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불론, 잇사갈, 단
본문: 창세기 49:13-18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늘 간격이 존재합니다. 어린아이였을 때는 어른이 되면 행복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막상 어른이 되어 보면 현실은 만만치 않습니다. 젊은 청년의 시절에는 중년이 되고 노년이 되면 막연히 좋을 것이라 여기며, 이제는 걱정도 염려도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중년을 지나 노년에 이르면 삶은 오히려 더 치열해지고, 더 깊은 걱정이 우리 앞에 가로놓입니다.
최근 한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기대수명은 84.5세이지만 건강수명은 71.8세에 불과합니다. 이 말은 대략 72세까지 건강하게 살다가, 이후 12~13년은 병원을 오가거나 병상에 누워 지내다 세상을 떠난다는 뜻입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이토록 큽니다. 84~85세까지 건강하게 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면 좋겠다고 기대하지만, 12~13년이라는 간격이 우리를 힘겹게 합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9988234'라는 말을 합니다.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2~3일 앓다가 세상을 떠나면 좋겠다는 소망입니다. 기대수명과 건강수명의 차이가 2~3일밖에 나지 않으니, 이것이야말로 복이요 가장 이상적인 삶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을 실현하려면 기대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생활 습관과 식습관을 바꾸고, 건강을 해치는 것들을 과감히 끊어야 합니다. 현실에서 노력하지 않으면서 기대치만 높여서는 건강한 삶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는 다양한 유형의 예언이 등장합니다. 가슴 뛰고 행복한 축복의 예언도 있습니다. 요셉에게 주신 두 가지 꿈이 그러합니다.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 모든 볏단이 자신의 볏단을 향해 절하는 꿈은,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찬 비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비전과 꿈은 요셉이 가만히 있어서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 이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요셉이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지 우리는 잘 압니다. 보디발(Potiphar)의 집에서 노예로 살았고, 억울한 일을 당했으며, 감옥에 갇혔습니다. 감옥에서도 하나님을 섬기며 성실하게 살았고, 그 결과 마침내 이상과 현실의 간격을 좁혀 나갔습니다.
성경의 예언은 확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축복의 예언이 있으면 그 예언을 이루기 위해 힘쓸 때 비로소 내 것이 됩니다. 저주의 예언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만히 있어야 저주를 당한다는 뜻이 아니라, 돌이키면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회개하면 반드시 피할 길을 내어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예언의 본질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버지 야곱은 자녀들에게 축복도, 책망도, 경고도 합니다. 이 말씀은 확정된 운명이 아닙니다. 축복은 축복받을 만큼 살아야 내 것이 되고, 경고는 그 길을 가지 않으면 피할 수 있습니다. 스불론과 잇사갈과 단에게 주시는 야곱의 유언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소심한 자의 출항
"스불론은 해변에 거주하리니 그 곳은 배 매는 해변이라 그의 경계가 시돈까지리로다" (창 49:13)
스불론은 레아가 낳은 여섯 번째 아들입니다. '스불론'이라는 이름은 '거주하다', '함께 거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레아가 여섯 번째 아들을 낳고 "이제 내 남편이 나와 함께 거주할 것이다. 아들을 여섯이나 낳았으니 이제 걱정 없다"는 마음으로 아들의 이름을 스불론이라 지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아들 중에서 스불론이 특별한 족적을 남긴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유다와 요셉 같은 인물들은 탁월한 업적을 남겼고, 반대로 르우벤, 시므온, 레위 같은 아들들은 큰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어떤 아들은 업적을 남기고 어떤 아들은 큰 사고를 치는데, 스불론은 이도 저도 아니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극단적인 내향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주변 눈치만 보며, 무언가를 하려 해도 부담스러워 못하는, 그저 남의 시선에 갇혀 사는 아들이었습니다.
이런 아들에게 아버지 야곱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축복합니다. "해변에 거주하라. 그 해변은 배를 매어두는 곳이다." 이것은 단순히 앞으로 네가 어디에 살게 될 것이라는 지리적 예언이 아닙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열두 지파가 땅을 분배할 때, 스불론 지파는 해변이 아닌 사방이 막힌 내륙 땅을 차지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예언이 틀린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이 아들의 삶을 향해 간절한 당부를 한 것입니다. 부디 소심하게 살지 말고, 해변에서 배를 띄워 저 망망대해를 향해 뻗어나가는 인생을 살아가라는 축복이었습니다. 꽉 막힌 인생, 남의 눈치만 보는 인생, 아무도 이끌어주지 않으면 스스로 일어서지 못하는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품고 배를 띄우는 삶을 살아보라는 뜻이었습니다.
스불론 지파는 과연 아버지의 기대대로 살았을까요?
"드보라가 사람을 보내어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납달리 게데스에서 불러다가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지 아니하셨느냐 너는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가라" (삿 4:6)
"스불론은 죽음을 무릅쓰고 목숨을 아끼지 아니한 백성이요 납달리도 들의 높은 곳에서 그러하도다" (삿 5:18)
여자 사사 드보라가 전쟁을 주도할 수 없어 군대 장관 바락을 세우고 지파들을 모집할 때, 스불론 지파가 자원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 스불론 지파가 어떻게 싸웠는가입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웠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소심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기를 좋아했던 스불론이, 민족의 해방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웠다니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버지 야곱의 축복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해변에 거주하는 자로서 배를 띄우는 인생을 살라. 부디 그냥 머물러 있지 말라"라는 그 말씀이 현실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각양각색의 달란트를 주시고 주의 일을 하도록 불러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역시 자신의 기질을 핑계 삼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스불론처럼 그저 웅크리고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갈릴리 호숫가에서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같은 제자들을 부르시며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평생 얕은 물가에서 왔다 갔다 하며 사는 인생을 살지 말고, 깊은 데로 나아가 그물을 던지는 인생을 살아가라는 부르심이었습니다. 그들은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제자들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평생 갈릴리 호숫가에서 물고기를 잡는 직업인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말씀에 순종했기에 사도가 되었고, 복음의 역사를 바꾸어낸 교회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머물러 있지 말라고, 주의 일에 힘쓰라고, 이미 받은 달란트와 사명을 가지고 배를 띄우라고, 저 넓은 망망대해를 향하여 나아가는 인생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꿇어앉은 나귀의 헌신
"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로다" (창 49:14)
나귀가 지닌 이미지는 어떠합니까? 예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불러 "너는 나귀가 되어라"고 하시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 저는 백마인데요. 윤기가 흐르는 아름다운 명마입니다. 왜 나귀입니까?" 이렇게 반문하고 싶을 것입니다. 더 불편한 것은 '꿇어앉은' 나귀라는 표현입니다. 무릎 꿇는 것도 싫은데, 꿇어앉은 나귀라 합니다.
"그는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고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에서 섬기리로다" (창 49:15)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에서 섬기라는 말씀까지 더해지면, 이 축복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나귀가 지닌 이미지는 일꾼입니다. 나귀는 자기 몸의 두세 배가 되는 짐을 지고도 무릎이 꺾이지 않습니다. 그 짐을 지고 우직하게 걸어갑니다. 나귀는 또한 동역자의 상징입니다. 목축하는 사람들, 농사짓는 사람들에게 나귀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습니다. 지게차도 트럭도 없던 시대에, 나귀 한 마리에 짐을 잔뜩 싣고 옮겨야 했습니다. 주인에게 나귀보다 귀한 동역자는 없었습니다.
예수님도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마 21:5-7)
예수님은 왜 백마를 타지 않으셨습니까? 윤기 흐르는 명마를 타고 입성하지 않으셨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귀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일꾼으로 세우시고, 십자가의 짐을 온전히 그 어깨에 맡기셨습니다. 가장 겸손한 나귀로 이 땅에 오셨기에, 예수님은 나귀 가운데서도 가장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내가 나귀이니, 이 무거운 너희 죄의 짐을 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다. 너희도 앞으로 내가 맡기는 짐을 거절하지 말라. 너희도 그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가는 나귀가 되어 달라." 이 부탁을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백마로 살고 싶습니다. 멋지고 날씬하고 빠른 말로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어깨에 짐을 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사는 것은 거추장스럽고 힘겹습니다. 그런데 나귀는 양의 우리 사이에서 무릎 꿇고 있습니다. 주인께서 명령하시면 언제든지 "내 어깨에 짐을 내려놓으십시오. 저는 그 짐을 지고 주인의 동역자로서 십자가 길을 가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존재입니다. 아버지 야곱이 잇사갈에게 부탁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어떤 짐을 맡기시든지 그 짐을 거부하지 말라. 장차 오실 메시아께서 어떤 사명을 주시든지 그 사명을 지고 걸어가라. 이런저런 핑계를 대지 말라. 명마가 아니어도, 백마가 아니어도, 예수 닮은 나귀로 인생을 온전히 헌신하라."
우리는 늘 나의 나 됨을 저주합니다. 나는 왜 백마가 아닌가, 나는 왜 이렇게 못났는가, 이 많은 짐을 지고 걸어가는 나를 사람들이 어떻게 볼 것인가 하고 걱정합니다. 그러나 그런 시선에 휘둘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일을 감당하고, 주께서 맡겨주신 십자가를 지며, 예수님의 동역자로 살고 있는가, 그것이 주님 보시기에 귀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십자가는 각양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공통으로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는 교회를 향한 십자가입니다.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고후 11:28)
사도 바울의 염려는 오로지 교회였습니다. 교회가 그의 십자가이자 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짐을 내동댕이치거나 갖다 버리지 않았습니다. 삶을 마치는 그날까지 끝까지 그 십자가를 지고 걸어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시고 우리가 그 몸의 지체된 교회, 바울이 평생 개척하고 사역한 교회에 이단이 들어오고 음란의 영이 침투하고 거짓의 영이 들어왔지만, 바울은 교회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고 수고하며 교회를 세워 나갔습니다.
여기에는 은퇴가 없습니다. 나이는 은퇴를 말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호흡과 사명을 주셨다는 것은 여전히 맡기실 짐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 짐지기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잇사갈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모든 주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동역자로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주신 부탁입니다. 나도 지고, 너도 지고, 함께 지며, 주님 오실 그날까지 달려가야 합니다.
갈라진 혀, 십자가의 치유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창 49:16-17)
길섶의 뱀, 샛길의 독사라는 표현은 섬뜩합니다. 오솔길을 걸어가는데 갑자기 뱀이 튀어나오면, 반가워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샛길의 독사가 발꿈치를 물면, 온몸에 독이 퍼져 생명을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단 지파만을 향한 경고가 아닙니다. 우리 모든 사람 속에 내재한 뱀의 속성을 버려야 한다는 경고입니다. 뱀의 혀는 갈라져 있습니다. 여기서 이 말 하고 저기서 저 말 합니다. 뱀은 태초에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존재입니다. 그 뱀의 속성이 악한 성품으로 지금도 우리 안에 살아 있습니다. 한 입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면서, 뒤돌아서서는 하나님의 형상인 형제를 저주합니다. 한 입으로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고, 또 같은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를 지적했습니다. "샘이 어찌 한 구멍으로 단물과 쓴물을 함께 내겠느냐. 그런데 너희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원망과 불평이 한 입에서 같이 나오니 이상하다 하지 않느냐." 이것이 바로 우리의 갈라진 혀입니다. 뱀의 본성을 우리 모두가 지니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 하나님의 은혜로 열 가지 재앙을 통해 이집트(Egypt)를 빠져나왔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물을 주시며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며칠만 공급이 끊기면 곧바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뱀 같은 입술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참고 또 참으시다가 마침내 심판하셨습니다. 불뱀을 보내셨고, 뱀에 물린 백성이 독이 퍼져 죽어갔습니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민 21:6-7)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독이 퍼져가는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불뱀의 뿌리는 사실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갈라진 혀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저주했으니, 그 갈라진 혀가 뱀처럼 자기 발등을 찍은 것입니다. 자기 뒤꿈치를 문 것입니다. 결국 내가 나를 물어버린 셈입니다. 내가 곧 독사였고, 내가 곧 뱀이었습니다. 광야의 불뱀에게 물린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물어 독이 퍼져 죽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뱀의 기질이 우리를 죽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습니까? 모세가 기도하니 하나님이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달라고 명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민 21:8-9)
장대에 달린 놋뱀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그러나 그 전에, 장대에 달린 놋뱀은 바로 자기 자신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뱀 같은 너의 모습이 저주받은 나무에 달려 있으니, 그 모습을 직면하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저주받은 자신의 모습을 보지만, 훗날 그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가 매달리실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무엇을 느낍니까? 십자가에는 은혜가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 이전에,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엄중한 공의가 있다는 사실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원래 그 자리에는 내가 있어야 합니다. 뱀 같은 내가, 독이 온몸에 퍼져가는 내가, 십자가에 달려 저주받아 죽어가는 내가 거기에 매달려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려오라. 내 아들을 내어주었으니, 내 아들 예수가 거기에 달릴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 대신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도 뱀의 속성을 가진 자들이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가 그중 하나입니다. 유다는 의로운 척, 정의로운 척, 돈을 아끼는 척했지만, 실상은 도둑이었습니다.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아치운 배신자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다릅니까? 베드로는 한 입으로 예수님을 향해 신앙을 고백하고, 두 번이나 고백했으며, "제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결코 주를 떠나지 않겠습니다"라고 결단까지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배은망덕한 행위였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야말로 십자가에 달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거짓말한 뱀의 속성을 가진 존재이기에. 그러나 베드로는 울었습니다. 탄식했습니다. 자신의 죄성을 안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통곡했습니다. 눈물로 회개하는 베드로의 뒤편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뱀의 속성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로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권능과 능력만이 뱀 같은 우리의 혀를, 뱀같이 간악하고 간사한 우리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에게만 주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모든 사람 속에 뱀이 들어와 있습니다. 이 추악하고 더러운 죄는 십자가만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결론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창 49:18)
야곱이 단에 대한 예언을 마치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이 고백은 곧 "나는 십자가만을 바라봅니다"라는 뜻입니다. 스불론처럼 소심함에 갇혀 머물러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깊은 바다로 나아가라 하십니다. 잇사갈처럼 꿇어앉은 나귀가 되어 주님이 맡기시는 짐을 기꺼이 어깨에 메라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뱀 같은 속성을 경계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죄와 연약함을 해결하실 분이 이미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은혜를 붙들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스불론처럼 소심했습니다. 한곳에 매여 머물러 있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하며, 나쁜 일도 하지 않되 선한 일도 하지 않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결단합니다. 해변에서 배를 띄우겠습니다. 깊은 데로 나아가겠습니다. 주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겠습니다. 주여, 도와주시옵소서.
주여, 우리는 나귀입니다. 백마가 아니어도, 초원을 달리는 준마가 아니어도, 우리 어깨에 놓인 짐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예수님의 일꾼이 되고 주님의 동역자가 되어, 주께서 가신 그 십자가의 길에 끝까지 동행하겠습니다. 주께서 맡기신 십자가를 결코 던져버리지 않을 것이니, 우리를 믿으시고 주의 짐을 나누어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 속에 뱀 같은 존재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입술이 형제를 저주하는 입술이 되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그 입술이 내 인생을 원망하고 내 자녀를 저주하는 입술이 됩니다. 아버지,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오로지 주의 구원으로만, 십자가로만 내 속에 있는 뱀의 영을 죽일 수 있사오니, 주여, 다시는 사탄의 종 노릇 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