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야, 너는
본문: 창세기 49:8-12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은 태조 이성계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임금, 472년간의 재위 기간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 기록한 기록물입니다. 세계 어디에도 이에 비견할 기록물이 존재하지 않기에,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기록유산으로 훈민정음과 함께 등재된 기념비적인 유산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의 탁월함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수히 많지만, 그중 단 한 가지만 꼽으라면 그 공정성을 들 수 있습니다. 선조, 현종, 숙종, 경종 임금에 대해서는 실록이 두 가지씩 존재합니다. 당대에 기록된 실록과 후대에 기록된 수정실록이 함께 남아 있는 것입니다. 수정실록이 존재한다는 것은 후대의 사가들이 해당 임금에 대한 기록이 미화되거나 과장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역사를 남기기 위해 수정실록을 편찬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들은 수정실록을 남겼지만 원래의 실록은 폐기하지 않았습니다. 고스란히 보존해 두었습니다. 본래 역사를 기록하는 이들은 권력을 가진 집권 세력입니다. 전 세계 어느 역사를 보더라도 후대의 기록이 완성되면 선대의 기록은 치워버리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자신이 가진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조선의 사가들은 수정실록을 기록하면서도 앞선 역사를 그대로 두었습니다. 그 이유는 역사에 대한 존중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의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백 년 후에, 수천 년이 지난 다음에 후대가 평가해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누구의 기록이 옳은지, 이 임금의 삶과 기록을 후대 역사가들이, 후대 백성들이 기억하고 판단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역사에 대한 존중감으로 기록 두 개를 자신 있게 남겨둔 것입니다. 이것이 조선왕조실록의 진정한 가치입니다.
성경은 어떤 책입니까? 우리가 성경을 읽어 가다 보면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도 신격화되거나 미화되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특별히 존경하고 사랑하는 두 인물이 있는데, 아브라함과 다윗입니다. 아브라함은 유대인의 믿음의 조상이요, 다윗 왕은 인간 왕 중에 유대인들이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미화되거나 신격화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잘못과 적나라한 실패와 실수가 성경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의 밧세바(Bathsheba) 사건이 성경에 있는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진리의 말씀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들이 사랑한다고 해서, 존경하고 따른다고 해서 안타까운 역사를 삭제하거나 지워버리지 않습니다. 인간의 연약함과 부족함과 모자람도 있는 그대로 기록해 두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유다에 대한 아버지 야곱의 축복의 말씀입니다. 유다야말로 예수님의 조상 지파의 우두머리입니다. 유다 지파에서 다윗 왕이 났고, 유다 지파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후대에 힘 있는 사람이 볼 때, 유다야말로 예수님의 조상인데 유다의 부끄러운 기록은 없애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유다의 부끄러운 기록인 창세기 38장은 여전히 그대로 존재합니다. 창세기 38장을 보면 유다는 성급한 인물이요, 이기적인 인물이요, 정욕적인 인물로 묘사됩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조상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누구도 거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진리의 책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베냐민을 책임지고, 결국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하게 된 이야기, 유다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변화된 사람임을 성경은 있는 그대로 기록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유다에 대한 마지막 기록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록도 역시 참된 기록입니다.
이름값하는 인생, 찬송이 된 삶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창 49:8)
아버지 야곱이 유다를 축복하면서 오래전 이야기를 떠올립니다. 아들의 이름을 '찬송'이라고 지었던 어머니 레아의 사건을 기억합니다. 어머니 레아는 아들을 유다까지 네 명을 낳았습니다. 첫 아들은 르우벤, 둘째는 시므온, 셋째는 레위인데, 이 셋 모두 인간적인 자신의 바람을 담은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넷째 아들 유다를 낳고서야 "여호와를 찬송할지라"고 고백했습니다. 유다의 이름의 뜻이 '찬송'이 된 것입니다. "나는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여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아들을 이렇게까지 낳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찬송받으십시오." 그런 마음으로 아들의 이름을 '찬송'이라고 지은 것입니다.
아버지 야곱은 오래전에 부인 레아가 넷째 아들 유다를 낳을 때 그 사건을 떠올리면서 "너는 형제들의 찬송이 될지라"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너의 어머니가 너의 이름을 찬송이라고 지었는데, 너는 지금 형제들의 찬송이 되었구나. 너는 너의 이름값을 하며 살았구나." 야곱은 유다를 칭찬합니다. 유다는 형제들의 찬송이 되었습니다. 유다 덕분에 베냐민이 살아났습니다. 유다 덕분에 요셉과 형제들이 화해했습니다. 유다 덕분에 모든 식구가 칠 년의 흉년을 면하고 이곳에서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형제들 모두가 유다를 칭찬하고 유다를 찬송합니다. "당신 덕분이라고, 유다 덕분에 우리가 지금 이런 삶을 누리고 있는 것이라"고 칭찬하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런 인생을 우리는 이름값하는 인생이라고 말합니다. 유다의 이름이 찬송인데, 그가 평생을 살면서 자신의 이름에 합당한 인생을 살아낸 것입니다. 아버지는 이것을 칭찬하셨습니다. 이름값하는 인생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사람들의 이름을 바꾸어 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브람을 아브라함이라고 바꾸어 주셨습니다. 아브람은 '존귀한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한 가정의 존귀한 아버지로 사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자기 자녀를 사랑하고 처자식을 건사하며 살면 존귀한 아버지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아브라함, 곧 열국의 아버지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열국의 아버지는 쉽지 않습니다. 다른 민족들을 품어 안아야 합니다. 섬겨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야곱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야곱은 '남의 뒤꿈치를 잡는 자'라는 뜻입니다. 태어날 때 형 에서의 뒤꿈치를 붙잡고 태어났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인생을 살았고, 살면서 늘 남의 뒤통수를 치고 사기를 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제 그렇게 살지 말고 이스라엘이 될지라." 한 나라의 국호를 그의 이름으로 붙여 주셨습니다. 스케일이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남에게 사기를 쳐서도, 뒤통수를 쳐서도, 발뒤꿈치를 잡아서도 안 됩니다. 이름이 얼마나 무거운지 모릅니다. 이름값하며 사는 인생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부모는 자녀의 이름을 심사숙고하여 짓습니다. 그런데 그런 육체적인 이름, 부모가 지어 주신 이름 말고 우리에게는 영광된 이름이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우리가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성도로 불러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무엇입니까? 거룩한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거룩하다, 곧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이름은 구별된 백성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사람들이 바로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우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도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거룩하고 구별된 자로서 행동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세상의 탐욕과 욕심과 욕망에 휩쓸려 살고 있는데,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나는 지금 목적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까? 적어도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생각하는 것, 목표하는 것, 발걸음 가는 곳, 나의 언어, 눈빛, 생활, 습관, 이 모두가 구별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성도입니다. 성도의 이름값에 합당한 인생을 살아야 심판 날 하나님 앞에서 칭찬받습니다.
우리는 성도로만 부름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성도로 우리를 부르시고, 각종 다양한 직분 또한 주셨습니다. 대표적인 직분인 집사의 직분을 성경은 이렇게 규정합니다.
"이와 같이 집사들도 정중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딤전 3:8-9)
집사의 자격이 이렇습니다. 이 중에 한 가지만 살펴봅시다.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라 했습니다. 여기 가서 이 말 하고 저기 가서 저 말 하지 않는 자가 집사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직분의 이름에 합당한 삶입니다. 과연 우리 집사들이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집사가 이러한데 장로는 더 무겁고, 목사는 말할 것도 없이 무겁습니다. 우리는 이름 가지기를 좋아합니다. 이른바 명예욕이 있습니다. 집사로, 권사로, 장로로, 목사로 그 이름을 가지기는 좋아하지만, 그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아내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저 이름만 가지고 뽐내고 위세를 부리려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름값을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그 직분을 주었는데, 내가 너를 그 이름으로 불러 주었는데, 너는 그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았느냐?" 나중에 심판 날 하나님 앞에서 이 질문을 받는다면 떳떳할 수 있겠습니까? 당당할 수 있겠습니까?
유다의 평생을 다 아는 아버지 야곱이 이제 세상 떠나기 전에 아들을 앉혀 놓고 그를 칭찬합니다. "내가 너의 인생을 보니 넌 수고로웠구나. 잘 살았구나. 넌 정말 너의 어머니가 지어 준 그 이름값을 하며 살았구나. 애썼다. 수고했다." "너는 너의 이름 '찬송'이라는 이름에 합당한 인생을 살아냈구나."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칭찬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직분을 주시고, 사명을 주신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이름값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이렇게 칭찬받는 인생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가는 용기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창 49:9)
유다는 사자 새끼라고 했습니다. 그가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앞장서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용감하게 가장 첨예한 일선에 서는 사람, 그가 바로 유다라는 뜻입니다.
유다 지파의 후손 중에 갈렙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를 필두로 가나안 땅을 정복했습니다. 열두 지파가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에게는 여전히 고민거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일이 아직 완수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에 있는 일곱 족속을 하나님이 다 내보내라 하셨고, 다 쫓아내라 하셨습니다. 상당 부분 쫓아냈지만, 게릴라전을 펼치며 산지에 남아 있는 가나안 족속들이 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부탁합니다. "이제 너희가 땅을 분배받았으니 너희가 살고 있는 그 땅 산지마다 숨어 있는 가나안 땅의 잔당들을 물리쳐라. 쫓아내라." 그런데 백성들은 하지 않았습니다. 귀찮아서 하지 않고, 전쟁에 지쳐서 하지 않고, 하기 싫어서 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대세는 결판 났는데 왜 계속 싸워야 하느냐며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용감한 사자 새끼처럼 움킨 것을 찢고 나타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갈렙이었습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 (수 14:12)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라고 출사표를 던지며 일어난 그때 갈렙의 나이가 팔십오 세였습니다. 평생을 출애굽하면서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이제 나이가 들었습니다. 할아버지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그 산봉우리에 서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갈렙이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하고 떨치고 일어섰습니다. 그런데 어르신이 일어서니까 유다 지파의 다른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젊은이들이 따라 일어섰습니다. 옷니엘이라는 사람이 일어섰습니다. 옷니엘은 이스라엘의 사사 중 첫 번째 사사였습니다. 옷니엘이 갈렙을 보고 배우며 본받아 일어선 것입니다. 유다 지파가 용맹한 사자 새끼처럼 움킨 것을 찢고 일어섰더니 헤브론 땅이 자기 땅이 되었습니다. 무주공산의 땅이 자기 땅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놀라운 일이 유다 지파 후손들에게서 일어났습니다. 누구에게서 배운 것입니까? 갈렙이 이렇게 한 것은 자기 조상 유다의 피를 이어받았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야곱이 레아에게서 낳은 네 번째 아들입니다. 큰 형 르우벤이 있고, 둘째 시므온, 셋째 레위가 다 있습니다. 그런데 베냐민 사건이 일어났을 때 아무도 책임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있었습니다. 요셉은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하고, 아버지는 내주지 않겠다고 하고, 형제들은 다 입을 다물고 있을 때, 그때 유다가 나섰습니다. 사자 새끼처럼 용맹스럽게 일어섰습니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제가 친히 담보가 되겠습니다." 자기가 떨치고 일어선 것입니다.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발견되어 이집트(애굽)의 노예로 전락하게 될 위험에 처했을 때에도 유다가 나섰습니다. "저를 대신 잡아가십시오. 제가 여기 감옥에 갇히겠습니다. 대신 이 아이를 풀어 주십시오." 그가 떨치고 일어선 것입니다. 앞장선 것입니다. 용감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을 봅니다. 분명히 이 일이 옳습니다. 반드시 해야 되는 일입니다. 이 일이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눈치를 봅니다. 좌우를 살핍니다. "내가 나서지 않아도, 굳이 내가 하지 않아도 누군가는 하겠지. 여기서 내가 왜 이 말을 해서 총대를 매야 하고, 내가 왜 누군가에게 손가락질을 받아야 하는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영광을 찾아 누릴 수 없습니다. 유다의 훌륭한 점은 용맹한 사자 새끼처럼 움킨 것을 찢고 올라선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유다를 기뻐하셨습니다.
옳다고 생각되고 이 일이 진리라고 생각되면 주변 사람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습니다. 먼저 일어서 올라가면 됩니다. 유다가 그랬고, 그의 후손 갈렙이 그랬고, 유다 지파의 왕 중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먼저 지고 걸어가지 않으셨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를 따르라." 그 십자가의 길을 예수께서 먼저 올라가셨습니다. 용감한 사자처럼 올라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의 제자이고, 유다를 배우고 본받는다면, 이 일이 옳다고 생각되고 진리라고 생각되면 앞장서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를 귀하게 쓰시고 사용하실 줄로 믿습니다.
실로가 오시기까지, 끊이지 않는 은총
이제 유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약속이 나옵니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창 49:10)
규, 곧 통치자의 지팡이는 왕의 홀을 말합니다. 유다 지파에서 왕이 태어날 것이라는 예언이요, 실제로 성취되었습니다. 다윗 왕부터 시작해서 남유다가 멸망할 때까지 유다 지파의 모든 왕들이 남유다를 통치했습니다. 유다 지파에서 왕이 끊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왕 중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유다 지파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여기서 '실로'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실로는 본래 지명이었습니다. 엘리 제사장 시절, 사무엘 시절에는 실로에 언약궤가 있었습니다. 언약궤는 곧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말씀이 오시기까지'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 말씀이 곧 누구이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인간 왕이 유다 지파에서 태어나시고, 훗날 왕 중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하나님께서 유다 지파를 축복하셨는데, 이 정도로 복을 주셨습니다.
아마 유다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기대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이름값을 하며 사는 동안, 그가 용감하게 가장 먼저 올라가는 자가 된 동안, 그의 후손이 이 정도의 복을 받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눈여겨보고 계셨습니다. "마땅히 너의 후손은 이런 복을 받아 누려도 될 만큼 너의 지파는 위대한 지파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복을 주셨습니다.
이 복은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의 이는 우유로 말미암아 희리로다" (창 49:11-12)
먹고살기가 힘들면 하루 세끼 밥 먹는 것이 소원이고, 밀농사 짓는 것이 소원입니다. 그런데 여유가 있으니까 포도주를 찾고, 여유가 넘치니까 우유를 마십니다. 얼마나 풍요롭고 여유가 있으면 포도주에 자기 옷을 빨겠습니까? 얼마나 우유를 많이 마셨으면 그 우유로 이가 하얘질 때까지 마시겠습니까? 풍족하고 풍요로운 인생을 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다 지파의 후손들에게 포도나무 농사를 짓게 하시고, 포도주로 옷을 빨 정도로 풍족하게 하시며, 우유로 이가 하얘질 정도로 부유하게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나님이 명확하게 기록해 두셨습니다.
결론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순서입니다. 유다가 자기 후손들의 번영을 위해서, 혹은 자기 가문의 풍요를 위해서 노력한 적이 있습니까? 물질을 쫓아 산 적이 있습니까? 유다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값을 하느라 평생을 살았습니다. 찬송이라는 이름값을 하느라 살았고, 용감한 사자 새끼처럼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가느라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그렇게 살았더니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복이 자손의 복이요, 풍부의 복이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원리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기 처자식을 위해서만 삽니다. 미련한 사람들은 부유와 풍요를 위해서만 삽니다. 그것이 인생의 유일한 목적이 됩니다. 그런데 결과는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풍요와 부유만을 위해 사는 인생, 손에 쥔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명을 감당하고, 자신의 이름값하며 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 길을 따라 먼저 믿음의 길을 앞장서서 걸어가는 사람, 그다음은 하나님이 다 책임지십니다. 이 원리를, 이 순서를 우리는 유다 지파를 통해서 배우고 기억해야 합니다. 순서를 흔들지 마십시오. 먼저 믿음의 길을 걸어가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시는 은혜를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경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이 아름다운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유다는 찬송이라는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인생은 비겁했고 정욕적이었으며 이기적이었지만, 회개한 이후에 그는 찬송의 인생을 살아냈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그에게 감사를 표현합니다. 그는 사자 새끼처럼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가는 앞장서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후손에서 갈렙이 났고, 다윗이 났으며, 왕 중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셨습니다. 그의 후손들은 풍요와 부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주여, 오늘 우리가 어떤 가치를 가지고 살고 있습니까? 직분에 합당한 자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이름값하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생각되면 먼저 앞장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그다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맡기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크고 놀라운 복이 우리 후손들에게까지 이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