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본문: 창세기 50:14-26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에는 수많은 철학자와 사상가가 활동했습니다. 그 가운데 독보적인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묵자(墨子)입니다. 그는 다른 사상가들과 달리 사대부 집안 출신이 아니라 농민 출신이었습니다. 농사를 짓던 사람이 학문에 뜻을 두고 자신만의 사상 체계를 확립하여 백성들에게 자기 철학을 전하고 다녔습니다. 묵자에게는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에 반드시 거치는 세 가지 기준이 있었습니다.
첫째, 지금 내리려는 결정이 옛 성현들의 사상과 일치하는가를 따졌습니다. 성현들의 저작과 가르침에 자신의 생각이 부합하지 않으면 올바른 판단이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전문가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결정하는 태도입니다. 둘째, 지금 결정하려는 생각이 과연 대중적인가를 살폈습니다. 자신이나 소수만의 판단이 아니라, 대다수가 동의하는 것이 아니면 실행하지 않았습니다. 셋째, 지금 하려는 결정이 국가와 사회에 유익한가를 검토했습니다. 한 시민으로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결정이 공동체에 이바지하지 못한다면 그 일을 하지 않겠다고 결단했습니다. 이 세 가지 기준을 일관되게 적용했기에 그는 큰 실수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확고한 틀과 기준이 있으면 삶에서 치명적인 오류를 피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떤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도 실패하지 않으려고 나름의 근거와 기준을 세웁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고 근거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지 않고, 말씀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아야 크게 실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요셉이 판단하고 결정한 근거가 항상 하나님의 말씀 위에 있었음을, 그가 복음 위에 집을 짓고 살았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죄가 남긴 상처, 39년의 굴레
야곱은 130세에 이집트로 이주하여 17년을 살았습니다. 147세에 세상을 떠난 이후, 자녀들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평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주던 아버지, 그토록 고집이 세던 아버지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순히 응답했습니다. 레아가 묻혀 있는 막벨라 굴에 자신도 안치해 달라고 부탁하며 자녀들의 상처를 치유했습니다. 자녀들은 장례를 치르면서 하나가 되었고, 천국 소망을 품고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 것처럼 보였을 때, 또 다른 풍파가 찾아옵니다. 장례가 끝난 뒤 요셉을 제외한 형제들이 이런 걱정을 나눕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창 50:15)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요셉은 원수처럼 대하지 않았지만, 과거에 동생을 팔아넘긴 죄가 있었습니다. 이제 아버지라는 울타리가 사라졌으니 요셉이 자신들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엄습한 것입니다. 이 걱정은 단순한 염려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형제들이 직접 요셉을 찾아가 말을 건넵니다.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창 50:16-17)
형제들의 말은 진실이었을까요? 만약 아버지가 그런 유언을 남겼다면, 형제들만 따로 불러 말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유언을 마무리하는 자리에 모두가 모여 있었을 때 요셉의 손을 잡고 직접 당부하면 되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유다의 담보신앙의 결단과 고백으로 이 가정에 더 이상 그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두려움 때문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빙자하여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그 사실을 꿰뚫어 보고 있는 요셉은 마음이 한탄스럽고 서러워서 울었습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두 가지 중대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첫째, 죄가 남긴 상처는 생각보다 깊고 오래갑니다.나이를 한번 따져 보겠습니다. 형제들이 요셉을 팔아넘겼을 때 요셉은 열일곱 살 소년이었습니다. 그때 형제들은 막대한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열일곱의 요셉이 이집트의 노예로 팔려가 13년 동안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서른 살에 이집트 총리가 되어 7년간 풍년을 다스렸고, 흉년 2년째에 형제들과 상봉했습니다. 그때 요셉이 "아직까지 흉년이 5년이나 남았다"고 했으니, 13년에 9년을 더하면 22년 만의 상봉이었습니다. 그때 요셉의 나이가 서른아홉이었습니다. 유다의 담보신앙의 고백으로 눈물 속에 과거의 문제를 털어냈고, 이제 더 이상 걱정이나 염려 없이 함께 잘 살자고 약속했습니다.
그로부터 다시 17년이 흘렀습니다. 이집트로 이주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요셉의 나이는 쉰여섯이었습니다. 열일곱 살에 저지른 범죄가 요셉이 쉰여섯이 될 때까지, 무려 39년 동안 형제들의 가슴에 죄의식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죄는 이토록 긴 세월 동안 사람을 놓아주지 않습니다. 상대가 용서했음에도, 이제 괜찮다고 했음에도, 그들의 내면에서 죄의 상처가 꿈틀대고 있었습니다.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처음부터 죄를 짓지 않는 것입니다. 큰 죄를 지으면 그 죄가 인생에서 빠져나가기까지 이처럼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시험을 붙잡지 말라는 뜻입니다. 죄의 유혹은 날마다 우리 눈앞을 스쳐 지나가고,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두드립니다. 요셉의 형제들도 그러했습니다. 아버지의 편애에 요셉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고, 팔아넘기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죄의 유혹이었고, 시험이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험을 붙잡아버렸습니다. 시험을 붙잡는 순간 죄에 빠져 들어가고, 그때부터 39년 동안 형제들은 죄에 종 노릇하며 살았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롬 6:11)
바울은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가 되라고 말합니다. 죄가 아무리 유혹해도 반응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죽은 사람에게 그 이름을 아무리 불러도 대답할 수 없는 것처럼, 죄가 우리를 불러낼 때 우리는 반응해서는 안 됩니다. 죄가 마음의 문을 두드릴 때, 죄에 대하여 죽은 자라면 그 자리에서 꼼짝없이 엎드려 있어야 합니다. 반면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면 그 말씀에 예민하게 반응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반응하지 않고 죽은 척합니다. 말씀을 듣고 마음에 찔림이 있어도 꼼짝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죄가 유혹하면 즉각 달려나갑니다. 남을 미워하고, 해코지하고, 마음의 성정대로 행하며 살면 항상 죄짓고 살게 됩니다. 세월이 지나면 후회하지만, 큰 죄를 저지르고 나면 요셉의 형제들처럼 그 굴레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죄책감이 무너뜨린 삶, 은혜로 세우는 삶
이 말씀이 주는 두 번째 교훈은 죄책감이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형제들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아무 일도 하지 못했습니다. 힘차게 다음 단계를 밟아가야 했지만, 죄의식에 사로잡혀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요셉의 형제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이 죄책감에 발목 잡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다윗입니다. 다윗은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두 가지 큰 죄를 범했습니다. 간음과 살인이었습니다. 그 죄를 은폐할 수 있다고 여겼으나,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보내 책망하셨습니다. 다윗은 깨닫고 하나님 앞에 나와 회개했습니다. "침상을 눈물로 띄웠다"는 고백처럼, 짠 눈물이 마치 바닷물처럼 되어 침상을 둥둥 띄울 만큼 그는 통곡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회개를 받아주시고 "내가 너의 죄를 사한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는 죄값도 치렀습니다. 하나님께 징계도 받았고, 고통도 겪었습니다. 회개했고, 용서받았고, 대가를 치렀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다윗은 여전히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다윗의 아들 중에 맏아들 암논이 있었고, 또 다른 아들 압살롬이 있었습니다. 이 둘은 어머니가 다른 배다른 형제였습니다. 압살롬에게는 아름다운 누이 다말이 있었는데, 배다른 오라버니 암논이 다말을 연모했습니다. 다말이 거절했지만 암논은 자신의 힘으로 다말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암논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고 다말보다 힘이 세므로 억지로 그와 동침하니라" (삼하 13:14)
"다말이 재를 자기의 머리에 덮어쓰고 그의 채색옷을 찢고 손을 머리 위에 얹고 가서 크게 울부짖으니라" (삼하 13:19)
"다윗 왕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노하니라" (삼하 13:21)
다윗은 노했습니다. 당연히 노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가정에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노한 뒤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암논을 감옥에 넣든, 귀양을 보내든, 무릎을 꿇리든, 사과하게 하든 무언가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분노하고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신도 밧세바를 범한 사람이었기에, 죄책감이 그의 자신감을 결여시킨 것입니다. 죄책감이 그를 무기력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버지의 역할을 기대하던 압살롬은 다윗이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자 스스로 나섭니다. 때를 기다렸다가 형 암논을 칼로 죽여버립니다. 형제들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벌어졌습니다. 압살롬은 그 길로 도망갔습니다. 살인이 일어났는데, 이때에도 다윗은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살인자를 잡아 국법으로 다스려야 했지만, 그는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나 역시 우리야를 죽인 살인자라는 죄책감이 그를 완전히 마비시킨 것입니다.
다윗은 이미 하나님께 용서받은 죄인이었습니다. 죄값도 치렀습니다. 그렇다면 은혜 안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용서받은 죄인으로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자신의 역할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교묘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값의 청산이 끝났음에도,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의 죄책감을 자극합니다. "너 옛날에 그랬던 사람 아니냐"고 긁어댑니다. 그래서 우리가 당당히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사탄이 우리에게 던지는 가라지요 전략입니다.
일상을 살아가다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죄지을 때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즉각 깨닫고, 엎드리고, 회개해야 합니다. 아버지 앞에 돌아와 다시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결단해야 합니다. 징계도 받고, 경고도 받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죄 문제, 죄값 청산은 끝난 것입니다. 회개했고, 용서받았고, 대가를 치렀으면 우리는 은혜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으면 무기력해지지 않습니다. 은혜 안에서 해야 할 일을 해야 합니다. 자녀가 잘못된 길을 가면 지적해야 하고, 거기서 우리의 인생이 무너져서는 안 됩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과거의 죄를 들추어내고, 죄책감을 공략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 맞서 은혜 아래 머물러야 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엡 2:8-9)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억만 가지 죄를 지은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내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을 은혜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은혜 아래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사탄이 우리의 행위를 가지고 집요하게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더라도, 하나님의 은혜 아래 머물러 있으면 이길 수 있습니다.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은혜 아래서 죄책감을 이겨내고, 해야 할 일을 힘차게 해 나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복음 위에 세운 집, 생명을 살리는 삶
이런 형제들의 모습을 본 요셉이 입을 엽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창 50:19-21)
요셉의 이 말 속에 복음의 정수가 녹아 있습니다. 그 핵심은 두 가지로 드러납니다.
첫째, 복음은 하나님이 주인 되시는 것입니다. 요셉이 고백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하나님이 이미 용서하셨는데, 내가 어떻게 심판하겠느냐는 선언입니다. 물론 요셉에게는 이집트 총리로서의 힘과 권세와 능력이 있었습니다. 형제들을 감옥에 넣을 수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이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셨는데 자신이 다시 벌을 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이처럼 하나님이 앞서시는 것입니다.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자칫하면 하나님보다 한 걸음, 혹은 반 걸음 더 앞서 나갈 때가 있습니다. 마음이 앞서서, 혹은 능력이 있다는 자만으로 하나님의 자리에 서서 사람을 징계하고, 판단하고, 상황을 정리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참된 복음주의자는 하나님을 뒤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요셉의 인생이 그러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그의 아내가 유혹했을 때 요셉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집 주인이 모든 것을 나에게 허락하셨지만, 당신만은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짓겠습니까?" 하나님을 항상 모시고 살았기에 선을 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영역 앞으로 한 발짝도 내딛지 않았습니다. 감옥에서 나와 바로 앞에 섰을 때, 바로가 "네가 꿈을 잘 푼다 하더라"고 하자 요셉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일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집트의 총리로 다스릴 때에도 그는 하나님을 뒤따라갔지, 자신이 모든 일을 주도하며 앞서 나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그의 성공의 비결이었습니다.
복음으로 세워지는 나라에 발을 딛고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뒤따라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겸손히 뒤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앞서가는 것은 복음적인 삶이 아닙니다.
둘째, 복음은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요셉은 자기 인생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팔았다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이 나를 팔았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먼저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먼저 보내시어 바로를 만나게 하시고, 꿈을 해석하게 하시고, 이집트 백성들을 기근에서 건져내시고, 아버지와 형제들과 그 자녀들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은 거기에 도구로 쓰임받았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생명을 살리는 것이고, 자신은 그 생명 살림의 도구로 일하고 있을 뿐이라는 고백입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생명을 살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큰 구원을 위해 자신을 먼저 보내신 것이라는 겸손한 신앙 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명을 살리기 위해 오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신 것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복음은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죽이고, 누르고, 분열하고, 업신여기고, 편을 가르는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결론
창세기는 이렇게 막을 내립니다. 그 시작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자 혼돈에 질서가 잡히고, 공허가 채워지고, 흑암이 빛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사역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창세기 1장부터 50장까지 면면히 이어져 옵니다. 요셉은 그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절대 진리, 복음 위에 집을 지었습니다. 복음보다 앞서지 않았고, 복음의 진리인 생명 살리는 일에 도구로, 동역자로 쓰임받았습니다.
창세기가 우리에게 남기는 고백은 이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앞서지 않겠습니다. 사람을 살려내겠습니다. 그 일에 동참하겠습니다. 이 고백이 창세기를 읽은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고백을 하나님 앞에 날마다 드리면서, 복음 위에 집을 짓고 사는 거룩한 동역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기 전, 이 땅의 상태가 그러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말씀으로 만나기 전에 우리의 인생은 혼돈했고 공허했으며 흑암 천지였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우리 인생에 들어온 이후로 우리에게 질서가 생겼고, 공허가 채워졌고, 우리 속에 빛이 비추었습니다. 그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겠습니다. 말씀 위에 집을 짓는 복음적인 사람이 되겠습니다. 말씀보다 앞서지 않겠습니다. 하나님보다 앞서지 않겠습니다. 복음은 곧 생명을 살리는 것이라고 하셨사오니, 우리도 생명을 살리고 구원하는 일에 쓰임받기를 원합니다. 주여, 우리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속에 이 생명 살리는 기쁨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이제는 은혜 아래 머물러서 죄책감에서 자유케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