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강 /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49:22-26)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본문: 창세기 49:22-26

고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Ovidius)는 『변신 이야기』에서 소문의 여신 파마(Fama)를 등장시킵니다. 이 여신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교차하는 지점, 바다와 대지와 하늘이 맞닿는 곳에 궁전을 세웠습니다. 궁전 꼭대기에는 수천 개의 통로와 입구가 뚫려 있었는데, 단 하나의 문도 달려 있지 않았습니다. 소문이 빠르게 왕래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비디우스가 이 이야기를 통해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첫째, 소문은 어떤 군왕도 어떤 권력자도 막을 수 없을 만큼 강력하기에 신의 자리까지 격상시킨 것입니다. 과거를 통해 현재로, 미래로 흘러가는 소문,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이 사람에서 저 사람에게로 넘어가는 소문을 어떤 권력자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둘째, 소문의 파괴력입니다. 과거에 퍼진 소문이 현재에도 위력을 발휘하고 미래까지 지배합니다. 셋째, 소문에는 뿌리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악의적인 소문이 어디서 왔는지 알 길이 없으나, 그 소문을 만들어내는 근원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묵상하면서 믿음의 사람들의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악한 소문은 이토록 빠르고 왕성하며 파괴력을 지니는데,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이처럼 민첩하게 움직이고 있는지, 선한 일에 이만한 열심을 다하고 있는지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악한 소문에도 그 숙주가 되는 뿌리가 있다면, 우리 믿음의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고 살아 숨 쉬게 만드는 그 뿌리는 과연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은 야곱이 아들 요셉을 축복하는 장면입니다. 아버지 야곱은 아들의 번성을 바라보면서, 그 뿌리가 하나님께 있었다고, 말씀에 있었다고 선언합니다.

샘 곁에 내린 뿌리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창 49:22)

아버지의 눈에 비친 아들의 인생은 무성한 가지와 같았습니다. 여기서 '무성하다'는 히브리어 '파라'에서 온 말로, 단순히 이파리만 무성한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다, 결실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열매가 가득한 가지가 담을 넘어갔습니다. 이것은 아들 요셉의 삶을 축약한 한 폭의 그림입니다. 가나안 땅 헤브론의 시골 소년이었던 요셉이 당대 초강대국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으니, 그의 인생의 가지가 담을 넘어간 것입니다. 담을 넘어간 그 가지의 열매는 보는 이들에게도 좋았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그 열매를 먹고 힘을 얻었으며, 행복과 생명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야곱이 주목한 것은 열매가 아니었습니다. 이 많은 열매를 맺고 있는 가지가 어떻게 담을 넘어갈 수 있었는가, 바로 그 뿌리에 주목했습니다. 아버지가 뿌리를 살펴보니, 뿌리가 샘 곁에 있었습니다. 성경은 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봅니다. 영원토록 마르지 않고 솟아나는 샘물 같은 하나님의 말씀, 요셉의 인생은 바로 그 말씀 가운데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그의 가지가 높이 올라가 담을 넘어서 많은 사람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사람들을 복되게 만드는 좋은 나무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정신입니다.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렘 17:7-8)

더위에도 나무가 걱정 없고 가뭄이 오더라도 그 잎이 청청하며 열매를 풍성히 맺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생의 열매에서 중요한 것은 뿌리입니다. 그 뿌리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두고 있는가 아닌가가 관건입니다. 영원토록 솟아나는 샘물 같은 하나님 말씀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 열매는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 인생의 걱정거리들을 떠올려 봅니다. 많은 사람이 염려합니다. 수십 년 한평생을 살았는데 열매가 없다고,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열매도 없어서 자랑할 거리가 없고, 비가시적인 열매도 없어서 내면을 만족시키지 못한다고 한탄합니다. 나는 왜 열매가 없을까, 그래서 열매 때문에 걱정하고 염려하며, 열매를 맺기 위해 힘을 쓰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거꾸로 생각해야 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뿌리가 시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뿌리만 튼튼하면, 인생의 뿌리가 샘 곁에 있기만 하면, 하나님 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살기만 하면, 아무리 땅 위가 메마르고 상황이 좋지 못하더라도 열매는 걱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환경을 탓합니다. 정치적인 상황, 경제적인 상황, 주변의 불편한 여건들을 탓합니다. 세상이 이래서, 환경이 이래서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뿌리가 깊이 내려가 있는 사람들을 보면, 땅 위가 가물고 메마른 땅이라 하더라도 염려가 없습니다. 그 뿌리가 하나님 말씀과 깊이 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인생이 그러했습니다. 아버지가 보신 그대로, 샘 곁에 뿌리가 내려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이겨냈습니다. 그가 정욕이 없는 사람이어서 이겨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올바른 도덕적 인물이어서 그 유혹을 견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뿌리가 하나님 말씀에 깊게 내려가 있었기 때문에 견디고 이겨낸 것입니다. 감옥에서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 고통을 견딜 수 있었던 까닭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 세상이 말하는 입지전적 성공을 거두었을 때에도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성공에 도취되지 않았던 까닭은, 그의 뿌리가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뿌리가 어디에 내려가 있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말씀에 뿌리를 두어야 우리는 좌우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3장에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네 가지 땅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 땅은 길가와 같은 마음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은 단단하게 다져집니다. 거기에 말씀의 씨앗이 떨어져도 뿌리를 내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우선순위를 두지 않고 자신이 하는 일에 매여 분주하게 다니는 사람, 그런 마음에는 하나님 말씀이 뿌리를 내릴 수 없으니 열매 맺는 인생이 될 수 없습니다.

두 번째 마음은 흙이 얕은 돌밭입니다. 말씀의 씨가 떨어져 뿌리를 내리지만, 조금 더 내려가다 보니 큰 바위를 만납니다. 돌을 뚫을 수 없어서 금방 마르고 맙니다. 우리 마음 깊은 곳에 걱정과 염려와 근심이 가득 차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를 내리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세 번째 마음은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입니다. 가시떨기는 세상의 염려, 물질을 향한 욕심, 재리의 유혹입니다. 이런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면 가시의 기운이 세어 말씀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만듭니다.

좋은 땅이란 무엇입니까? 우선순위가 하나님 말씀에 정리된 사람, 길가와 같은 분주한 마음이 아니어야 하고, 마음속의 걱정과 염려라는 돌들도 제거해야 하며, 가시떨기도 뽑아내야 합니다. 좋은 땅에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면 자라서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매를 맺으라고 명령하신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뿌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샘 곁에 뿌리를 두고, 하나님 말씀에 뿌리를 두고 살아야 열매 맺는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열매를 맺고 싶습니까? 사람마다 맺고 싶은 열매의 종류가 다릅니다. 그런데 어떤 열매를 원하든지 본질은 한 가지입니다. 샘 곁에 뿌리를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뿌리를 두고 그 말씀을 중심으로 살다 보면, 때가 되어 하나님이 허락하신 귀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나도 행복하고, 주님도 기뻐하시고, 주변 사람들도 복되게 할 날이 올 줄로 믿습니다.

전능자의 손을 힘입은 활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창 49:23)

요셉의 인생을 야곱이 가만히 바라보니, 활 쏘는 자가 그를 학대했습니다.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습니다. 저격수들이요 자객들이었습니다. 어쩌다 활이 빗나간 것이 아닙니다. 적개심을 품고 정조준했습니다. 요셉을 향하여 그의 생명을 빼앗기 위해 화살을 날렸습니다. 그런 자들이 요셉 주변에 많았습니다.

먼저 요셉의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요셉에게 채색옷을 지어 입혀 열한 번째 아들을 장자로 세우려 하자, 불만을 품은 형제들이 그를 은 이십에 이집트로 팔아버렸습니다. 열일곱 살 소년을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만큼 먼 곳으로 내보낸 것입니다. 적개심을 가지고 학대하며 쏜 것입니다. 보디발의 아내도 있었습니다. 요셉을 유혹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죄를 뒤집어 씌워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바로의 궁전에서도 편안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로가 요셉을 총리로 세웠으니, 주변 신하들이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었을 리 없습니다. 한번 걸리기만 해 봐라, 한번 미끄러지기만 해 봐라, 눈을 시퍼렇게 뜨고 그의 실각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적개심을 가지고 화살을 쏘려는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서 요셉은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대처했습니까?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창 49:24)

요셉이 대응 사격을 했다는 말입니까? 돌을 던졌다는 뜻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었다는 것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겼다는 뜻입니다. 그의 팔은 도리어 굳세고 힘이 있었습니다. 권능이 있었고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를 대적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더 큰 화살을 쏠 수 있었고, 칼을 뺄 수도 있었습니다. 그의 지위가 왕 바로 아래가 아닙니까? 그런데 그는 원수를 갚지 않았습니다. 팔에 힘이 있었으나 그 팔로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어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탁했습니다.

자기를 팔아치운 형제들을 향한 그의 고백을 봅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창 45:7-8)

요셉은 형제들에게 원수를 갚지 않았습니다. 형제들을 만나자마자 감옥에 집어넣지 않았습니다. 유다를 통해 그들의 회개가 확인되자 화해하고, 이집트로 가족 전부를 초대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헛되이 힘을 쓰지 않았습니다.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다는 소식에 가장 두려워했을 사람이 누구였겠습니까? 아마 보디발의 아내였을 것입니다. 왕 아래 최고의 권력을 가진 사람이 되었으니, 자기가 한 짓을 생각하면 집안이 끝장났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고 살았기 때문에, 힘과 권력이 있으나 그것을 함부로 행사하지 않은 것입니다.

요셉은 왜 그렇게 했습니까? 권력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영원한 권력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시간 동안 위임받은 권력입니다. 그렇다면 위임받은 권력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요셉은 자기가 가진 권력으로 사람을 살리는 데 힘을 썼습니다. 기근을 극복하고 풍년을 관리하는 일에 자신의 힘과 권력을 쏟아부었습니다. 개인적인 원한을 갚는 일에 자신의 권력을 쓰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어떻습니까? 보잘것없는 힘이라도 가지면 세상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권력의 칼을 휘두르지 않습니까? 위정자들이 그러하고, 우리 자신이 그러합니다. 하나님께 부여받은 시간 동안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을 복되게 하라고 받은 것인데, 그것을 가지고 사람을 괴롭히고, 때로는 갑질도 하고, 사람들을 힘겹게 합니다. 가정의 부모는 하나님께 받은 자녀들을 돌보고 키우는 일을 해야 하고, 교회 중직자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며 백성들을 돌보는 일을 해야 합니다. 위정자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거꾸로 합니다. 맡겨주신 양 떼를 돌보지 않고 그 위에 군림하려 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행위입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에게 연설하니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거늘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행 12:21-23)

헤롯은 불신자였지만 믿지 않는 자들의 권력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가 연설을 하자 주위의 간신들이 대단하다고 추켜세웠습니다. 그러자 헤롯은 스스로 자기가 신인 양 교만해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 모양을 보시고 그를 치셔서 생명을 거두어 가셨습니다. 권력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요셉은 이 사실을 알았기에, 하나님께 받은 권력을 두려움으로 사용했습니다. 백성을 살리고 섬기는 일에 써야지, 사사로이 원한을 갚는 일에 쓸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손은 그 칼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는 데 쓰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질, 권력, 힘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에 써야 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사람을 괴롭히고 그 위에 군림하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복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창 49:25)

이 말씀을 읽으면서 어디에 먼저 눈이 갑니까? 요셉이 하늘의 복도 받고, 깊은 샘의 복도 받고,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까지 받았다는 사실에 눈이 갈 것입니다. 그 복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요셉 자손인 므낫세와 에브라임 지파가 어떤 복을 받았는지 우리의 관심은 거기로 향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아버지께로 말미암나니',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바로 이 부분입니다. 복의 기원이 어디로부터인가, 복의 출처가 누구로부터인가를 아버지 야곱이 선언하고 있습니다. 요셉아, 너에게 주어진 복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네가 받은 복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기원한 것이니, 하나님이 복 주시는 분이심을 잊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살면 삶이 단순해집니다. 생각이 복잡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물질을 주시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복된 것입니다. 그 물질이 많고 적음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니 그 자체가 복입니다. 고난을 당하더라도 그 고난도 복이 됩니다. 고난을 통과한 이후에 하나님이 부활의 영광을 주실 것이니, 하나님이 주신 고난이라면 얼마든지 견디고 이겨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복도, 고난도, 내 생명도,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다윗도 이러한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시 16:2-3)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시 16:6)

다윗이 고백했습니다.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고, 하나님 한 분이 자기 복의 근원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이 고백 이후에 다음 고백이 이어집니다. 땅에 있는 모든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자기 백성이 존귀하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백성 중에 존귀한 자만 있었습니까? 요압 장군이 다윗에게 존귀한 자였습니까? 그는 다윗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시므이 같은 사람은 다윗이 쫓겨나 도망칠 때 욕을 퍼붓고 돌을 던졌습니다. 존귀한 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시니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모든 백성은 존귀한 자들이라고 고백합니다. 때로는 가슴을 후벼 파는 사람들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자들이니 그들은 모두 존귀합니다.

다윗이 계속 고백합니다. 주께서 줄로 재어 주신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다고 했습니다. 자기 영토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보다 훨씬 아름다운 곳이 조금만 더 내려가면 있었습니다. 농사짓기 좋고 비옥한 나일강 평원이 있는 이집트입니다. 그러나 다윗에게 그 땅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땅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줄로 재어 주신 땅, 그것이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기 때문에 그 땅도 귀하고 사람도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사람 때문에 불평이 많습니다. 배우자, 자녀, 가족 모두에게 원망이 많습니다. 살아가고 있는 땅과 일터에도 원망이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셨다고 고백하는 순간, 그 원망은 사라집니다. 하나님께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생이 단순하고 깨끗한 인생입니다.

"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 없음 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 (창 49:26)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온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자에게 하나님이 복에 복을 더하여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결론

우리 삶의 뿌리는 샘 곁에 있어야 합니다. 내 인생의 복의 기원은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요셉의 가지가 담을 넘을 수 있었던 비결은 화려한 전략이나 탁월한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샘 곁에 내린 뿌리,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힘이 있어도 그 힘을 사사로이 쓰지 않으며, 복이든 고난이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고백하는 삶, 이것이 요셉의 삶이었고, 다윗의 고백이었습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의 뿌리를 점검합니다. 내 뿌리는 어디에 내려가 있습니까? 세상의 성공에, 사람들의 인정에, 물질의 풍요에 뿌리를 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샘 곁으로 뿌리를 옮겨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인생, 그 인생의 가지는 반드시 담을 넘어 많은 사람을 복되게 할 것입니다. 이 고백이 우리를 더욱 복되게 할 줄로 믿습니다.

기도

은혜가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샘 곁에 뿌리를 두겠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뿌리를 두고 살기를 원하오니 아버지 하나님,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무성한 가지가 담을 넘어가는 복은 그 뿌리에 달려 있다고 하셨사오니, 우리의 뿌리를 매번 점검하게 하옵소서.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게 하여 주옵소서.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고 그의 팔은 힘이 있었으나, 전능자이신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었습니다. 주여, 우리도 하나님께 모든 심판을 맡깁니다. 주님 함께하여 주옵소서. 복의 기원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사람을 주셨든지, 어떤 일을 주셨든지, 모든 것 하나님께 받은 것이니 감사의 고백을 올려 드리오니, 주님 우리를 기뻐 받아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