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강 / 분량대로 (49:28)

분량대로

본문: 창세기 49:28

고대 로마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로마 황제의 권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강력하지 못했습니다. 로마가 통치하는 지역이 광대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한다 하더라도 저 먼 끝에 있는 속주까지 황제의 권력이 미치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권력을 유지하고자 했던 황제들이 운영한 제도가 있습니다. 이른바 답서(答書, Rescriptum) 제도입니다. 지방의 권력자들이나 부호들이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면, 황제가 그 아래에 친필로 자신의 의견을 적어 답변을 보내주는 것이 답서 제도입니다.

그런데 강력한 주권을 추구하는 황제일수록 편지를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를 먼저 살폈습니다. 그 사람이 지방의 실세라면 입맛에 맞는 답을 해주고,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 여겨지면 대충 답을 했습니다. 이것이 로마 황제가 권력을 유지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황제마다 차이는 있었지만 대략 1년에 약 천 통의 답신을 써야 했다고 하니, 황제도 고단한 직업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렇게 중앙집권 체제를 공고히 하고 권력을 유지하는 황제도 부지런해야 합니다. 1년에 천 통의 답신을 쓰려면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겠습니까? 이 사람이 지방의 실세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는 정보력도 있어야 하고, 때로는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도 품을 수 있는 넓은 마음도 있어야 합니다. 현대의 권력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재 권력도 혼자 통치하는 것이 아닙니다. 독재에 부역하는 사람들이 있고, 여러 사람의 도움이 있어야 독재도 가능합니다. 독재자조차 제대로 통치하려면 폭이 넓어야 하고, 분별력이 있어야 하며, 많은 사람을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권력도 자신의 그릇이 커야 하고 분량이 넓어야 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일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들은 두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모두가 보석 같은 존재

오늘 본문에는 '분량대로'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우리의 분량은 어느 정도인지, 이 '분량대로'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피고 부족한 것을 채우며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이삭은 야곱에게 축복했습니다. 야곱은 그의 열두 아들에게 축복합니다. 세상을 떠나기 전 열두 아들을 침상 앞에 불러놓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복을 줍니다. 그런데 야곱이 축복한 이 아들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뉩니다. 첫째 부류는 축복이지만 사실상 책망, 혹은 저주에 가까운 말씀을 받은 아들들입니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가 그들입니다. 둘째 부류는 격려와 미래적 비전을 받은 아들들입니다. 주로 여종의 아들들이 그러했습니다. 존재감 없이 살았던 그들에게 야곱은 세상을 떠나기에 앞서 힘내라 격려하며, 움츠리지 말고 날개를 펴서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독려합니다. 셋째 부류는 복다운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유다와 요셉이 바로 그 두 사람입니다.

이렇게 각양 다르게 마지막 말씀을 하신 이후에, 창세기 기자는 결론을 이렇게 내립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창 49:28)

이 말씀에서 우리는 중요한 두 가지 교훈을 깨닫습니다. 첫째,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고 했습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는 사랑받은 아들도 있고, 큰 업적을 남긴 아들도 있습니다. 요셉이 아버지의 사랑을 얼마나 많이 받았습니까? 유다는 형제들을 화해하게 한 큰 업적을 세웠습니다. 유다의 희생으로 인해 요셉과 형제들이 하나가 되고, 온 가족이 이집트(애굽)에 이주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 아들이 있는가 하면, 사랑받지 못하고 책망받은 아들도 있고, 큰 잘못을 저지른 아들도 있으며, 존재감이 전혀 없었던 아들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어떤 아들이든 이 열두 아들 모두가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큰 업적을 세우고 놀라운 일을 한 사람이 위대한 사람이 되고, 보잘것없고 업적이 없으며 아버지에게 미움받은 사람은 사라져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결단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 열두를 똑같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조상으로 세워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보석들은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대로 열둘이라 보석마다 열두 지파의 한 이름씩 도장을 새기는 법으로 새기고 순금으로 노끈처럼 땋은 사슬을 흉패 위에 붙이고" (출 28:21-22)

대제사장의 의복을 규정하는 말씀입니다. 대제사장이 입는 옷 중에 에봇이라는 조끼 같은 옷이 있고, 에봇 위에 판결 흉패를 붙이는데, 그 흉패 위에 열두 개의 보석을 두라고 하셨습니다. 세 개씩 네 줄, 모두 열두 개입니다. 그 보석에 이스라엘 각 지파의 이름을 새깁니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 스불론, 잇사갈, 갓, 단 등 열두 이름을 모두 새기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대제사장의 가슴속에 이스라엘 각 지파 모두가 보석 같은 존재라는 뜻입니다. 대제사장이 1년에 단 한 번 지성소에 이 옷을 다 입고 들어가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 모든 자손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는 날이 있습니다. 그날 온 백성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 1년간 지은 죄를 회개하고 쏟아낼 때, 대제사장이 그들을 가슴에 품고 지성소 안으로 들어갑니다.

인간 대제사장이 그때 들어갔으나, 후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슴에도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모든 자손이 보석처럼 새겨져 있고, 모든 하나님의 자녀가 보석처럼 살아 숨 쉬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버지는 어떤 아들을 차별할 수 있습니다. 귀한 아들도 있고 업적을 세운 아들도 있으며, 존재감이 없고 미미한 자식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보석 같은 존재로 여기십니다. 보잘것없어도, 존재감이 없어도 보석 같은 존재입니다. 여종이 낳은 자식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비할 수 없이 존귀한 보석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대제사장의 의복에서부터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시 133:1-2)

대제사장이 이 옷을 입고 있는데, 그 머리에 기름을 붓습니다. 아론의 머리에 부은 기름이 수염을 타고 흘러내리고, 가슴을 타고 흐릅니다. 가슴에는 열두 보석이 박힌 흉패가 있습니다. 이 기름이 열두 보석 하나하나를 타고 흐릅니다. 그 기름은 열두 보석 중 어느 하나도 건너뛰지 않습니다. 차별하지 않습니다. 소외시키지 않습니다.

다윗이 성전에 올라가며 부른 노래가 바로 이 시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성전에 올라가 예배드립니다. 업적을 쌓은 아들도 있고, 잘못을 저지른 자식도 있고, 존재감 없고 미미한 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령의 기름을 부으시면 누구에게든, 어떤 사람에게든 한 사람도 건너뛰지 않으시고, 한 사람도 소외시키지 않으십니다. 유다와 요셉 같은 형제도 있고, 모자란 사람도 있으며, 르우벤과 시므온, 레위처럼 잘못을 저지른 형제도 있습니다. 그 형제들이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데, 성령께서 기름을 부으시면 누구도 건너뛰지 않고 누구도 소외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입니다.

은혜의 자리에 머무는 힘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실 때 은혜를 받으려면,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조상들처럼 보석같이 여김을 받으려면, 거기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야곱의 장막에 거하고 머물러 있어야지, 도망가고 떠나 버리고 박차고 나가 버리면 기회가 없습니다.

르우벤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르우벤은 야곱의 장남입니다. 그런데 굴욕을 많이 당했습니다. 아버지는 르우벤을 제쳐두고 요셉에게 채색옷을 지어 입혔습니다. 아버지 야곱의 선택은 요셉이었고, 하나님의 선택은 유다였습니다. 두 번이나 밀려난 아들입니다. 르우벤은 분한 마음에 아버지의 침상을 범하는 큰 죄를 저질렀고, 아버지께 크게 책망받습니다. 호되게 꾸중을 듣고,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르우벤은 집을 나가지 않았습니다. 은혜의 자리에 그냥 버텼습니다. 머물러 있었습니다. 형제들이 그를 얼마나 업신여겼겠습니까? 죄 짓고 손가락질 당하면서도 르우벤은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은혜의 자리를 박차고 나가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 자리에 머물렀습니다.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휘둘렀습니다. 사람을 학살하고 살해했습니다. 아버지께 크게 책망받았습니다. 그런데 기분이 나쁘다고 떠나지 않았습니다. 더럽고 치사하다고 박차고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에 그대로 붙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요 15:5). 예수님이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가지입니다. 가지에게 능력이 있습니까? 가지는 그냥 가지일 뿐입니다. 가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나무 되신 주님께 붙어 있는 것뿐입니다. 그것이 가지의 능력입니다. 가지들 중에는 많은 열매를 맺는 튼튼한 가지도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열매를 달아도 부러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연약한 가지도 있습니다. 바람이 불면 부서져 버릴 것 같은 부족하고 모자라고 연약한 가지도 있습니다. 그런데 연약하다고 해서 거기서 떨어져 나오면 안 됩니다. 붙어 있어야 합니다. 끝까지 붙어 있으면 나중에는 그 연약한 가지에도 힘이 생깁니다. 나무가 거기에 힘을 줍니다. 그 연약한 가지에도 열매가 맺힙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은혜롭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버티는 것이 힘이고, 견디는 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요구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학벌 있고 능력 있는 제자들을 원하셨다면 갈릴리 어부들을 부르실 일이 없습니다. 돈 많은 사람들을 부르실 것이었다면 로마에 얼마나 많은 부자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그런 자들을 택하신 것이 아니라, 잘 견디고 버티고 견뎌낼 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믿음이란 내가 가진 능력을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뎌내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가만히 버티고 견디며 믿음 안에, 은혜 아래 머물고 거하다 보면, 하나님은 열두 지파의 조상으로 세우신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은혜 주시고 복 주시며 세우실 날이 옵니다. 그날을 기대하며 은혜 아래 머무르시기 바랍니다.

무릎 꿇음이 곧 복의 분량

본문 28절을 다시 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창 49:28)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이 말씀을 읽으면 언뜻 그릇이 먼저 떠오릅니다. 요셉이나 유다 같은 사람은 그릇이 커서 하나님께서 복을 쏟아부어 주시고 그 복을 다 받아 누렸을 것이고, 스불론, 잇사갈, 납달리, 갓, 아셀 같은 아들은 그릇이 작아서 복을 조금밖에 받지 못했을 것이며, 르우벤이나 시므온이나 레위 같은 아들은 그릇이 깨져서 아무리 복을 주셔도 다 새어 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이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히브리어로 '케 베라카'라고 되어 있습니다. '케'는 '~에 따라서'라는 전치사이고, '베라카'는 '복'이라는 뜻입니다. 문자 그대로 옮기면 '복을 따라서 축복하셨더라'는 말입니다. '베라카'라는 명사의 동사형은 '바라크'입니다. '무릎을 꿇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시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사 복되게 하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날입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날을 하나님은 거룩하게 하시고 복되게 하셨습니다. 구약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복은 바로 무릎 꿇음에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주시는 메시지이자 정신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을 다시 읽으면,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것에 따라서 복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무릎 꿇음이 곧 복이 됩니다. 무릎 꿇는 만큼 우리의 그릇이 넓어집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엎드리는 만큼 하나님께서 그릇을 넓게 하시고, 쏟아부으실 복을 준비해 주십니다.

지금까지 함께 살펴본 것처럼 구약의 예언은 확정된 말씀이 아닙니다. 만약 성경에 나오는 모든 예언이 절대 불변한 확정된 말씀이라면, 성경은 운명론이 되고 맙니다. 예언의 말씀은 크게 두 부류입니다. 첫째는 심판이요, 둘째는 축복입니다. 심판의 말씀이 르우벤에게도, 시므온과 레위에게도 주어졌습니다. 많은 선지자가 심판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이 심판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처럼 돌이키지 않고 그대로 살면 심판받을 것이라는 경고이며, 돌이키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돌아오면 회복시키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니느웨에게 하나님은 심판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가 복음을 전했고, 니느웨 백성이 돌이켰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철회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축복의 말씀, 유다에게 주시고 요셉에게 주신 능력과 은혜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다나 요셉이 그 다음부터 엉망으로 살아도 그 복을 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처럼 살면 약속하신 복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은혜의 말씀 위에 집 짓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 말씀대로 복 받고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살면, 약속하신 복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무릎을 꿇는 데 따라서 축복하였더라.' 열려 있는 말씀입니다.

이 사실을 하나의 실례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끌고 시내산 아래까지 가셨습니다. 시내산 아래에 이르자 하나님은 민족의 지도자 모세를 산꼭대기로 불러 올리십니다. 하나님과 모세가 그곳에서 40일 동안 교제합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십계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올라간 채 내려오지 않자, 산 아래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버립니다. 우상숭배가 벌어졌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빨리 내려가 보라고 말씀하셨고, 모세가 십계명 두 돌판을 가지고 내려오다가 그 광경을 보고 돌판을 던져 박살 내버립니다. 십계명의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이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인데, 그 십계명을 받고 있는 바로 그 현장 산 아래에서 우상 숭배가 벌어졌으니, 모세가 얼마나 분노했겠습니까?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렇게 선포합니다.

"이에 모세가 진 문에 서서 이르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가는지라" (출 32:26)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란 어떤 자들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 숭배할 때 우상에게 무릎 꿇지 않은 자, 우상 숭배에 가담하지 않은 백성입니다. 그때 레위 자손이 모세에게 나아갔습니다. 레위 자손은 백성이 우상 숭배하는 그 시간에 하나님 앞에 무릎 꿇었지, 우상 앞에 무릎 꿇지 않았습니다. 무릎 꿇는 만큼 복이 된다고 하셨고, 그것이 그들에게 분량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레위 자손을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우상 숭배한 자들을 처단하게 하셨고, 그 자리에서 죽은 자가 삼천 명이 넘습니다.

이때부터 하나님께서 레위 자손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원래 야곱을 통해 레위에게 주신 예언의 말씀은 이것이었습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창 49:5-6)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Shechem) 사람들을 학살한 사건을 야곱이 이렇게 책망한 것입니다. 자기 분노대로, 자기 혈기대로 살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돌이켰습니다. 적어도 레위는 돌이켰습니다. 레위는 하나님 편 앞에 서게 되었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레위 지파에게 복을 주십니다.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 태를 열어 태어난 모든 맏이를 대신하게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민 3:12)

이때부터 레위 지파가 제사장 지파가 됩니다. 하나님은 원래 야곱의 입을 통해 그들을 책망하고 저주에 가까운 말씀을 하셨지만, 그 저주를 바꾸어 복이 되게 한 것이 바로 레위 자손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편이 되며, 우상 앞에 무릎 꿇지 않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한 것이 그들에게 큰 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동할 때 광야에서 그들의 어깨에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고 갑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섬기는 자가 됩니다. 성전에서 수종 드는 자들이 됩니다. 대를 이어 레위 자손 중에서 대제사장이 태어납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 레위 자손이 언약궤를 메고 먼저 요단강에 발을 담그니 요단강이 멈추어 섭니다. 다윗 시절, 솔로몬 시절에 성전에서 찬양하는 자들이 모두 레위 지파 사람들이었습니다.

결론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 복 받은 자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복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좋은 부모를 만나 좋은 교육을 받고,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 유산을 많이 상속받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복은 있다가도 없어지는 복입니다. 우리가 받아 누릴 수 있는 복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 그 자체입니다. 무릎 꿇는 만큼 그것이 복이 된다고 하셨으니, 우리는 무릎 꿇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엎드리며 무릎 꿇어서,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복을 분량대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 분량은 한정이 없습니다. 무릎 꿇는 만큼 그 모든 것이 우리에게 복이 됩니다. 이 복을 사모하며 기도하고 무릎 꿇어서, 하나님의 은혜로 화가 바뀌어 복이 되고 저주가 바뀌어 축복이 되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함께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잘난 아들도, 못난 아들도, 존재감 없는 아들도 그 자리에 붙어 있기만 하니 하나님은 그들을 이스라엘 열두 지파로 세우셨습니다. 주님, 우리는 잘난 것이 없습니다. 모두 연약하고 부족한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죄가 있어도, 문제가 있어도 떠나지 않고, 연약하고 부족해도 주 안에 있으니 주께서 우리를 기억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은혜도 주시고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이제 우리가 분량대로 축복받기를 원합니다. 기도가 우리의 분량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열심히 기도하고 엎드리게 하시며, 하나님의 편에 서게 하시고, 기도하고 엎드려서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