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강 / 베노니에서 베냐민으로 (49:27)

베노니에서 베냐민으로

본문: 창세기 49:27

오늘날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체제 아래 시장 경제를 운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자유롭고 편안하게 살아온 시간이 꽤 오래된 것처럼 느껴지지만,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는 왕정 국가였습니다. 비단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을 비롯한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가 왕이 다스리는 체제였습니다. 왕정 국가에서 왕조를 구성하고, 그 왕조가 오래도록 지속되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최대 목표이자 사명이었습니다.

가까운 중국만 보더라도 성공한 왕조는 손에 꼽힙니다. 한족이 세운 명(明)나라가 276년, 여진족이 세운 청(清)나라가 296년 동안 존속했으니, 300년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고려 왕조는 474년, 조선 왕조는 518년 동안이나 이어졌습니다. 이처럼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500년 가까이, 혹은 500년 이상 왕조가 이어져 올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아무런 문제가 없어서, 평안해서가 아닙니다. 고려 왕조 시절을 돌이켜 보면 몽골 제국의 원(元)나라가 끊임없이 고려를 괴롭혔습니다. 고려는 그 힘겨운 시간을 모두 통과하고 견뎌냈습니다. 조선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두 번에 걸친 외란이 있었습니다. 임진왜란이 있었고 병자호란이 있었습니다. 두 차례의 전란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백성들은 그것을 버텨내고 이겨냈습니다.

결국 고난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 고난을 어떻게 극복하고 이겨내느냐가 관건입니다.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날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33년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 33년의 인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난으로 점철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탄생하시자마자 헤롯(Herod)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사람을 보내고 군대를 보냈습니다. 예수님은 부모님과 함께 이집트로 피신까지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살펴보면, 언제나 그분의 말씀을 듣고도 죽이려 하는 자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주님은 십자가 형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십자가를 피해 가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를 돌아가지 않으셨습니다. 정면으로 십자가를 돌파하고 통과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무덤까지 내려가셨습니다. 그리고 무덤에서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은 고난을 피해 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권능의 오른팔이 사랑하는 아들을 무덤에서 건져내셨습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며, 마음속에 부활 신앙을 가지고 사는 자들 아니겠습니까?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고난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려운 일, 고난, 각종 환난이 닥칠지라도 예수님처럼 부활 신앙을 가지고 이를 견디고 이겨내야 한다는 뜻입니다. 고난은 피해가는 것이 아니라 돌파하는 것이며, 부활 신앙으로 결국 승리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어떻게 하면 고난을 이기고 돌파하며 극복할 수 있는지, 부활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 (창 49:27)

이 말씀이 어떻게 읽히십니까? 내가 만약 베냐민이라면, 아버지 야곱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 마지막으로 남긴 이 말씀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 했습니다.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는 자라 했습니다.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결코 복된 말씀이 아닙니다.

슬픔의 이름, 은혜의 이름

아버지 야곱은 왜 막내아들 베냐민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이를 이해하려면 베냐민의 탄생을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네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창 35:17-18)

라헬이 난산했습니다. 라헬은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아내였습니다. 그런데 라헬은 평생 아이를 갖는 것이 그토록 어려웠습니다. 첫째 아들 요셉을 낳은 후에도 또 아들을 갖고 싶었지만,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에게 아들을 주셨습니다.

문제는 출산의 시기였습니다. 라반의 집에서 살다가 세겜으로 올라오고, 세겜에서 벧엘로 갔다가, 벧엘에서 헤브론으로 가는 길, 에브랏 곧 베들레헴으로 가는 도중에 그만 산기가 닥쳤습니다. 그런데 그 출산이 난산이었습니다. 산파가 옆에서 붙어 조금만 힘을 내라고 합니다. 조금 더 견뎌 보라고 합니다. 정신이 혼미해집니다. 이제는 더 이상 숨을 참을 수 없고 견딜 수 없다고 느낍니다. 내 영혼이 떠나는구나 하는 것을 이 여인이 느낍니다. 그때 라헬이 자기가 낳은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고 불렀습니다. '슬픔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어머니의 입장에서 보면 이 아들은 베노니가 맞습니다. 그토록 고대하고 기대하고 사랑했던 아들을 낳았는데, 한 번 젖을 물려 볼 수가 없었습니다. 아들의 입장에서도 태어나기는 태어났는데, 파고들 어머니의 품이 없습니다. 자신을 키워 주고 울타리가 되어 줄 어머니가 없습니다. 위로는 형이 열한 명이나 있지만,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형은 요셉 하나뿐이었습니다. 나머지 열 명의 형제는 모두 배다른 형제들입니다. 앞으로 이 아들이 겪어야 할 일들이 구만리 같았습니다.

이보다 더 무거운 짐이 있습니다. 이 아들이 자라면서 철이 들면, 반드시 깨닫게 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내 생명과 어머니의 생명이 맞바꾸어졌다는 것입니다. 내가 태어나면서 어머니는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입니다. 이 아들이 사는 동안 죽음의 그림자가 늘 뒤를 따라옵니다. 내가 태어났는데 어머니는 떠나셨다는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마음속에 공존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오늘 이 시대에 예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은 모두 슬픔의 아들, 베노니들입니다. 우리가 태어났고,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죄를 지었고,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없이, 그리스도 없이, 구원의 주님 없이 살다 보면 우리 삶의 마지막은 결국 둘째 사망입니다. 살아 있으나 산 것이 아니요, 숨 쉬고 있으나 이미 우리의 영혼은 사탄에게 담보 잡힌 영혼입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인생들은 모두 슬픔의 아들 베노니들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일상은 어떻습니까? 일터에서 열심히 일하고 수고합니다. 그런데 수고하는 것만큼의 결과를 거두지 못합니다. 세상에는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나 있습니다. 피땀 흘려 수고하지만 수고의 열매를 마음껏 누리지 못하는 세상, 슬픔의 세상입니다. 내 주변 사람들을 돌아봐도 나에게 기쁨이 되는 이보다 오히려 나를 찌르고 슬프게 하는 이가 훨씬 많습니다. 온 세상을 살펴보면, 피조물의 신음 소리와 고통 소리가 온 우주를 가득 채워 뒤흔들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슬픔의 세상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그냥 가만히 두면 우리 모두는 베노니로 살게 됩니다.

그런데 아버지 야곱은 이 아들의 눈에 보이는 현실이 베노니이지만, 그 이름을 슬픔의 아들이라고 평생 부르고 싶지 않았습니다. 네가 어머니 없이 태어나 살아갈 일이 구만리 같고 평생 슬픔의 아들로 살아야 하겠지만, 나는 너의 이름을 슬픔의 아들로 부르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그의 이름을 베냐민이라고 불러 주었습니다.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전능의 오른손으로, 하나님의 강한 손과 펴신 팔이 너를 이끌어 주시고 인도하실 것이다. 너에게 어머니는 없지만 하나님의 강한 손과 펴신 팔이 있지 않느냐? 네 눈에 흐르는 눈물을 하나님의 오른손이 닦아 주실 것이다. 부디 슬픔의 아들 베노니로 살지 말고, 오른손의 아들 베냐민으로 살아가라. 이것이 아버지의 기대였습니다.

이것은 오늘 부활주일을 맞이하며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부활 신앙이 없는 자들은 모두 베노니입니다. 천국 소망을 가지지 못하고 이 땅에서 한탄하고 슬퍼하며 사는 사람들은 모두 슬픔의 세상에 발을 담그고 사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능의 팔과 오른손을 의지하고 사는 오른손의 아들들은 부활 신앙을 가진 자들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천국 소망이 있다면, 부활 신앙이 있다면, 어려움을 정면으로 돌파하고 사망 권세를 깨뜨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살아간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오른손의 아들들 아니겠습니까?

이리의 본성, 본능의 함정

그런데 아버지 야곱은 왜 세상을 떠나기 직전 마지막 말씀으로 막내아들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다시 27절 말씀을 살펴봅니다.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 네가 만약 베노니로 살면 너는 이렇게 되고 말 것이다. 나는 너를 베냐민으로 키웠는데, 네가 하나님의 오른손의 아들로 살지 않고 어머니가 부른 대로 베노니로 살면, 너는 이리 같은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이것은 경고의 말씀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권능의 오른손을 붙들고 의지하는 베냐민이 되어 살아가라는 당부입니다.

그렇다면 이리의 특징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첫째, 이리는 본능에 충실합니다. 야수의 본능입니다. 먹이가 있으면 놓치지 않습니다. 잡으면 물어뜯습니다.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습니다. 끝까지 쫓아가 남의 것을 빼앗아 옵니다.

베냐민 지파 후손들 중에 이러한 이리 같은 본성을 가진, 본능에 충실한 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사울 왕입니다. 그는 객관적으로 볼 때 슬픔의 아들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행한 일을 살펴보면, 본능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루는 사무엘 선지자가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아말렉 진멸 명령은 사람만 죽이라는 것이 아니라 전리품을 하나도 취하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고대의 전쟁은 전리품 전쟁입니다. 고대 사회는 재화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나라와 나라가 전쟁하면 반드시 승리한 쪽이 적의 창고를 모조리 털어가야 끝나는 전쟁이었습니다. 백성도 인질로 잡아오고, 재화를 모두 가져와야 비로소 전쟁이 끝났습니다. 그런데 전쟁은 하되 전리품을 취하지 말라,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을 가볍게 무시했습니다. 전리품을 모두 가져왔습니다. 자기 눈에 좋은 것, 양과 소와 나귀와 염소를 모조리 챙겨 왔습니다. 사무엘이 분노하여 찾아와 책망하자, 사울은 천연덕스럽게 거짓말까지 합니다.

"사울이 이르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하는지라" (삼상 15:15)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해 남겨 놓은 것이라고, 하나님이 모두 진멸하라고 하셨는데 그런 거짓말을 합니다. 사울은 본능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본능과 하나님의 말씀이 충돌할 때, 믿음의 사람들은, 베냐민들은, 하나님의 오른손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의 본능을 눌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본능을 누르지 못하는 자들이 베노니들입니다.

부활 신앙을 가지지 못하고 사는 자들, 본능에 충실한 자들, 하나님의 오른손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경험과 능력과 생각만을 주장하며 살아가는 자들, 그런 자들은 마음속에 일어나는 본능대로 살지 않습니까? 사울은 혈통으로는 베냐민 자손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는 일을 보면 오른손의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베노니였습니다. 그의 창고가 가득 차야 슬픔이 위로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전리품을 가득 가져와야 이 슬픔의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도 그런 자가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닌 제자였지만, 오른손의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돈을 좋아하여 은 삼십에 예수를 팔아버렸습니다. 물질을 향한 본능에 충실했습니다. 베드로는 또 어떻습니까? 베드로는 생존 본능에 충실했습니다. 위기에 처하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도망가 버렸습니다. 성령 받기 전의 베드로가 바로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우리 속에 부활 신앙이 있다는 것은 본능을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겨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오른손을 의지하는 베냐민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약자를 짓밟는 자, 정의를 세우는 자

이리의 두 번째 특징은 약자를 집요하게 공격한다는 것입니다. 사울을 보십시오. 사울은 절대 강자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절대 약자였습니다. 모든 것을 갖춘 공권력의 왕이 아무것도 없는 다윗을 십수 년 동안 쫓아다녔습니다. 국가 권력을 동원하여 군대를 풀어 다윗을 이 잡듯 뒤졌습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끝까지 짓밟았습니다.

더 심각한 일이 있었습니다. 다윗을 불쌍히 여겨 숨겨 준 사람, 먹을 것을 제공한 사람, 무기를 제공한 제사장들을 가만히 두지 않았습니다.

"왕이 도엑에게 이르되 너는 돌아가서 제사장들을 죽이라 하매 에돔 사람 도엑이 돌아가서 제사장들을 쳐서 그 날에 세마포 에봇 입은 자 팔십오 명을 죽였고 제사장들의 성읍 놉의 남녀와 아이들과 젖 먹는 자들과 소와 나귀와 양을 칼로 쳤더라" (삼상 22:18-19)

제사장 85명을 죽였습니다. 제사장들은 무장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칼도, 창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한 일이라고는 다윗을 도운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제사장 85명을 칼로 쳐 죽였습니다. 약한 자를 집요하게 공격하는 것, 이것이 이리의 특징입니다.

반면에 사울은 골리앗(Goliath) 앞에서는 꼼짝도 못했습니다. 골리앗이 40일 동안 조석으로 자기 몸을 드러내며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고 하나님을 욕보였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골리앗 앞에서 한마디도 못했습니다. 나가서 대항하거나 칼을 들고 겨루지도 못했습니다. 강한 자 앞에서는 전면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약한 자에게는 끝까지 짓밟는 자, 이것이 이리의 특징입니다.

슬픔 속에 있는 자들, 살아남기 위해 정의도 없고 윤리도 없고 도덕도 없이 사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른손의 아들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붙들고 살아가야 할 가치들이 있습니다. 사람이라면 지켜야 할 가치,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성도라면 붙들고 살아야 할 윤리와 절대적 진리의 가치들이 있습니다. 이를 붙들고 살아가는 오른손의 아들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 신앙의 백성들입니다.

혈통은 베냐민 지파 자손이었지만 행동은 베노니로 살았던 사울, 그와 반대로 같은 베냐민 지파 자손 중에 오른손의 아들로 살아간 사람이 있습니다. 모르드개입니다.

모르드개는 페르시아(Persia) 시대를 살았습니다. 남유다가 멸망하고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이후, 그 바벨론마저 망하고 페르시아가 집권했을 때, 그곳 어느 한 구석에서 살아가던 자가 모르드개입니다. 모르드개는 사촌 여동생 에스더(Esther)를 거두었습니다. 에스더는 부모를 일찍 여의고 사촌 오빠와 함께 살았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모르드개야말로 슬픔의 아들 아닙니까? 나라가 없습니다. 돈도 없습니다. 페르시아 왕궁 대궐문을 지키는 말단 문지기 관료에 불과했습니다. 직책도 가장 하급 관료였습니다. 그야말로 슬픔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한 일을 보십시오. 사촌 여동생 에스더가 왕후가 된 후, 하만(Haman)이라는 자가 등장합니다. 하만이 모든 사람에게 자기 앞에 엎드려 절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 절은 단순한 예를 갖추는 것이 아니라, 이방 신에게 무릎 꿇고 섬기는 것과 같은 행위였습니다. 모르드개는 무릎을 꿇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인데 어떻게 이방 신을 섬기듯 무릎을 꿇을 수 있겠느냐며 거절했습니다.

하만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모르드개 한 사람만이 아니라 유다인 전체를 죽이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때 모르드개가 모든 백성에게 금식 기도를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망설이는 에스더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에 4:13-14)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떨쳐 일어나 왕에게 이 사실을 고하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권능의 오른손을 의지하는 오른손의 아들들이 되자, 우리 조상의 이름처럼 오른손의 아들이 되자는 것이 모르드개가 던진 메시지였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국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승리했습니다.

결론

사울과 모르드개를 비교해 보십시오. 객관적으로 누가 슬픔의 아들입니까? 모르드개입니다. 사울은 모든 것을 가진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이라는 직책이 그를 오른손의 아들로 만들지 못했습니다.

부활은 객관적이면서도 주관적입니다. 객관적이라 함은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뜻입니다. 누가 보더라도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승천하셨으며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다스리고 계십니다. 부활이 주관적이라 함은 우리 속에 부활 신앙이 살아 숨 쉰다는 뜻입니다. 그 주관적 확신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 신앙을 가슴에 새기고 살아가는 오른손의 아들들만이 가지는 것입니다.

베냐민 지파에 수많은 자손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사울 같은 사람도 있었고 모르드개 같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오늘 이 땅의 수많은 교회 가운데, 많은 성도 가운데도 사울 같은 사람이 있고 모르드개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부활이 관념적으로만 머무르는 사람이 있고, 부활이 주관적 사실이 되어 내 속에서 살아 꿈틀거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본능에 자신을 내던지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물어뜯는 이리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뒷전으로 하고 본능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본능을 누르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의지하여 사는, 부활 신앙에 기초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약한 자를 짓누르고 정의 없이 사는 사람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부활 신앙을 붙들고 살아가는 자로서,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오른손의 정의가 언제나 살아 숨 쉬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부활 신앙을 온전히 살아내고 실천하며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있고 해서는 안 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부활 신앙을 삶의 모든 자리에서 온전히 살아내고 실천하며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우리 속에 부활의 기쁨과 부활의 능력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베냐민이라는 위대한 이름을 가졌지만 베노니로 살면 사울처럼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본능에 충실한 사울 같은 인생, 강한 자에게 비굴하고 약한 자에게 권력을 휘두르는 비겁한 사울처럼 살지 않겠습니다.

주여, 우리 속에 부활의 능력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오른손의 아들이 되어 하나님 앞에 말씀대로 살아가며 하나님의 정의를 붙들고 살아가는 지혜로운 자,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자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비록 삶의 자리는 힘겨웠지만 하나님의 오른손을 의지했던 모르드개처럼, 주여 우리에게도 깨어 있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오늘 이 부활주일을 맞이하면서 다시 한번 결단합니다. 오른손의 아들들이 되겠습니다. 베노니로 살지 않겠습니다. 슬픔을 이겨내고 극복하겠습니다. 우리 속에 부활하신 예수의 능력이 살아 숨 쉬고 있사오니, 우리는 세상을 이기는 사람으로 살겠습니다.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