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강 / 갓 아셀 납달리 (49:19-21)

갓, 아셀, 납달리

본문: 창세기 49:19-21

한글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띄어쓰기입니다. 엄격한 띄어쓰기의 원칙이 잘 지켜진 글은 가독성이 뛰어나고, 읽으면서 이해가 수월합니다. '양산시 어머니 합창단'이 띄어쓰기가 되어 있지 않으면 '양산 시어머니 합창단'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띄어쓰기 하나가 의미를 완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저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전달하고 읽는 이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띄어쓰기는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비롯한 고대 언어에는 띄어쓰기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문맹이 대부분이었기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필사자들에게는 고역이었습니다.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웠고, 그것을 다시 베껴 책으로 만드는 과정이 고달팠습니다. 9세기에 이르러 부지런한 학자들에 의해 라틴어에 띄어쓰기가 도입되면서 사람들은 글을 읽는 것이 한층 편안해졌습니다. 띄어쓰기의 핵심은 여백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빈칸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의미 전달에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여백의 중요성은 글을 읽는 데에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우리 일상에서도 여백은 중요합니다. 마트의 진열대가 텅 비어 있다면 그것은 품절, 곧 인기가 있다는 뜻입니다. 다음에 좀 더 서둘러야겠다는 마음이 듭니다. 반면 가득 차 있는 진열대는 팔리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인간의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무게감 있는 사람, 영향력과 능력을 갖춘 사람들은 그 자체로 존재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만 가득 차 있다면 숨이 막혀 견딜 수 없습니다. 공동체에는 여백도 필요합니다. 가끔 농담하는 사람, 심부름하는 사람,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 주는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여백이 있어야 공동체가 무리 없이 돌아갑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여백 없이 심각한 일만 계속된다면, 매일 중요하고 어려운 일만 한다면,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가끔 넘어지기도 하고, 깨어지기도 하고, 쉬어가기도 하면서 숨을 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백이 있어야 우리도 살만합니다.

오늘 본문에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갓, 아셀, 납달리. 이들의 공통점은 여종의 자식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아버지 야곱에게 빈칸 같은 존재, 여백의 존재들이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평생 이 집에 살면서 갓, 아셀, 납달리를 다정한 목소리로 한 번이라도 불러본 적이 있었을까 의문입니다. 그 집에는 요셉이 있었고, 베냐민이 있었고, 장남 르우벤과 무게감 있는 유다가 있었습니다. 갓, 아셀, 납달리 같은 존재들은 아버지가 이름이나 알까 싶을 정도로 빈칸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들을 어떻게 보셨습니까? 하나님은 이들을 빈칸으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비록 여백 같은 존재였지만, 하나님은 아버지 야곱의 입을 통해 이들을 마음껏 축복하십니다.

역전하는 인생, 갓의 축복

그 첫 번째는 갓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갓은 군대의 추격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하리로다" (창 49:19)

이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도리어'입니다. '도리어'를 중심으로 앞과 뒤가 완벽하게 나뉩니다. '도리어' 앞의 삶은 군대의 추격을 받는 삶입니다. 숨이 차고 힘겹습니다. 군대가 쫓아오니 두렵고, 숨을 쉴 공간이 없으며, 삶이 버겁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이후의 삶은 달라집니다. 도리어 추격하는 자가 됩니다. 숨 쉴 공간이 생기고, 힘이 생기며, 오히려 내가 군대가 되어 다른 군대를 추격하는 능력이 생깁니다. 반전이 일어난 것입니다. 갓의 인생은 역전하는 인생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통해 그의 인생을 축복하셨습니다. 너의 인생은 역전의 인생이 되리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갓은 레아의 몸종 실바가 낳은 첫째 아들입니다. 이 아들이 태어났을 때 레아가 이름을 지어 주었는데, 갓이라는 이름의 뜻은 '복'입니다. '복되도다'라는 의미를 담아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복은커녕, 실제 그의 인생은 복되지 않았습니다. 여종의 자식이었고, 그 여종의 주인이었던 레아도 야곱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여인이었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살펴보면 복은커녕 저주스러웠습니다. 그의 인생은 자기 집에서도 숨 쉴 공간이 없었고, 여지가 없었으며, 매 순간 옥죄어 왔습니다.

야곱뿐 아니라 훗날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앞두고 모세가 12지파를 축복할 때에도 갓 지파를 이렇게 축복합니다.

"갓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갓을 광대하게 하시는 이에게 찬송을 부를지어다 갓이 암사자 같이 엎드리고 팔과 정수리를 찢는도다" (신 33:20)

'광대하다'는 히브리어 '라하브(רָחַב)', 곧 지경을 넓게 하다는 뜻입니다. 추격당하던 자가 추격하는 자가 되어 영향력과 능력을 갖추고, 반전의 인생을 살아가게 되리라고 야곱도 축복하고 모세도 축복하셨습니다.

역전을 이루려면 몇 가지 요건이 필요합니다. 운동 경기에서 초반에 점수를 잃었다 하더라도 역전을 꿈꾸려면 그 경기를 놓아서는 안 됩니다.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감독도 선수도 끝까지 해 보아야 합니다. 경기를 그냥 포기해 버리면 상대는 훨씬 수월해집니다. 끝까지 경기를 붙들고 늘어져야 역전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갓에게 주신 축복도 같은 맥락입니다. 도리어 너는 군대를 추격하는 자가 될 것이다. 너의 인생이 힘겨울지라도, 저주스러울지라도, 삶의 자리를 놓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붙들고 가라는 말씀입니다.

붙들고 갈 뿐 아니라, 끝까지 견고하게 버텨내야 합니다. 그 자리를 지키고, 그 자리에 머물러야 합니다. 힘들고 치사해도 그 자리에서 버텨내야 합니다.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역전을 이루신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빌라도(Pilatus)와 헤롯(Herodes) 같은 자들,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 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들이 승리했다고 환호했을 것입니다. 이제 예수가 없으니 마음대로 세상을 다스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침 뱉음을 당하시고, 온갖 수치와 모욕과 구욕을 당하셨습니다. 채찍질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옷을 벗김 당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모욕당하신다고 그냥 가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거기서 떠나 버리셨다면 역전의 능력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덤까지 내려가셨습니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그곳에서 부활하셔서 역전의 드라마를 완성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입니다. 우리 인생에 어려움이 있습니까? 고난이 있습니까? 버텨야 합니다. 붙들고 견뎌내야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떤 정신으로, 어떤 자세로 버티고 이겨내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길을 가면 됩니다. 예수님이 그 길을 버텨내신 것은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오기로 버티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나보다 더 독한 사람, 나보다 더 강한 자를 만나면 우리는 버티기 어렵습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7)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의 장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수치와 모욕을 견디고 참아내신 이유는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참으시고,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견디어 내셨습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인생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신앙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온갖 고난과 위기와 어려움이 닥쳐와도,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십자가 지셨다는 이 사실 한 가지를 붙들고 믿음 생활을 이어 나가야 합니다. 믿음 생활을 떠나면 역전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삶의 반전을 기대하십니까?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희망을 꿈꾸고 싶다면, 믿음의 자리에서 굳게 머물고 지켜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면, 예배 공동체를 떠나면, 신앙의 자리를 떠나면 우리에게는 어떤 역전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기쁨으로 왕을 섬기는 삶, 아셀의 축복

"아셀에게서 나는 먹을 것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수라상을 차리리로다" (창 49:20)

아셀도 레아의 몸종 실바가 낳은 둘째 아들입니다. 아셀이라는 이름의 뜻은 '기쁨'입니다. 실바가 이 아들을 낳자 레아가 '너는 기쁨이 되라' 하고 아셀이라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아셀도 갓과 마찬가지로 기쁘지 않았습니다. 철이 들고 보니 자신은 아버지의 기쁨이 되지 못합니다. 아버지는 자신을 보고 기뻐하지 않습니다. 본체만체합니다. 아버지가 내 이름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 번도 불러 준 적이 없을 정도입니다. 나도 아버지의 기쁨이 되지 못하고, 아버지를 통해서도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환경과 상황, 내가 가진 조건 그 어느 것 하나 기쁘지 않은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야곱이 아셀에게 하신 이 축복이 아셀 지파의 후손 가운데 이루어지게 됩니다. 복음서에서 아셀 지파의 자손 중 가장 위대하고 유명한 분이 있으니, 바로 안나 할머니입니다.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눅 2:36-37)

대략 계산해 보면, 20세에 결혼하여 7년간 남편과 함께 살았다면 27세에 남편을 여의고 과부가 됩니다. 그리고 84세가 되었으니 대략 57년 동안 성전에서 금식하며 기도하고 성도들을 섬긴 것입니다. 좀 더 일찍 결혼했다면 60년 가까이 성전에서 섬긴 셈입니다.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이 정도로 오랫동안, 그것도 지속적으로 성도들을 섬기고, 성전에서 금식하고 기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 가지 직분을 가지고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섬기는 데에는 비결이 있습니다. 마음속에 감출 수 없는 내적 기쁨이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에게 믿음이 없는 친구들이 묻습니다. "월급 받고 일하느냐? 교회 가면 돈을 주느냐? 도대체 얼마를 받길래 그렇게 열심히 일하느냐?" 한 푼도 받지 않고, 경제적 이익이 하나도 없고, 오히려 자기 물질과 시간을 써가면서도 그렇게 오랫동안 섬길 수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마음속의 내적 기쁨 때문입니다.

안나 할머니의 환경은 기쁘지 않았습니다. 7년간 남편과 함께 살다가 성전에서 그토록 오래 섬겼다는 것은 자녀가 없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일찍 과부가 되었고, 새 출발도 하지 않았습니다. 환경을 보면 기쁠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성전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섬길 수 있었던 이유는 구원받은 기쁨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기쁨, 그 기쁨이 말로 다할 수 없어서, 그 기쁨을 표현할 길이 없어서 주의 전에서 섬긴 것입니다.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마음속에 넘쳐나는 기쁨이 있어서 섬기는 것입니다.

아버지 야곱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아셀을 보면서 이런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너의 이름이 기쁨인데, 너의 환경과 상황을 보니 기뻐할 일이 없었겠구나. 그러나 너는 기쁨의 인생을 살아가라. 왕의 수라상을 차리는 사람이 되라. 이 축복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안나 할머니가 84세까지 성전에서 섬기다가 메시아를 만납니다. 난지 8일 만에 성전에 할례 받으러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 아기 예수님을 안아보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왕 중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품에 안아보고 하나님께 찬양드렸습니다. 기쁨으로 살았더니, 그 옛날 야곱이 예언한 그대로 왕을 맞이하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Paulus)은 빌립보서 4장 4절에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는 로마(Roma) 감옥에서 쓴 서신입니다. 언제 끌려 나갈지 모르고, 콜로세움(Colosseum)에서 검투사의 칼에 죽을지, 맹수의 밥이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감옥에 있으면 기쁘지 않습니다. 환경이 어떻게 기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감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감옥에 있든지, 배를 타고 전도하러 다니든지, 편안한 들판에 있든지, 그는 언제나 주 안에 있었습니다. 주님 안에 있기 때문에 기뻤습니다. 주님 안에 있는 자는 지금 죽더라도 천국에서 눈을 뜰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환경을 돌아봅니다. 정치 환경을 보면 기쁘지 않고, 경제 환경을 보면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가정의 자녀들을 보면 소망보다 걱정이 앞서고, 노년과 미래를 보면 염려가 더 많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오면서 모든 것이 완벽하게 행복했던 적이 있었습니까? 흠 하나 없이 완벽했던 시간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한두 가지씩은 늘 불편하고 힘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까닭은 주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 있으면 환경이 힘겨워도, 주변이 절망스러워도, 구원받은 기쁨이 우리를 벅차게 만듭니다. 그 기쁨이 넘쳐오르면 하루 새롭게 돋아나는 태양이 행복하고, 오늘 하루가 기쁨으로 가득 찹니다.

자유와 찬양의 인생, 납달리의 축복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이라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도다" (창 49:21)

납달리는 빌하가 낳은 둘째 아들입니다. 빌하는 라헬의 몸종이었습니다. 라헬은 언니 레아가 아들 넷을 낳을 때까지 자녀를 낳지 못하여, 자기 몸종 빌하를 남편에게 주었습니다. 빌하를 통해 첫째 단과 둘째 납달리가 태어났습니다. 납달리라는 이름의 뜻은 '다툼', '경쟁', '싸움'입니다. 왜 아들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을까요? 라헬의 속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이제 언니가 아들 넷을 낳았는데 나도 여종을 통해 둘을 낳았으니 언니와 겨루어 볼 수 있게 되었다, 경쟁할 수 있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싸워 보겠다는 투쟁심이 그대로 묻어나는 이름입니다.

납달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그를 사로잡는 운명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경쟁하는 자, 싸워야 하는 자라는 굴레입니다. 라헬과 레아의 다툼에서 대리전의 희생양이 납달리였고, 빌하와 실바 사이의 경쟁에서도 희생양은 납달리였습니다. 경쟁이 얼마나 사람을 피폐하게 만듭니까? 싸우면 이겨야 하고, 지면 피해가 더 큽니다. 납달리는 어릴 때부터 그런 인생을 살았고, 그것이 그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자신의 인생은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매순간 가정에는 갈등과 다툼과 싸움이 있었고, 여인들끼리의 싸움, 형제들 사이의 다툼 속에서 평생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성인이 된 후 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배다른 형제 가운데 맏아들이었던 르우벤이 자신을 낳아 준 어머니 빌하와 동침하는 사건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습니다. 납달리의 마음에 어떤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배다른 형제이지만 르우벤을 향한 살인의 충동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어머니에 대해서도 분노와 배신감과 절망감이 솟아올랐을 것입니다. 자신을 낳아 준 부모가 부끄럽고, 어디 가서 입에 올릴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집안사람 모두가 알고 있는 이 수치심이 납달리의 발목을 붙잡았습니다. 태어나 보니 경쟁 관계에서 시작되었고, 자라 보니 도덕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져 부모가 민망하고 부끄러웠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이 아들에게 말합니다.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이라." 이제 자유하라. 너를 붙들고 있는 출생의 운명으로부터 자유하고, 너를 붙들고 있는 분노로부터 벗어나라. 놓인 암사슴처럼 멀리멀리 뛰어다니고, 저 높은 산을 향하여 마음껏 비상하고 달려가라. 아버지의 축복입니다.

이것이 말처럼 쉬운 일입니까? 우리를 붙들고 있는 죄의 권세는 강력합니다. 내 발목을 잡고 있는 사탄의 세력은 거셉니다. 거기서 자유하는 것은 예수의 능력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십자가 보혈의 능력이 아니면 죄의 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자기도 알지 못하는 내면 깊은 곳에 발목 잡혀 있습니다. 죄의 짐이 나를 붙들고 있고, 내가 지은 죄가 오히려 나를 찔러 수치가 됩니다. 나와 상관없이 부모가 저지른 일 때문에 고개를 들 수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자유하라, 너는 놓인 암사슴이니 마음껏 뛰어다니라, 자유롭게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죄가 너를 붙잡지 못하게 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었으니, 십자가의 능력으로 자유를 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유한 인생이 누리는 기쁨을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 하나님이 힘으로 내게 띠 띠우시며 내 길을 완전하게 하시며 나의 발을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 활을 당기도다" (시 18:32-34)

시편 18편은 다윗이 사울의 손에서 완전히 벗어난 후에 지은 시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얼마나 오랫동안 괴롭혔습니까? 사울 때문에 되는 일이 없었고, 매일 죽음의 골짜기를 넘나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사울에게서 완전히 벗어난 후 하나님께서 내 발을 암사슴 발 같게 하셨다, 이제 자유를 얻어 하나님이 나를 높은 곳에 두셨다, 내가 이제 놋 활을 당기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자유한 자에게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습니다. 본문은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도다"라고 말합니다. 아름다운 소리, 곧 찬양입니다. 노래와 찬양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노래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기쁘면 기쁜 감정을, 슬프면 슬픈 감정을 표현합니다. 그런데 찬양은 다릅니다. 내 감정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높여 드리는 것이 찬양입니다. 내가 슬퍼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절망 가운데 있어도 전능하신 하나님은 찬양받기에 합당하기 때문에 찬양합니다. 납달리의 인생이 절망적이었지만,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셔서 자유케 하셨고, 자유를 얻은 자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결론

우리는 대부분 여백 같은 존재들입니다. 세상이 별로 알아주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집에서도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고 말하고, 직장에서도 존재감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슬퍼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이런 우리에게 역전의 은혜를 주십니다. 갓에게 약속하신 것처럼, 군대의 추격을 받던 자가 도리어 추격하는 자로 변하는 역전을 선물하십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말씀하시며, 아셀에게 약속하신 것처럼 환경이 기쁘지 않아도 왕의 수라상을 차리는 기쁨을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납달리에게 약속하신 것처럼 우리를 죄에서 자유하게 하셔서, 놓인 암사슴처럼 마음껏 뛰어다니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십니다. 여백 같은 존재인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미 있는 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존재감 없고 쓸모없는 존재라 여겼던 우리에게, 빈칸 같고 여백 같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역전을 선물하십니다. 사랑으로 버티고 견뎌내면, 갓에게 주셨던 역전의 은혜를 우리에게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니, 끝까지 견뎌내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상황은 기쁘지 않지만, 주 안에 있으라 하시며 기쁨을 선물하시겠다 하시오니, 주여 우리가 주 안에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우리를 붙잡고 있는 세력들이 있습니다. 죄의 권세가 발목을 잡고 환경이 우리를 끝까지 끌어가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권세로 이제 우리가 놓임을 받습니다. 우리는 놓인 암사슴이 되겠습니다. 주여, 놓인 암사슴의 찬양을 받아 주시옵소서. 환경을 따라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홀로 영광받으실 하나님을 온전히 찬양하기 원하오니, 이 찬양을 향기로 받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