창문을 활짝 열어둔 채 음악을 크게 틀고, 청소기를 돌리고 바닥을 쓸고 닦습니다. 청소를 마친 뒤에는 커피를 내리고 신문을 봅니다. 이 일과 가운데 고마운 존재가 있다면 바로 진공청소기입니다. 만약 진공청소기가 없었다면 청소하는 시간이 훨씬 길어졌을 것입니다. 쓸고, 닦고, 먼지를 털어내는 시간이 얼마나 지루했을지 생각하면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19세기까지만 해도 실내 청소라 하면 빗자루와 쓰레받기, 그리고 먼지털이가 전부였습니다. 19세기 말 영국에서 기계식 청소기가 처음 선을 보이는데, 당시의 청소기는 바람을 불어내는 방식이었습니다. 거대한 모터를 달고 다니며 굉음을 내면서 바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청소기 맞은편에 커다란 상자 같은 것이 쓰레받기 구실을 해야 했습니다. 먼지를 받아내고 쓰레기를 담아야 하는데, 그것이 뜻대로 될 리 없었습니다. 먼지는 사방으로 흩날리고 쓰레기도 상자 안에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청소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먼지를 일으키고 문제를 더 크게 만드는 꼴이었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부스(Booth)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기계 설비를 다루는 기술자였는데, 바람을 부는 것보다 빨아들이는 쪽이 훨씬 효과적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집에 돌아가 손수건을 입에 대고 먼지를 직접 빨아들여 보았습니다. 아무리 실험 정신이 투철해도 그런 시도는 선뜻 하기 어려운 법인데, 이처럼 엉뚱한 발상을 가진 사람이 큰일을 해냅니다. 직접 해보니 효과가 확연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기계를 설계하여 흡입형 진공청소기를 최초로 만들어냈습니다. 그 이후로 기술이 거듭 발전하여 청소기가 소형화되었고, 이제는 가정마다 없는 집이 없게 되었습니다. 바람을 불어내느냐, 바람을 빨아들이느냐 하는 발상의 전환이 혁신적인 차이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원리는 비단 청소기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얼마든지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힘이 있고 권력이 있는 사람 가운데 자기의 힘과 권력과 위세를 있는 대로 부리며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성격을 다 드러내며 바람을 일으키고 먼지를 일으키며 삽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해서 문제가 해결됩니까? 오히려 사방에 파편이 튀고 문제가 더 커질 뿐입니다. 반면에 포용하는 사람, 감싸 안는 사람, 상대방을 품어주는 사람 주변은 깨끗해집니다. 문제가 깨끗하게 사그라들고 사라집니다.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결단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세 인물이 있습니다.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 이 세 사람은 밖으로 분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자신의 복수심도 드러냈고, 분노도 혈기도 여과 없이 터뜨리며 살았습니다. 그 결과 가진 것까지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이들의 삶을 통해 우리 인생이 걸어가야 할 바를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장자의 특권을 불태운 복수심

야곱이 이집트에 이주한 지 17년이 되었습니다. 130세의 나이에 이주했을 때만 해도 바로 앞에 서서 바로를 축복할 정도로 당당하고 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17년 세월이 흐르자 이제 하나님 앞으로 갈 날이 멀지 않았음을 깨닫습니다. 그는 장자의 명분을 요셉에게 주고,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데려오라 하여 축복합니다. 그 후에 열두 아들을 모두 불러 모읍니다.

창세기 49장은 야곱의 열두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축복의 자리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단순히 인간 아버지의 자격으로 이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언약의 계승자로서, 하나님의 마음을 담은 말씀을 전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축복이라기보다 저주에 가까운 선언도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창 49:3)

르우벤은 야곱의 큰아들이었습니다. 레아가 야곱에게 낳아준 첫 번째 아들로, 이름의 뜻은 '보라, 아들이라'입니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레아가 큰아들을 낳았을 때 얼마나 기뻤으면 그렇게 이름 지었겠습니까. "이제 내가 남편의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보십시오, 제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어머니의 기쁨이 이름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이 기쁨은 야곱에게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비록 사랑했던 라헬이 낳은 아들은 아니었지만 엄연한 장자였습니다. '내 기력의 시작'이라는 표현이 그를 향한 기대를 드러냅니다. 그만큼 촉망받았고,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인물입니다. 객관적으로도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성실하게 성장하기만 했다면 얼마든지 언약의 계승자가 될 능력도, 자격도 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고 맙니다.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창 49:4)

르우벤이 아버지의 침상을 범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창 35:22)

이 사건의 시기가 문제였습니다. 야곱이 특별히 사랑했던 라헬이 에브랏 길에서 베냐민을 낳다가 세상을 떠난 직후였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떠난 아내를 애도하며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이 일을 벌인 것입니다. 방법도 시기도 하나 옳은 것이 없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만일 르우벤에게 묻는다면 그도 할 말은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 이렇게 항변했을 것입니다. "저는 이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편애의 희생자였습니다. 아버지는 요셉만 사랑했고, 요셉이 떠난 뒤에는 베냐민에게로 사랑이 옮겨갔습니다. 저는 사랑받지 못했습니다. 제가 사랑했던 어머니 레아도 아버지의 사랑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아버지는 라헬만 사랑했습니다. 어머니는 늘 소외된 존재였습니다. 어린 시절 들에서 일하다가 합환채를 얻어 어머니에게 드린 적이 있는데, 그것마저 라헬이 빼앗아갔습니다. 제 마음속에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 라헬에 대한 미움이 저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르우벤에게 라헬의 죽음은 슬픈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 상황을 기회로 삼아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이 불타올라 이 엄청난 일을 저지릅니다.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과 빌하를 향한 한순간의 정욕이 불을 붙여 일으킨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한 것, 편애의 희생자였던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과연 이 일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이었습니까?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을 원치 않는 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결단코 될 수 없습니다. 본인이 편애의 희생자였다고 해서, 피해를 입었다고 해서 이런 식으로 갚아버리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한순간에 잃어버립니다.

르우벤은 장자였습니다. 장자의 명분도, 장자의 권위도 잃어버렸습니다.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했지만, 그 월등한 위풍과 탁월한 권능을 활용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습니다. 한순간 복수심에 불타서 그 모든 것을 태워버리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속에 분노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복수심이 불탈 수 있습니다. 우리를 힘겹게 하는 사람들, 끊임없이 시비를 걸고 인생을 갉아먹는 사람들이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때마다 분별해야 합니다. 이 분노가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나 개인의 복수심인지를 말입니다.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면 큰 사고를 칩니다.

다윗이 이런 위기에 처한 적이 있습니다. 사울에게 쫓기던 시절, 들판에서 그를 따르는 600명의 용사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양을 치는 목자들을 보호해주고 그 대가로 먹거리를 얻어 연명하던 때였습니다. 하루는 부유한 나발이라는 사람의 양털 깎는 잔칫날이 되어 사람을 보내 먹거리를 요청했습니다.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발이 다윗을 모욕합니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습니다. 400명의 군사를 일으켜 나발을 치러 달려갑니다. 그때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 길을 막아 섭니다. 그녀가 간곡히 말합니다.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마십시오. 이것은 당신의 복수심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이 일로 나발의 목을 치면 그것은 무죄한 피를 흘리는 일이 됩니다."

우리가 이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골리앗을 향하여 돌진할 때는 막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다윗이 던진 물맷돌이 골리앗의 이마에 명중하도록 도우셨습니다. 40일 동안 조석으로 이스라엘 군대 앞에 나타나며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골리앗을 향해 나아갈 때, 하나님은 다윗을 도우셨습니다. 거룩한 분노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발을 향해 나아갈 때는 아비가일을 통해서 막으셨습니다. 개인의 복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거룩한 분노와 개인의 복수심은 분명히 구별되어야 합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롬 12:17-18)

사도 바울은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합니다.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내 원수는 누가 갚아줍니까? 이 억울한 심정은 누가 풀어줍니까? 저 사람이 잘 먹고 잘 사는 꼴을 보기에는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갚아주십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하실 때, 원수 갚는 일은 하나님께 맡기라는 뜻입니다. 억울한 마음은 하나님께 호소하라는 뜻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우리의 원수를 갚아주실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으면 자신이 가진 것을 한순간에 모두 불태울 수 있으니, 절대로 그런 길을 걷지 말아야 합니다. 르우벤이 주는 교훈을 우리가 붙잡고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언약을 오용한 잔혹한 칼날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창 49:5)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입니다.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라고 했습니다. 이 선언은 어떤 사건을 배경으로 한 것입니까? 야곱의 가족이 세겜 땅에 머무르던 때의 일입니다. 야곱의 딸 디나가 그 땅을 둘러보기 위해 성 밖으로 나갔다가 세겜의 추장에게 욕보임을 당하고 억류되었습니다. 세겜 사람들은 이 여인을 달라고 정식으로 청혼하는데, 뻔뻔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디나의 오라버니들이 분개합니다. 그중에서도 시므온과 레위가 가만히 있지 못했습니다. 당장 여동생을 구출해야 한다고 결심하고 한 가지 계략을 세웁니다.

"그런즉 이같이 하면 너희에게 허락하리라 만일 너희 중 남자가 다 할례를 받고 우리 같이 되면 우리 딸을 너희에게 주며 너희 딸을 우리가 데려오며 너희와 함께 거주하여 한 민족이 되려니와" (창 34:15-16)

할례를 받으라고 합니다.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으면 통혼하여 한 민족이 되겠다고 제안합니다. 세겜 사람들이 이 말을 좋게 여겨 수용했고, 남자들이 모두 할례를 받고 누워 있었습니다. 몸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시간에,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들고 그 성을 급습하여 세겜의 남자들을 모조리 살해해 버렸습니다.

여기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지 않으실 일을 시므온과 레위가 저지른 것입니다. 할례라는 거룩한 언약을 살인의 도구로 이용한 것입니다. 할례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맺어진 언약의 표입니다. 살에 새기는 결단의 표징으로서, 과거의 죄를 끊어내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겠다는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명하시고 할례를 명령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할례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이 거룩한 약속, 하나님의 자녀됨의 언약을 살인의 수단으로 전락시킨 것입니다.

이 사건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겠습니까? 세겜 주변의 백성들은 할례를 살인의 전조로 여기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례를 받자고 하면 경계하고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거룩한 언약이 사람을 죽이는 전조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 모릅니다.

성경에 이와 유사한 사건이 또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분노한 가인이 아벨을 살해해 버렸습니다. 예배가 살인의 시발점이 된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거룩한 제사이고, 하나님의 백성됨을 고백하는 자리입니다. 그 예배가 사람을 죽이는 시작이 되고, 할례 언약이 사람을 살해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일이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헌금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거룩한 약속이며, 구원받은 감격으로 기쁘게 하나님께 드리는 백성됨의 표징입니다. 아브라함이 전쟁을 마치고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오다가 살렘 왕 멜기세덱을 만났을 때, 멜기세덱이 요구한 적이 없고 강요한 적도 없었습니다. 기쁨으로 십일조를 하나님께 올려드린 것입니다.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예물은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하나님 백성의 표시입니다. 그러므로 헌금은 세금이 아닙니다. 교회가 강요할 수 없으며, 누구에게도 강요해서도, 강요받아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구원받은 감격이 충만하다면,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본질이 중요하며, 그 본질을 흐리게 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시므온과 레위가 지은 죄가 바로 이 죄, 거룩한 것의 본질을 왜곡한 죄였습니다.

기도 없는 분노가 낳은 비극

시므온과 레위의 또 다른 죄는 무엇입니까?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창 49:6)

'그들의 분노대로', '그들의 혈기대로'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분노했습니다. 혈기가 치솟았습니다. 분노할 만하지 않았겠습니까? 여동생이 욕보임을 당하고 억류되어 있으니 분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구출해야 한다는 명분도 분명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그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분노와 혈기를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 기도입니다. 기도 없이 모의하는 자들과 상관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기도 없이 행하는 집회에 참여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믿음의 백성은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음속에 혈기가 올라오고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그 감정을 발산하기 전에 기도가 먼저 선행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하셨습니다. "내가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이 자리에서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기도했습니까? 그들은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는데, 세 제자는 계속 잠들어 있었습니다. 이윽고 예수님께서 결단하시고 일어나자, 예수님을 체포하러 온 무리가 앞에 섰습니다. 잠에서 깬 베드로가 주님을 보호하겠다며 칼을 뺍니다.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 18:10-11)

베드로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니 혈기가 일어났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니 분노가 치솟았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니 혈기와 분노를 다스릴 길이 없었습니다. 칼집에 있던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베어버렸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자의 모습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 뜨겁게 기도하시고, 간절히 기도하시고, 결단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칼을 칼집에 꽂으라." 누가 더 강합니까? 기도하지 않고 분노와 혈기를 분출하는 베드로입니까, 기도하신 후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이십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혈기를 부리기 전에, 분노를 표현하기 전에, 먼저 기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면 분노와 혈기가 다스려질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지 않고 혈기를 내는 자, 분노하는 자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들과 말을 섞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함께 어울리면 우리도 부화뇌동하여 살인의 자리에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나름의 명분이 있었습니다. 르우벤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의 이유가 있었고, 시므온과 레위에게는 여동생을 구출해야 하는 명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방법이 틀렸습니다.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분노는 거룩한 분노가 아니라 개인의 복수심이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분노가 일어나고 혈기가 치솟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때 바람을 불어내는 사람이 될 것인지, 포용하고 품어 안는 사람이 될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할 때, 우리의 분노와 혈기는 다스려집니다. 원수를 갚는 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는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화려한 약속이 아니라 기도 위에 세워진 성실한 순종입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의 실패를 통해 귀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개인의 복수심에 눈이 멀어 거룩한 분노와 개인의 복수를 구별하지 못한 그들의 잘못을 거울삼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더하여 주옵시고, 나의 원수는 하나님께서 갚아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억하며, 원수 갚는 일은 하나님께 맡기게 하여 주옵소서. 주여,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로 인해 분노와 혈기가 올라올 때, 그 전에 먼저 기도하게 하옵소서. 기도하지 않고 엎드리지 않으면 분노와 혈기가 사람을 죽일 수도 있음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기도로 다스려 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