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칠 일이면 (창7:1-5)
요즘 기업들은 전문 경영인을 모시고 기업을 경영하는 것이 추세입니다. 물론 아직도 창업주와 그 일가가 기업을 운영하기도 하지만, 세계적인 추세에 발맞추어 전문 경영인 체제로 기업을 운영하는 것이 흐름입니다. 그런데 이럴 경우에 전문 경영인에게 권한만 주는 것이 아니라 의무와 책임을 아주 강하게 묻습니다. 이사회와 주주총회가 전문 경영인에 대한 경영 압박을 심하게 합니다. 경영 실적을 내라고 하고 판매 실적을 요구합니다. 경영 실적이 좋을 때는 문제가 되지 않으나 경영 압박을 받는 상황에서 판매 실적이 부진하면 그때부터는 심각한 압력을 받습니다. 전문 경영인들 사이에 자조 섞인 이야기로 흘러다니는 이야기가 있는데, 세 개의 봉투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어떤 전문 경영인이 기업 실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후임자에게 인수인계를 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자네를 위해서 책상 서랍에 봉투 세 개를 준비해 두었네. 기업을 운영하다가 위기가 닥치면 그때마다 하나씩 꺼내 보게나. 그러면 크게 도움이 될 걸세." 후임자는 전임자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기업을 맡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첫 번째 위기가 닥쳤습니다. 그 위기가 닥치자 그만 전임자가 한 말이 생각났습니다. 서랍을 열어보니 정말 봉투 세 개가 있었고 번호가 적혀 있습니다. 1번 봉투를 열어 보았습니다.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전임자를 비난하라."
무릎을 쳤습니다. 그렇구나, 전임자를 비난하면 위기를 넘어갈 수 있겠구나. 이사회를 소집했습니다. "지금 저는 저의 경영 철학을 한 번도 펼쳐본 적이 없습니다. 전임자가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경영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지금 일어난 모든 위기는 전임자 탓입니다. 저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저에게 힘을 실어 주시고 전권을 주시면 한번 반등의 요소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이사회가 들어보니 그럴듯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전권을 줍니다. 반등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위기가 닥쳤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봉투를 열어 보았습니다.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사람을 바꾸라."
역시 무릎을 쳤습니다. 그리고 이사회를 소집했습니다. "요소요소마다 전임자가 심어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적 쇄신이 되지 않으면 우리 회사는 가망이 없습니다. 사람을 바꿀 수 있는 권한을 제게 주십시오." 이사회가 생각해 보니 또 그럴듯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바꾸라고 했습니다. 대규모 인적 쇄신의 광풍이 불어 닥쳤습니다.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들어오는 사람이 있고, 떠나는 사람이 있으면 승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회사는 승진에 대한 열망으로 질서가 잡힙니다. 사람이 바뀌자 단기적인 반등에 성공했습니다. 이 성공이 계속해서 이어질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세 번째 위기가 닥쳤습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위기와는 중량감이 전혀 다른 아주 심각한 위기라는 걸 절감했습니다. 세 번째 봉투를 열었습니다.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이제 당신도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당신도 봉투 세 개를 준비하십시오."
사실 누군가가 지어낸 이야기지만 이런 이야기가 회자된다는 것은 지금 이 시대가 책임감을 상실한 시대라는 반증 아니겠습니까? 창업주라면 자신의 피와 땀으로 일군 기업을 이런 식으로 처리하겠습니까? 전임자를 비난하고 사람을 바꾸고 하다가 안 되면 떠나버리는 그런 식으로 회사를 경영하지 않을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사재를 다 털어 넣어서라도 어떻게 해서든 회사를 살리려고 발버둥치고 애를 쓰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런데 책임감이 없습니다. 책임감은 사랑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책임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사랑하면 당연히 책임감이 생기게 됩니다. 책임감이 없다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으셨는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지극히 사랑하셨습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은 이 사람에 대한, 세상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책임감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오늘 읽은 이 말씀에도 하나님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얼마나 책임지고 싶어 하시는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우리도 하나님의 책임에 동참하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 하나님의 사람 곁에
먼저 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하나님은 노아뿐만 아니라 노아의 나머지 일곱 식구도 다 방주에 들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노아의 일곱 식구들이 방주에 들어가게 된 것은 노아 덕분입니다. 노아에 대해서는 성경 말씀에 그는 의로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일곱 식구에 대해서는 성경의 평가가 유보되어 있습니다. 기록된 것이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사실 노아라는 큰 나무 그늘 아래 나머지 일곱 식구들이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노아의 가족들이 노아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일곱 식구들이 방주에 들어갈 수 있는 특권과 은혜를 받아 누리게 된 것입니다.
노아가 살아왔던 시대의 영적 상황은 암울했습니다. 예배 공동체가 텅텅 비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용사가 되고 명성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는 하나님의 눈에서 하나님의 호의와 은혜를 발견했습니다. 하나님께 부탁받은 방주 언약을 120년 동안 힘써 지켰습니다. 다 준행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훌륭한 믿음의 일꾼이었습니다. 노아의 가족들은 노아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것입니다.
1-1. 라합의 믿음
성경에 보면 훌륭한 믿음의 거인과 함께 살아갔던 사람들이 그 사람 덕분에 은혜를 입은 예가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그 중에 또 대표적인 한 사람이 있다면 라합입니다. 라합이 어떤 사람입니까? 그녀는 여리고 성의 여관 주인이었습니다. 그녀가 자라났을 때는 하나님 신앙을 믿고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여관을 운영했기 때문에 오고 가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 이야기를 소문으로 들었습니다. 듣자니 강력한 제국 이집트를 하나님께서 무너뜨리시고 히브리 민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다고 하더라.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그들을 굶어 죽지 않게 하시고 그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고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신다더라.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라합에게 믿음이 자랐습니다.
자신들이 살아가고 있었던 그 시대의 잡신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 이 하나님이야말로 신 중에 신이고 내가 정말 믿고 의지해야 될 분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믿음을 가지고 붙들기 시작했습니다. 기회만 오면, 나에게 한 번만 기회가 오면 나는 이 신앙을 꼭 붙들고 놓지 않겠다고 결단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의 여관에 두 명의 정탐꾼이 들어옵니다. 여호수아가 보낸 정탐꾼이었습니다. 그들을 숨겨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결정의 날,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그날에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드디어 그날이 왔습니다. 여호수아 6장 25절입니다.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려 주었으므로 그가 오늘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주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탐하려고 보낸 사자들을 숨겨 주었음이더라
라합 덕분에 라합의 아버지와 그의 가족들, 그에게 속한 모든 재산, 심지어 가축과 동물들까지 다 생명을 부지하게 되었습니다. 라합은 스스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의 아버지와 가족들은 하나님 이야기를 한 번도 듣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라합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은혜의 부스러기를 먹고 그들도 생명을 유지하게 되는 놀라운 특권을 함께 누리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1-2. 요셉을 알아보지 못한 자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을 귀하게 여기는 태도가 무척 중요합니다. 노아 같은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중요하고 라합 같은 사람을 알아보는 우리 믿음의 분별력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이런 훌륭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굴러 들어온 복을 제 발로 차버린 사람도 있습니다. 요셉을 알아보지 못한 보디발과 그의 아내가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성경은 요셉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창세기 39장 2절과 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를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비록 그의 신분은 노예였습니다. 그의 주인 보디발이 요셉이 하는 걸 보니 정말 하나님이 함께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직접 보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손대면 안 되는 일을 요셉이 손을 대면 일이 됩니다. 그것도 아주 잘됩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특별하게 그와 함께 하시는구나 하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그를 존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을 유혹합니다. 유혹에 실패하자 그에게 누명을 뒤집어 씌웁니다. 감옥에 보내 버렸습니다. 보디발도 아내가 미심쩍었지만 그러나 요셉을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었고 여호와가 함께하셨고 형통한 자가 되었던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던 보디발과 그의 아내, 성경은 그 이후의 이야기를 기록하지 않습니다. 영원히 그 이후의 이야기는, 보디발과 그의 아내는 성경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마지막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1-3. 분별하는 눈
사실 우리는 누구나 다 노아가 될 수 없고 라합이나 요셉 같은 사람이 될 수가 없다면, 적어도 노아나 라합이나 요셉 같은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은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누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존귀하게 여김을 받는 사람인지, 그런 눈을 우리는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노아의 아들들은 아주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노아의 아들들이 태어나 보니 아버지가 방주를 만들고 있습니다. 성장합니다. 사춘기가 되었습니다. 노아의 아들들의 친구들이 아버지 노아를 손가락질합니다. 동네 사람들이 다 미치광이 노인네라고 놀려 댑니다. 홍수가 나지 않는데도 120년 동안 배를 짓는다고 야단이라며 미쳤다고 손가락질합니다. 생각해 보면 노아의 아들들이 겪어야 했던 어릴 때 그 고난이 상상되지 않습니까?
만약에 노아의 아들들이 "아버지, 저는 아버지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아버지에게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제 친구들이 아버지를 얼마나 욕하는지 아십니까? 저는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저도 아버지를 떠나서 방주 만드는 일을 그만두겠습니다. 저도 세상에 나가서 용사가 되고 명성을 얻고 싶습니다. 떠나고 싶습니다"라고 말한다면 노아 혼자 힘으로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명령도 어기고 떠난 가인이 에덴 동쪽 놋 땅에 가서 자기 마음대로 담을 쌓고 성을 쌓았고 자기의 왕국을 건설해 버렸는데, 노아의 자식들이 아버지를 떠난다고 하면 막을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노아의 자식들은 아버지를 떠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비록 사람들에게 미치광이 노인네라고 손가락질 받고 비난당하지만, 그들이 볼 때 아버지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존귀한 사람이었습니다. 의인이었습니다. 시대를 거슬러 가고 앞서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존중하고 존경했습니다. 그 그늘에 몸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방주에 타는 은혜와 특권, 생명을 유지하는 은혜와 은총을 입게 된 것입니다. 노아처럼 살지 못해도 노아의 그늘에 거하기만 해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지 않습니까?
오늘 여러분들은 어떤 기준으로 사람을 분별하십니까?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사람을 판단합니다. 돈이 얼마나 많은지, 어느 정도 넓은 집에 사는지, 어떤 옷을 입는지, 어떤 차를 타고 다니는지, 학벌은 어떤지, 어떤 사람과 사귀고 있는지, 눈에 보이는 걸 가지고 내가 이 사람과 친하게 지내야 되겠다 아니면 가까이하지 말아야 되겠다, 함께 친밀하게 해야 되겠다 그렇지 않아야 되겠다, 사람들은 그렇게 결정합니다. 그러나 그런 시선은 세속적인 시선이고 하나님의 사람들의 눈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적어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백성이라면 숨은 보화를 감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부터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믿음의 눈으로 다시 한번 살펴보십시오. 내가 누구와 가까이해야 되는지. 노아는 비록 사람들에게는 손가락질 받는 미치광이 노인네였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보석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라합은 사람들 시중이나 드는 여관집 여인이었지만 그 믿음의 순결을 가지고 말씀에 매달림으로써 믿음을 가진 하나님께 사랑받는 여인이었습니다. 요셉은 비록 노예였고 비록 죄수였지만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셔서 그를 형통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키우시는 일꾼이고 나무였습니다. 그런데 노아를 분별하지 못하고 라합과 요셉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 책임은 우리에게 있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적어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을 분별하고 찾고 그들과 함께 친밀하게 지냄으로 은혜를 함께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셔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런 축복과 은혜가 우리에게 함께 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누구에게나 열린 방주
2절을 보십시오.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취하며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방주에 실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여기 정결하다, 부정하다 하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레위기 11장에 보면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때 그 기준은 먹을 수 있는 것을 정결하다고 했고, 먹을 수 없는 것을 부정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건 율법의 기준입니다. 레위기에 율법이 제정된 것보다 오늘 창세기 7장은 훨씬 더 이전 시대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여기 창세기 7장에서 말하는 정결과 부정의 기준이 무엇일까요. 이 기준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에 적합한 것을 정결하다고 말했고, 제사 드리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을 부정하다고 말했습니다.
2-1. 부정한 짐승까지
그러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제사에 쓰임 받지도 못하는 부정한 짐승을 왜 방주에 실으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가뜩이나 공간도 부족한데 짐승을 다 태우고 사람까지 태우려면 부족할 텐데 왜 이런 짐승까지 태우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부정한 짐승까지도 싣는 것처럼 누구나 오라, 누구나 다 방주에 탈 자격이 있다 하는 것을 천명하신 말씀입니다.
사실 방주에 탈 자격을 따지자면 노아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인 아닙니까?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었습니다. 따지면 노아 한 사람만 방주에 탈 자격이 있습니다. 그런데 노아의 자녀들, 그의 가족들, 노동력을 제공한 것으로, 노아와 함께 몸을 낮춘다는 이유로 방주에 탈 수 있습니다. 물론 나중에 아무도 타지 않았지만 노아의 이웃들 중에 "제가 불안하니까, 나는 믿지 않지만 혹시 홍수가 날지 모르니까 저도 한번 타겠습니다" 하면 그 사람도 탈 자격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방주 만드는 일을 방해한 사람들조차도 타겠다고 하면 누구나 다 탈 자격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부정한 짐승을 태우시면서 누구나 오라, 아무나 오라, 다 방주에 타도 좋다, 이것을 천명하신 것입니다. 방주가 곧 교회라면 교회는 누구나 올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진입장벽이 없어야 됩니다. 문턱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문턱 자체가 없어져야 됩니다. 누구나 와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무릎을 꿇고 포도주와 젖을 값 없이 살 수 있는 곳이 바로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2-2. 바울의 원칙
그런데 과거에 바울이 복음을 전하던 그 시절에 유대교회에서 핵심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진입장벽을 높게 쌓아 두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할례 받아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려면 할례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구원받았지만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기 위해서는 할례 받아야 구원받고 교회 공동체 일원이 될 수 있다고 강하게 주장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건 복음적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그가 복음을 전할 때 원칙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고린도전서 9장 19절에서 22절입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사람들이 바울을 비난했습니다. 너는 어떻게 원칙도 없고 줏대도 없느냐고. 어떻게 이 사람에게는 이렇게, 저 사람에게는 저렇게 그렇게 마음대로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느냐고. 그러나 바울은 자기만의 원칙이 있었습니다. 누구나 다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 일원이 되어야 하고, 유대인들이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이 없는 자나 약한 자나 강한 자나 모두가 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구원받는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그는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마치 물에 빠진 사람들처럼 그 앞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복음을 전하고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자를 우리 마음대로 잣대를 가지고 구분하고 있다면 이건 복음의 대적자로 사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해서는 안 되는 일 중에 하나가 교회 안에서 당 짓는 일입니다. 출신 지역에 따라서, 내가 종사하고 있는 사회적 직업에 따라서, 정치적인 성향에 따라서, 교회에 얼마나 오래 뿌리를 두고 있었느냐에 따라서 카르텔을 만들고 진입장벽을 높게 쌓아 두고 아무나 올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에 역행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방주를 만드시면서까지 하셨던 말씀, 정결한 짐승이든 부정한 짐승이든 모두 태우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뭐라고 스스로 기준을 정하고 사람을 구별하고 차별한다는 말씀입니까? 교회 공동체는 아무나 올 수 있는 곳이고, 누구나 올 수 있는 곳이고, 복음을 듣고 구원받을 수 있는 곳이고, 그렇게 해야 되는 곳입니다. 교회의 본질이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칠 일을 기다리심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지금부터 칠 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내가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 버리리라
여러분은 이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 마음의 중심이 어느 단어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어떤 분들은 "쓸어 버리리라" 이 말씀에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실 때는 하나님의 전체 성품을 근거로 성경 말씀을 읽어야 됩니다. 만약에 쓸어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이었다면 여기까지 올 이유도 없습니다. 선악과 명령을 어겼을 때 그때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진작에 두 사람, 아담과 하와를 쓸어버려야만 했습니다. 그러면 더 복잡해지지 않습니다. 두 사람만 제거하면 간단하게 끝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기회를 주셨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그때 하나님은 "내가 준 자유의지로 너희가 함부로 방종을 일삼는구나. 나는 이제 더 이상 지켜볼 수가 없게 되었다" 쓸어버리려고 작정하셨다면 그때 쓸어버려야만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근심할 일도 걱정할 일도 더 이상 만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래 참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예배 공동체를 다 뛰쳐나갔을 때도 하나님은 참으셨습니다. 희망을 찾고 계셨습니다. 단 한 사람 노아를 희망으로 찾으시고 그에게 모든 걸 걸고 120년 동안 방주를 짓게 하셨습니다. 120년 그 기간 동안 하나님은 희망을 놓지 않고 쓸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참고 참고 또 참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하나님의 마음이 쓸어버리는 것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오인한 것입니다.
3-1. 칠 일의 의미
그럼 이 말씀에서 정말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마음이 어디에 녹아 있느냐. "칠 일"에 녹아 있습니다. "칠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원래 하나님의 계획은 120년이 지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주를 띄우고 문을 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120년 동안 단 한 사람도 방주에 탄 사람이 없습니다. 노아가 여호와의 명령을 준행하고 열심히 복음을 전했건만 한 사람도 방주에 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120년 동안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기대하고 또 기다렸지만 한 사람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 칠 일을 연장한 것입니다. 짐승들도 다 태우고 노아와 노아의 가족들도 다 탔지만, 하나님이 방주의 문을 닫기 전에 다시 일주일을 기다렸습니다. 칠 일 동안을 기다렸습니다. 애통하는 심정으로 기다렸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는 방식이요, 이 세상을 책임지는 하나님 안의 방법입니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기회를 주고 또 기다리는 것.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3-2. 노아의 준행
이 사랑에 응답하는 노아의 모습을 보십시오. 5절을 보십시오.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다 준행하였더라. 이 말씀이 어떤 의미일까요. 사실 이 똑같은 말씀이 6장 22절에도 나옵니다. 그런데 6장 22절에 나오는 "다 준행하였다"라는 말씀은 노아가 방주 명령을 다 준행하였다는 뜻입니다. 120년 동안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방주를 다 지어서 준행하였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7장 5절에 나오는 여기 "다 준행하였더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칠 일 동안 동분서주하면서 영혼 구원을 위하여 뛰어다녔다는 뜻입니다.
상상력을 한번 발휘해 보십시오. 노아가 칠 일 동안 방주 안에 그냥 머물러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는데, 백이십 년이 지나도 문을 닫지 않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는데, 이제 칠 일을 더 기다리시겠다고 하시는데, 노아는 뛰쳐나왔을 것입니다. 밤낮 자지 않고 먹지 않고 다니면서 "이제 정말 세상에 종말이 옵니다. 칠 일이 지나면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비가 내려서 모든 걸 다 쓸어버릴 것입니다. 제발 제 말 좀 듣고 속는 셈치고 믿어 보고 방주에 타십시오!" 그렇게 목이 터져라 외치지 않았겠습니까?
노아는 이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이 말씀을 다 준행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열매는 없었습니다. 한 사람도 탄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이 일을 성실하게 칠 일 동안 하나님의 손이 되고 하나님의 발이 되어서 이 사명을 성실하게 감당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대통함이 있습니까? 언제 이 땅의 종말이 올지 모르는, 언제 예수님께서 공중의 나팔 부시고 재림 주로서 나타나실지 모르는데 우리는 사랑하는 자들에 대한 사랑의 마음과 책임감이 있습니까? 하나님처럼 영혼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처럼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간절한 책임감을 가지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는 믿음의 백성, 사람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보여 주시고 드러내며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노아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노아 한 사람, 믿음의 거목 덕분에 노아의 가족들이 그 안에서 쉼을 얻고 방주에 타게 되었습니다. 라합 덕분에 라합의 가족들이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 생명을 부지하게 되었습니다. 주여, 우리가 노아나 라합이나 요셉 같은 사람이 되지는 못해도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을 분별할 수 있는 영적인 눈을 열어 주시옵소서. 그들을 존귀하게 여길 수 있는 우리의 마음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교회는 누구나 올 수 있는 곳이라 하셨습니다. 우리 스스로 그 옛날 유대인들처럼 할례의 언약을 행하라 진입 장벽을 높게 만드는 자가 되지 않도록 도우시고, 바울처럼 누구에게나 아무쪼록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믿음의 백성이 되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쓸어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라 120년을 기다리고 또 칠 일을 기다리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이요 책임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사오니, 주여 우리도 노아처럼 하나님의 명령을 다 준행하는 하나님의 동역자, 손과 발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