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사 (창8:1-12)
윌리엄 어터몰레는 영국의 화가였습니다. 그는 62세가 되던 해에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습니다. 당시 미술 교사였던 아내의 도움으로 그는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발병 전에 그린 첫 번째 자화상은 정교하고 섬세했습니다. 그러나 발병 초기부터 말기에 이르기까지 그린 자화상들을 순서대로 보면, 병이 점점 깊어지는 과정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마지막 자화상은 그가 얼마나 심한 병에 걸려 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훌륭한 화가였던 그는 역설적이게도 사후에 알츠하이머 연구에 더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알츠하이머병은 치매를 일으키는 퇴행성 뇌 질환입니다. 요즘은 치매라는 명칭 대신 인지저하증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치매라는 한자어가 어리석은 미치광이라는 뜻을 담고 있어 당사자와 가족들을 불편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중병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기억에 대해 자신이 없어집니다. 과거에는 사람들의 이름도 정확히 알았고, 경험한 사실도 객관적으로 기억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면서 기억은 점점 희미해지고, 이름도 떠오르지 않고, 사건도 흐릿해집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슬퍼집니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기억이 깜빡깜빡하는지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연약한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필연적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는 한계적 상황입니다.
하나님은 어떠실까요?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기억하고 계십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억조차 하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을 만난 이후, 그 이전에 지었던 죄에 대해서는 하나도 기억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하나님의 기억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방주에 타고 있는 노아와 그 가족들을 기억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기억이 되는지, 하나님의 기억이 된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구원받은 자의 불안
1-1. 방주 안의 노아
노아와 가족들이 방주에 탄 것은 노아의 나이 600세 되던 해 2월 17일이었습니다. 방주에 탄 이후 하늘이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비는 자그마치 40일 밤낮을 내렸습니다. 방주에 탄 직후 그들은 당분간 안도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만약 방주 밖에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 만물과 자연이 다 쓸려가는 가운데 자신들도 떠내려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나님 말씀의 위엄과 두려움도 함께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방주 안에 머문 것은 40일만이 아니었습니다. 40일간 비가 내린 기간을 포함해서 그들은 무려 5개월 동안 물이 줄어들지 않아 방주 안에서 꼼짝도 못 하고 있었습니다. 처음 40일이 안도감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기간이었다면, 그 이후 110여 일 동안 그들은 어떤 마음으로 방주에서 지냈을까요?
동력도 없고 돛도 없는 방주가 물 위를 떠다니다가 큰 바위에 부딪히면 산산조각 나는 것은 아닐까? 이 배가 어디에 멈출까? 모든 것이 다 떠내려가 버렸는데, 방주에서 나간다 한들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살아갈까? 그런 걱정과 두려움이 노아와 가족들에게 왜 없었겠습니까? 그들은 아마 걱정도 되고 염려도 무척 되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백성도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구원받은 백성도 여전히 불안해하고 두려워합니다. 방주에 탄 사람들은 모두 구원받은 백성이 아닙니까? 방주에 탄 것 자체가 특권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방주를 개방하시고 누구나 타라고 말씀하셨지만, 노아의 가족들이 노아와 함께 방주에 탄 것은 특권이었습니다. 노아는 의인이었지만 노아의 가족들이 의인이라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을 입어 생명을 건짐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방주 안에서 걱정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기억이나 하실까? 우리가 이 방주에 있다가 하나님께 잊혀진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닐까? 하루하루 지나갈 때마다 불안하고 두려웠습니다.
1-2. 광야의 이스라엘
성경을 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구원받은 사람들이었지만 여전히 두려워했습니다. 이집트에서 430년 동안 대를 이어 종살이하던 그들을 하나님께서 건지기로 작정하시고 모세를 통해 구원하셨습니다. 10가지 재앙이 임했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에게는 재앙이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통쾌한 장면이었습니다.
그들 앞에는 홍해가 놓여 있었고, 뒤에는 이집트 군대가 따라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어 바다를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직접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바닷길이 질퍽질퍽했지만, 하나님께서 동풍을 보내어 바다를 마른 땅같이 말려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안전하게 건넜습니다. 그들이 다 건넌 후에 뒤쫓아오던 이집트 군대는 수장되었습니다. 놀라운 구원의 역사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강권적인 구원의 역사를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그들은 광야 길을 걸어가야 했습니다. 마실 물이 없습니다. 먹을 음식이 없습니다. 무슨 옷을 입어야 할지 염려가 됩니다. 과연 걸어서 무사히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갈 수 있을까? 그들은 불안했습니다. 구원받았지만 여전히 불안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역사를 통해 인도해 주셨지만 그들은 여전히 걱정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는 자격 없는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냥 그대로 두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죄에서 건져주셨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먹고 살 길이 막막했는데 하나님께서 직업도 주시고 일터도 주셨습니다. 가정도 꾸리게 해주셨습니다. 사방팔방 어려움으로 옭죄임을 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길을 내주셨습니다. 인생의 험산준령을 건너갈 때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손을 내밀어 주셔서 오늘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해 주셨습니다. 돌아보면 하나님의 은혜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은혜받은 이후에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 아닌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걱정하고 불안해하고 두렵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늘 본문의 노아와 가족들처럼 구원받았지만 여전히 불안하고 겁이 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잊어버리셨을까요? 우리도 세상에서 어려운 일을 만나면 하나님이 혹시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열심히 기도하는데 응답하지 않으시고 말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혹시 나를 기억조차 못하시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에 사로잡힙니다.
2. 언약을 기억하시는 하나님
2-1. 자카르(זָכַר)의 의미
그러나 오늘 말씀은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
하나님은 노아와 함께한 가족들, 가축, 들짐승 모두를 기억하셨습니다. 방주 안에 타고 있는 모든 생명체를 기억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기억하다라는 말이 중요한데, 히브리어로 자카르(זָכַר)입니다. 자카르는 그냥 문득 떠올랐다는 뜻이 아닙니다. 잊고 있었는데 갑자기 생각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카르는 언약의 의미가 매우 강한 단어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노아와 맺은 언약을 기억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언제 어떤 언약을 맺으셨습니까? 창세기 6장 18절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하나님께서 이미 창세기 6장에서 노아와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 언약은 너희 모든 자녀들, 모든 며느리들, 네 아내까지 다 구원하겠다는 약속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맺으신 이 언약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언약은 히브리어로 베리트(בְּרִית)입니다. 베리트는 동사 바라(בָּרָא)에서 왔는데, 바라는 묶다라는 뜻입니다.
서로 따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하나님이 언약을 통해서 하나가 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언약을 맺었다는 사실은 하나님과 노아가 언약으로 하나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노아를 언약백성으로 삼으시고 하나가 되게 하신 이후에 하나님과 노아는 절대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서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서로 맺은 언약을 결단코 파기하지 않으시고 함께 지켜나가겠다고 결심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불안해하고 겁을 냅니다. 하나님이 나를 잊으셨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도하는데 기도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원하는 시기에 바로 응답되지 않습니다. 바라는 대로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시지 않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불안해합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가족들에게 방주에 타라고 언약하셨지만, 방주에 타라고만 말씀하셨지 언제 내릴 것이라고는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방주에 5개월만 있어라, 1년만 있어라 하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불안해하고 두려워한 것입니다. 방주 안에서 얼마나 많이 기도했을까요? 하나님, 비가 좀 걷혔으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심판하실 만큼 하셨지 않습니까? 물 위를 떠다니다가 바위에 부딪힐까 봐 잠도 자지 못합니다. 하나님, 이제 좀 멈추어 주십시오. 그들은 여전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거기에 대해 묵묵부답이셨습니다. 응답이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도 환란이 닥칠 때가 있습니다. 고난이 닥칩니다. 원하지 않는 어려움이 닥칩니다. 그러면 마음속에 불안이 일어납니다. 그 틈을 사탄은 잘 파고 들어옵니다. 사탄은 우리가 불안해하면 두려움을 함께 가져다줍니다. 불안과 두려움은 불신으로 나아갑니다. 사탄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불안과 두려움을 이용해서 하나님을 불신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불신하면 당연히 원망하고 불평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관계 단절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탄은 이것을 매우 잘하는 존재입니다.
2-2. 욥의 고난과 하나님의 기억
성경에 욥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셨습니다. 하루는 하나님이 사탄에게 욥을 이렇게 자랑하십니다. "너 세상을 두루 다니다가 나의 종 욥을 본 적이 있느냐? 그가 얼마나 신실하고, 얼마나 의롭고, 얼마나 내 말을 잘 지키는지 네가 보았다면 아마 깜짝 놀랐을 것이다."
그때 사탄이 말합니다. "하나님, 그건 하나님께서 욥을 몰라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물질도 주시고 축복도 주시고 많은 것으로 채워주시니까 그가 하나님을 잘 믿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만약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물질과 모든 소유물을 거두어 가 보십시오. 그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시지요."
욥기 1장 11절과 12절을 보십시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그의 몸에는 손대지 말고 그의 모든 소유물을 맡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욥의 인생에는 광풍이 불어닥칩니다. 모든 소유물이 한순간에 다 날아갑니다. 인생의 큰 고난과 핍박과 어려움이 한꺼번에 불어닥칩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질문 앞에 섭니다. 하나님이 욥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욥을 버리셨습니까? 하나님이 욥을 이제는 기억조차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은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욥을 자랑스럽게 여기셨습니다. 욥은 내가 주는 물질 따위에 목을 매는 자가 아니다, 그런 것 없어도 나를 잘 섬기고 나와 맺은 언약을 배반하지 않을 나의 훌륭한 백성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확신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탄에게 그의 목숨 외에 모든 소유물을 맡긴다고 하시며, 잠시 잠깐 그에게 고난과 환란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 인생에 닥친 고난, 환란, 물질의 어려움, 여러 가지 문제들 때문에 하나님이 나와 맺은 언약을 파기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내 인생에 일어나는 수많은 어려운 일들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기억조차 하지 않는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까?
어리석은 신앙인들은 아주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물질의 복을 많이 받고, 건강의 복을 받고, 기도한 대로 이루어지고, 자녀들이 잘 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신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물질의 복이 사라지고, 몸이 병들고 아프고, 인생의 수많은 난관과 고난과 어려움에 처하면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잊어버리셨다고,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이 나를 생각지도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 어리석은 생각이고 착각입니다. 욥을 보면 분명히 그 사실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믿음의 위인들, 우리보다 더 고생하고 순교하신 분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비롯해서 사도 바울을 비롯한 수많은 믿음의 위인들, 그들은 고난과 환란과 핍박 가운데 있었지만 하나님을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중요한 것을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2-3. 십자가 언약의 확실성
물질이나 원하는 기도 제목이 응답되는 것이 하나님과 나 사이의 확정적인 사랑의 증거가 아니라면, 보다 확실한 객관적인 증거가 무엇입니까? 내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증거가 될 수 없다면, 내가 고난받고 환란당하는 것이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증거가 될 수 없다면, 가장 확실한 증거가 무엇입니까? 객관적인 증거가 있어야 우리가 그것을 붙들고 하나님의 언약백성임을 확신하지 않겠습니까?
변하지 않는, 영원토록 사라지지 않고 변하지 않는 증거는 바로 십자가 언약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인생이 맺은 십자가 언약, 그 십자가 보혈의 공로 아래 있으면 우리는 누가 뭐래도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십자가 언약을 붙들고 사는 자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와 내가 맺은 언약 가운데 내가 너를 절대로 놓지 않겠다, 너는 바라 언약 가운데 묶여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을 했습니다. 양을 잡고 그 피를 문설주와 좌우 인방에 바르고 방 안에 들어가 있으면 죽음의 사자가 지나갈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들은 약속대로 그대로 행했습니다. 양을 잡고 문설주와 인방에 그 피를 바르고 방 안에 들어가 있는 자들, 죽음의 사자가 다 지나갔습니다. 그들이 어떤 사람이든지 하나님은 그것을 상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피만 보고 지나가셨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 그 십자가 보혈의 언약이 상징적으로 드러난 것이 출애굽 사건입니다.
방주도 마찬가지입니다. 방주에 역청을 칠하는 것은 보혈의 공로를 바르는 것입니다. 방주에 탄 노아와 가족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부으신 십자가의 보혈을 바르고 그 방주 안에 들어 있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절대로 놓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분명히 기억하시고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으십니다.
오늘 우리도 십자가가 마음 중심에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 아래 머물러 있다면, 하나님은 결단코 우리를 잊어버리지 않으시고 놓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내가 언약백성이라는 것을 어떻게 확정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십자가 이 한 가지만 붙들고 계셔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십자가 언약 가운데 있다면, 내가 부하건 가난하건, 성공하건 실패하건, 건강하건 몸이 병들었건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 절대로 흔들리지 않고 변하지 않는 십자가 아래에서 하나님이 영원토록 기억하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3. 기억되는 삶
3-1. 하나님 앞에 기억됨
그러면 이제 우리가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백성이 되었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신다면, 이제 우리는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기억에 남는 인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한 삶을 살았던 대표적인 한 사람이 있는데, 고넬료입니다.
사도행전 10장 4절을 보겠습니다.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하나님이 그를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근거는 두 가지입니다. 기도와 구제입니다. 고넬료는 이방인이었습니다. 로마의 백부장으로 백 명 정도의 부하를 거느리고 있는 하급 장교였습니다. 그가 어떻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그는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고 구제를 성실하게 감당해서 하나님의 기억에 새겨진 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를 마음에 새기시고 기억하십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와 대화를 많이 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일가친척이지만 20년, 30년이 지나도 명절에도 한 번 만나지 않고 대화하지 않는 사람들, 우리는 그 일가친척의 이름조차 잘 모릅니다. 그 자녀들의 이름도 잘 모릅니다. 그의 형편이 어떠한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아도 믿음의 백성들, 성도들, 매주 만나서 교제하고 함께 대화하는 사람들, 이웃들, 직장 동료들, 우리는 그분들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대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속마음을 아뢰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오늘 이렇습니다. 제 영적 상태가 이렇고 제 심리 상태가 이렇습니다. 제가 너무 힘이 듭니다. 오늘은 너무 기쁩니다. 이런 등등의 대화를 하나님께 계속하는 것,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기억이 되는 매우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여러분의 기도생활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기억이 되기를 원하신다면 쉬지 않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매일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십시오. 속상한 일도, 즐겁고 기쁜 일도 하나님께 계속해서 아뢰고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또한 고넬료는 구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의 하급 장교로 급여를 받은들 얼마나 벌었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열심히 구제하고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이 구제를 기억하시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신약까지 흐르고 있는 정신을 보면,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를 아끼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그들을 위해서 다 섬기고 나누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누누이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 하나님의 일을 고넬료가 구제를 통해서 성실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기억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십자가 언약 가운데 하나님의 기억이 된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더 깊은 하나님의 기억에 발자취를 남기려 한다면, 고넬료처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고넬료처럼 나누고 구제하는 일을 성실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결코 잊지 않으시고 우리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3-2. 사람에게 기억됨
또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에게만 기억되고 끝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에게도 좋은 기억으로 남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이 평생 목회하면서 정말 마음에 새기고 기억하는 교회가 있었는데, 그 교회는 데살로니가 교회였습니다. 바울은 2차 선교여행을 유럽에서 시작합니다. 첫 번째로 개척한 교회가 빌립보 교회, 두 번째로 개척한 교회가 데살로니가 교회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첫 번째를 기억합니다. 첫사랑이니까요. 그런데 빌립보 교회는 풍성한 교회였고 부자들도 많았습니다. 사람들의 성품도 좋았고 따뜻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교회였던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핍박이 많았습니다. 고난이 많았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죽을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어느 날 그에게 생명의 위협이 다가와 바울은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수가 없어서 배를 타고 아테네로 피합니다. 아테네를 거쳐서 고린도에 도착합니다. 너무 걱정이 되었습니다. 나는 떠나왔지만 큰 환란과 핍박 가운데 있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수소문해서 알아보니 그들이 큰 환란 가운데에도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 뜻 안에서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편지를 쓴 것이 데살로니가전후서입니다. 1장 2절과 3절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바울이 여기서 기억한다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했습니다. 바울이 기억하는 것이 세 가지입니다.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그들이 믿음의 역사를 이루고, 사랑의 수고를 이루며, 소망의 인내를 한 것이 마음에 사무치도록 고맙고 기억이 되었습니다.
믿음의 역사란 무슨 뜻입니까?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데 역사는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그 옛날 초대교회 핍박의 시절, 도미티아누스 황제 핍박의 시절에 믿음을 굳게 지킨 성도들의 보이지 않는 믿음의 힘이 오늘날 교회를 이토록 부흥하게 했습니다. 일제 강점기, 공산 정권 치하에서도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암흑 시절에 믿음을 굳게 지킨 우리 믿음의 선조들의 그 믿음이 오늘 역사를 이루어서 우리가 이렇게 편하게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도 환란과 핍박이 있었지만 믿음을 굳게 지켜서 역사를 이루는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기억한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사랑은 또한 수고를 이룹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명사로 알고 있으나 사실 사랑은 동사에 더 가깝습니다. 사랑은 몸으로 수고해야 합니다. 입으로만 때우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몸이 수고해야 그 사랑이 열매를 맺습니다.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손이 수고하지 않고 발이 달려가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가짜입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사랑하고 직접 열심히 수고를 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기억한다고 했습니다.
소망은 또한 인내를 이룹니다. 오늘은 비록 이렇게 고통스럽지만 미래에 대한 비전과 소망을 가지고 오늘의 현실을 인내하고 지키겠다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소망이 인내를 이루어서 바울의 기억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평생 목회하면서 수많은 교회를 개척하고 엄청나게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그의 기억 속에 가장 빛나는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였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떤 기억으로 이웃들에게 남고 있습니까?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한 사람들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까? 우리가 평생 동안 직장생활을 하고 신앙생활을 하면, 어떤 사람의 이름을 들으면 그 사람에 대한 이미지와 기억이 한꺼번에 떠오릅니다. 저 사람은 게으른 사람이야. 저 사람은 이기적인 사람이야. 저 사람은 말만 앞서고 행동하지 않는 사람이야. 저 사람은 참 악한 사람이야. 거짓말쟁이야. 저 사람은 정말 나쁜 사람이야. 그런 기억으로 남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분의 이름을 떠올리면,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떠올렸을 때 기억한 것처럼,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기억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방주에 탄 노아와 가족들은 잊혀진 존재라고 불안해하고 두려워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기억하셨습니다. 언약백성으로서 그들과 언약으로 묶여 있음을 확정해 주셨습니다. 객관적인 증거는 돈을 많이 벌거나 건강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 보혈의 권세 아래 있으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기억이 되었다면, 고넬료처럼 기도하고 구제해서 한 걸음 더 하나님의 기억이 되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처럼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를 이루어서 사람들에게도 좋은 기억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믿음의 백성으로 좋은 기억의 여운을 남기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