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리니
본문: 창세기 49:29-50:13
플로렌스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은 1820년에 태어나 1910년까지 살았던 영국의 인물입니다. 90년이 넘는 긴 생애를 살았던 그를 우리는 흔히 '백의의 천사', '간호학의 창시자' 정도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 정도로만 나이팅게일을 파악한다면, 이 위대한 인물에 대한 온전한 이해와는 거리가 멉니다. 나이팅게일은 탁월한 통계학자이자 수학자이기도 했습니다. 1800년대 초반 영국 빅토리아(Victoria) 시대, 여성의 사회 참여가 극단적으로 제한되어 있던 때에 그는 귀족 출신 부모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라틴어와 헬라어를 배웠고, 작문과 여행을 통해 견문을 넓혔습니다.
스물아홉이 되던 1849년, 나이팅게일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를 방문하여 현대적 간호 체계의 부재를 절감하고, 본국에 돌아와 직접 간호학을 배우기로 결단합니다. 귀족 부모의 반대를 뚫고 독일로 건너가 현대 간호학을 수학한 후, 1853년 런던 여성 병원의 간호부장이 됩니다. 마침 그해 크림전쟁(Crimean War)이 발발하자, 수녀들과 함께 야전 병원에 자원하여 투입됩니다. 열악한 위생 체계와 엉망인 행정 속에서 46%에 달하던 사망률을, 위생과 행정 체계의 개혁을 통해 2%까지 낮추는 혁혁한 성과를 거둡니다. 귀국 후 그는 방대한 데이터를 통계적으로 정리하여 이른바 '나이팅게일 장미 도표'를 만들어 정치인과 병원을 설득했고, 1858년 여성 최초로 영국 왕립통계학회 정회원이 됩니다. 간호 전문 병원과 학교를 설립하고 전문 서적을 출간하며, 간호학이라는 분야를 독보적인 전문 직업의 위상으로 끌어올렸습니다. 1907년에는 메리트 훈장(Order of Merit)까지 받았으며, 오늘날까지 국제적십자위원회가 나이팅게일상을 제정하여 그를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꺼낸 까닭은 한 사람의 인생을 한 가지 면으로만 평가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나이팅게일은 위대한 간호사인 동시에 행정가였고, 사회사업가였으며, 통계학자이자 수학자였고, 사회 변혁의 운동가였습니다. 한 사람을 한 가지 면으로만 판단하면 반드시 오류가 생깁니다. 다면적으로, 입체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야곱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창세기 50장 가운데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인물이 야곱입니다. 우리는 야곱을 어떤 인물로 알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야곱을 거짓말쟁이요 사기꾼이라 말합니다.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여 축복을 가로챈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야곱을 영적 야망과 갈망이 탁월했던 인물이라 말합니다. 보이지 않는 영적 축복을 위해 장자권에 모든 것을 건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야곱을 사랑의 사람이라 말합니다. 14년 동안 한 여인을 위해 종살이 할 만큼 한결같은 사랑을 보여준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를 기도의 용사라 부릅니다.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과 씨름하여 '야곱'이라는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뀐 사건이 이를 증명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를 편애의 아이콘이라 말합니다. 요셉과 베냐민을 유독 사랑하고 다른 형제들에게는 무관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어느 것 하나 틀린 평가는 없습니다. 모두 야곱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만 그 하나의 평가만으로 야곱을 온전히 볼 수 없습니다. 야곱은 그만큼 입체적이고 다양한 인물입니다.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우리가 부모를 바라보는 관점은 어떻습니까? 혹시 한 가지 면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어린 시절 받았던 상처 하나로 부모를 평가하고, 지금껏 가슴에 새겨 놓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보다 한 세대, 두 세대 위의 어른들은 나라를 빼앗겼던 일제강점기를 살았습니다. 전쟁을 경험했습니다. 전쟁 이후 대한민국은 전 세계 최빈국이었습니다. 극도의 가난 속에서 살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만약 입장을 바꿔서 우리가 부모 세대를 살았더라면, 우리 자녀를 그만큼 길러 낼 수 있었겠습니까? 그만큼 버텨 내고 견뎌 낼 수 있었겠습니까?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세월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무뚝뚝하게, 치열하게 살아서 자녀에게 살갑지 못했던 것도, 배우지 못하고 가지지 못해서 때로는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던 것도, 모두 그 시대가 남긴 상처입니다. 어떻게 한 가지 모습만으로 우리 부모를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한 사람을 볼 때는 다양한 면을 바라보는 관점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 지점을 알려 줍니다. 야곱의 마지막 장면에서, 평소 볼 수 없었던 야곱의 모습이 자녀들 앞에 드러납니다. 그 모습은 자녀들에게 크나큰 위로이자 힘이 되었습니다.
혈기의 사람에서 순종의 사람으로
"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되 내가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 (창 49:29)
야곱은 자녀들에게 "돌아가겠다"고 말합니다. '돌아가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사프'는 '모으다', '소집하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누가 소집한다는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147년의 인생을 살아온 야곱을 이제 부르시는 것입니다. 태초에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그 호흡을 거두어 가실 때가 되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소집에 응하겠다고, 하나님 앞에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다고 자녀들 앞에서 고백합니다.
이것이 야곱의 유언이었습니다. 그 이전에 야곱은 자녀들을 불러놓고 축복을 베풀었습니다. 때로는 축복을, 때로는 권면과 위로를, 때로는 책망을 쏟아 냈습니다. 이제 마지막 유언을 남기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습은 자녀들에게 대단히 낯선 것이었습니다. 자녀들이 알고 있는 아버지 야곱은 전성기 때 혈기 넘치던 인물이었습니다. 한 가지 일에 꽂히면 절대로 놓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붙들고 관철시킬 때까지, 내 손에 넣을 때까지 끝까지 버텨 내는 인물이었습니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셔도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해 뿌리 박고 서 있던 사람이 야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런 야곱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철저하게 순종하겠다는 종말 신앙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종말 신앙이란 대단한 경지입니다. 이 세상을 떠날 때가 가까이 왔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하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의 죽음, 나의 마지막을 인정하는 이 고백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누구나 세상을 떠날 것을 알고 있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다가오면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불안에 사로잡힙니다. 죽음 앞에서 자신의 존재가 허물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성령으로 함께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의 문턱을 넘어가기가 그토록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6장에서 "성령이 오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군왕도 심판을 피해 가지 못합니다. 모두가 심판받고 죽어야만 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시면 종말 신앙이 생깁니다. 성령이 내 마음에 임하시면, 나는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부르심에 순종하게 됩니다. 야곱이 이 마지막에 종말 신앙을 가진 것을 보면, 성령께서 그를 이끌고 계셨음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자녀들에게 큰 귀감이 됩니다. 아버지의 달라진 모습을 본 것입니다. 지난날을 기억하는 자녀들에게 이 모습은 대단히 생경하면서도, 한편으로 깊은 은혜가 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의 마지막도 이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생을 살다 보면 자기 고집대로, 자기 의지대로 삽니다. 그 고집과 의지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문제를 일으킬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말년이 되어 갈수록, 이 세상을 떠날 때가 가까워질수록, 자기 혈기를 끊고 욕심을 내려놓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엎드리는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모습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자녀들에게 새로운 도전을 줍니다. 달라진 부모의 모습, 달라진 사람의 모습은 많은 이에게 귀감과 은혜가 됩니다.
인생의 말년이 이렇게 정리되기를 바랍니다. 끝까지 하나님과 화해하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 욕심대로 발을 뻗치고 고집을 부리다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우리도 하나님과 화해하고, 약해진 모습이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영광이 되며, 자녀들에게 은혜가 되기를 바랍니다.
편애의 아버지에서 위로의 아버지로
야곱의 신앙 고백이자 유언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의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 곳에 장사하였노라" (창 49:30-31)
야곱은 자녀들에게 자신을 애굽에 묻지 말고, 조상들과 레아가 묻혀 있는 막벨라 굴에 묻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막벨라 굴은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 돈을 주고 산 것입니다. 아내 사라의 매장지를 마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곳에는 아브라함과 사라, 야곱의 부모인 이삭과 리브가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가족묘인 것입니다.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레아가 이미 그곳에 안장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레아는 야곱에게 어떤 존재였습니까?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아내였습니다. 야곱이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라헬이었습니다. 14년 동안 라헬을 위해 종처럼 일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라헬은 에브랏 길에서 베냐민을 낳다가 세상을 떠났고, 그 유골은 에브랏 길에 그대로 장사되었습니다. 야곱이 마음만 먹었다면, 라헬의 유골을 막벨라 굴로 옮겨 묻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녀들의 관심이 어디에 쏠려 있었겠습니까? 아버지가 유언을 남길 때 어디에 묻어 달라고 하실까, 이것이 초미의 관심사였을 것입니다. 아마 모든 자녀는 이렇게 예상했을 것입니다. 평생 사랑하고 뜨겁게 아꼈던 라헬의 곁에 묻어 달라고, 에브랏 길에 묻어 달라고 말씀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은 빗나갔습니다. 야곱은 레아가 있는 막벨라 굴에 자신을 묻어 달라고 말합니다.
야곱이 이렇게 말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이미 천국을 소망하는 야곱에게 어디에 묻히느냐는 사실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자녀들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자녀들에게 사과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평생 동안 레아의 자녀로 태어난 죄로, 르우벤을 비롯한 여섯 명의 아들들, 레아의 몸종 실바의 자녀들까지 얼마나 고통받았습니까? 편애의 고통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습니다. 편애는 상처를 낳고, 그 상처는 또 다른 깊은 상처를 낳습니다. 끊임없이 상처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평생 동안 아버지는 그들에게 상처를 주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떠나기 전에, 아버지는 자녀들을 위로합니다. 이것이 야곱의 방식이었습니다. 미안함을 표현하는 방식, 사과를 전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말 한마디 하지 않고, 평생 자녀를 아프게 하면서도 미안하다는 사과 한 번 없이 눈을 감아 버리면, 자녀들의 상처는 어디에서 위로받겠습니까? 누구에게서 보상받겠습니까? 자녀들은 아버지에게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바라는 게 아닙니다. 미안하다는 그 한마디면 충분합니다.
아버지 야곱의 나이 147세, 자녀들의 나이도 100세 언저리입니다. 세상을 살 만큼 살았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인생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니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자녀들 손을 잡아 주면서 미안했다는 한마디만 해 주면, 그것으로 고마운 것입니다. 야곱은 그 표현을 이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레아를 먼저 막벨라 굴에 모셔 놓고, 나를 그 곁에 묻어 달라고. 살아서는 너희 어머니에게 사랑 한 번 제대로 해 주지 못했지만, 그것이 미안하다고. 자녀들에게 그 미안함을 위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마지막 정리가 이래야 합니다. 자신이 헝클어 놓은 인생, 자신이 망쳐 놓은 자녀들의 인생, 자녀들에게 남긴 상처를 아버지가 한마디만 해 주면 위로가 됩니다. 그 한마디의 표현이 자녀들에게 위로가 됩니다. 돌아가실 때 이렇게 하시는구나, 그것이 위로가 됩니다. 물론 그 상처가 여전히 생채기로 남아 있을지라도, 자녀들에게는 이것이 위로가 됩니다.
우리 인생을 마무리하기 전에, 가까운 사람들에게 주고받은 상처가 있지 않습니까? 가깝기 때문에 부모는 자녀에게, 자녀는 부모에게, 부부끼리도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을 해결하고, 정리하고, 끝내 주어야 합니다. 상처를 상처로 남겨 둔 채 뒤돌아서 버리면, 그것은 영원히 해결되지 않는 숙제로 남습니다. 야곱의 마지막이 이러했습니다. 그의 뒷모습이 하나님과 화해하고 자녀들을 위로합니다. 편애의 아버지가 위로의 아버지로 변한 것입니다.
천국 소망이 빚어낸 하나 됨
야곱이 세상을 떠난 후, 요셉을 중심으로 아버지의 장례가 준비됩니다. 아버지의 유언대로 요셉과 형제들이 애굽을 떠나 가나안 땅 막벨라 굴에 아버지의 유골을 모시기 위해, 바로 왕의 허락을 받아 먼 길을 떠납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아버지가 그들에게 명령한 대로 그를 위해 따라 행하여 그를 가나안 땅으로 메어다가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사서 매장지를 삼은 곳이더라" (창 50:12-13)
이 말씀을 통해 중요한 교훈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녀들이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의 자녀들, 열두 아들이 이처럼 하나 된 적은 이전에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면서 아무런 잡음이 없었습니다. 막벨라 굴에 묻어야 한다 아니다, 에브랏 길에 장사해야 한다, 아버지의 유언이 본심이 아니다, 이런 논쟁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나가 되어 아버지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했습니다. 분열되지 않았고, 나뉘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분열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아버지 야곱 덕분입니다. 아버지가 하나님과 화해했습니다. 자기 고집을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의 소집에 응하겠다고 철저하게, 겸손하게 종말 신앙을 가졌습니다. 자녀들을 위로했습니다. 그러니 자녀들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이 자녀들은 어머니가 네 명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하나인데 어머니가 넷이니, 서로 다투고 나뉘고 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달라지니 자녀들이 다투지 않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바라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내가 떠나고 나면 너희끼리 화목하게 지내 달라, 다투지 말고 싸우지 말고, 서로 하나 되어 하나님 잘 섬기며 살아가라. 이것이 부모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그런데 많은 유산을 남겨 준다고 그것이 이루어집니까? 유산을 많이 남기면 돈 때문에 싸웁니다. 부모의 명예를 넘겨주어도, 그 명예는 부모의 것이지 자녀의 것이 아닙니다. 자녀에게는 부담스러울 뿐, 그것이 자녀를 하나 되게 하지 못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하나 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과 소통하고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자녀들 마음속에 있는 상처를 위로해 주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그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면, 자녀들은 다투지 않고 분열되지 않습니다.
자녀들은 아버지의 다른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경험했던 아버지는 편애의 아버지였고, 고집 센 아버지였으며, 하나님의 명령에도 순종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는 아버지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그들이 본 아버지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야곱이었고,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위로하는 아버지였습니다. 전혀 다른 모습을 본 것입니다. 그 모습이 그들에게 위로가 되었고, 그 모습 때문에 다투지 않고, 나뉘지 않고, 하나가 된 것입니다.
둘째로 발견해야 할 교훈은, 야곱이 천국 소망을 자녀들에게 남겼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이 말년에 살았던 곳은 애굽입니다. 130세에 이주하여 147세까지 17년을 살았습니다. 노예로, 천민으로 산 것이 아닙니다. 아들 요셉이 총리였습니다. 바로 왕궁에도 초대받아 가 보았습니다. 최고위층 부자로서 모든 것을 다 누리고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야곱은 애굽에 묻히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땅, 조상의 묘실이 있는 막벨라 굴에 묻어 달라고 합니다.
물론 막벨라 굴은 이 땅에 있는 장소이니 그 자체가 궁극적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땅이 지닌 상징이 있습니다. 바로 천국입니다. 아무리 좋은 애굽 땅이라 하더라도 그곳은 죄악의 도성입니다. 이 땅은 우리가 영원히 머물 곳이 아닙니다. 믿음의 백성은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야곱이 마지막에 막벨라 굴을 소망한 것은, 자녀들에게 천국을 소망하라는 메시지를 남겨 준 것입니다. 애굽에서 잘 누리며 사느냐, 형제가 총리라서 배부르게 살고 있느냐, 그러나 여기에 안주하지 말라. 이 땅을 떠나 천국에서 눈을 떠야 할 사람이니,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라. 이것을 아버지 야곱이 보여 준 것입니다.
다윗도 같은 고백을 합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 23:6)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왕궁에 살았고,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말 한마디면 안 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소망했던 곳은 여호와의 집이었습니다. 이 땅은 나에게 완전한 곳이 아니니, 내가 진정 바라고 소망하는 곳은 천국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늘 소망을 가진 자,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는 모두 하늘을 소망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히 11:15-16)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한 성입니다. 이 땅과 비교할 수 없는 크고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있는 그 성, 다윗이 거했던 궁전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의 자리, 야곱이 부자로 살았던 애굽 왕궁보다 놀라운 천국이 우리의 소망이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부모는 자녀에게 천국 소망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화해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고, 자녀에게 상처를 남긴 채 떠나서는 안 됩니다. 부모의 달라진 모습을 자녀들이 입체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옛날 상처를 주셨던 부모의 모습, 그 각인된 모습만 보지 말고, 그들의 삶의 형편을 따라, 그 시대적 아픔을 따라 부모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이 훨씬 넓어지지 않겠습니까?
야곱의 달라진 모습은 자녀들을 분열시키지 않고 하나 되게 했습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우리도 하나님과 화해하고, 자녀를 위로하며, 천국 소망을 물려주는 부모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 다양한 모습이 자녀들을 하나 되게 하고, 모두가 행복한 믿음의 가정과 가문을 이루어 가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어버이주일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147년을 사는 동안 자기 고집과 편견과 아집으로 뭉쳐 있었던 야곱이, 마지막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겠다고 자신을 내려놓고 고백합니다. 이런 야곱의 모습이 자녀들에게는 생경한 모습이었지만, 그들에게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레아를 막벨라 굴에 먼저 장사하고 나도 그곳에 묻히겠다고 고백하는 야곱의 이 말이 자녀들의 상처를 위로했습니다. 주여, 오늘 우리도 이렇게 달라진 모습으로 세상 떠날 준비를 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모습이 자녀들에게 어떻게 비추어졌는지 살피고 돌아보게 하옵시고, 완악하고 고집 센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부모가 되게 하옵시며, 자녀들 마음에 있는 아픔을 치유해 주는 부모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자녀로서 부모를 봅니다. 부모 세대에 있었던 여러 가지 모습들, 수용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했던 모습을 그 시대의 아픔으로 수용하고 받아들이게 하옵시고, 이제는 우리도 믿음의 가문을 온전히 이루어서, 분열되지 않고 나뉘지 않는 아름다운 믿음의 가정을 세워 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