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하여 이르시되 (창8:13-22)
독일의 그림 형제는 어린이들을 위해 많은 동화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중에 "피리 부는 사나이"라는 작품도 있습니다. 이 책은 독일 하멜른 지방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설을 그림 형제가 엮은 것입니다.
하멜른 지방에는 쥐가 많았습니다. 쥐 때문에 시민들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곳곳에서 쥐들로 인해 그들의 삶이 위협받을 지경이었습니다. 거실에도 나타나고, 침실에도 나타나고, 욕실에도 나타났습니다. 시민들은 시장에게 몰려왔습니다. 진정을 해보았지만 시장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습니다. 그저 쥐들이 사라지기만을 기다릴 뿐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낯선 남자가 시청을 방문합니다. "제가 하멜른 시에 있는 쥐를 다 없애버릴 수 있습니다. 만약 제가 쥐를 다 처리하면 저에게 금화 천 냥을 주십시오." 그러자 시장은 금화 천 냥이 문제겠느냐며, 그보다 더한 것도 줄 수 있으니 쥐만 좀 없애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남자는 약속을 받고 시내로 갔습니다. 낡은 가방에서 피리 하나를 꺼내어 붑니다. 그러자 하멜른 시 곳곳에 숨어 있던 쥐들이 다 몰려 나왔습니다. 쥐들이 피리 부는 사나이 뒤를 따라갑니다. 그가 강 앞에까지 왔습니다. 거기서 크게 한 번 피리를 불자 쥐들이 모두 강으로 뛰어들었습니다. 하멜른 시의 쥐가 한 번에 다 사라졌습니다.
그는 다시 시청을 찾았습니다. "이제 약속한 대로 금화 천 냥을 주십시오." 그러자 시장이 안면을 바꾸었습니다. "뭐라고? 피리 한 번에 금화 천 냥이라니! 여기 오십 냥을 가져가시게. 이걸로 끝냅시다." 그는 끝까지 항의했지만 끌려 나오고 말았습니다.
그는 다시 시내 중심에 섰습니다. 다시 피리를 꺼내어 붑니다. 이제는 쥐가 아니라 하멜른 시에 있는 어린아이들이 몰려 나왔습니다. 피리 부는 사나이의 뒤를 따라서 하멜른에 있는 모든 아이들이 따라 나갑니다. 피리 부는 사나이는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코펜 산 깊은 동굴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 이후로 그 사나이를 본 사람도, 어린아이를 본 사람도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합니다.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아주 두렵고 무시무시한 이야기입니다. 이 동화의 교훈은 "약속을 잘 지키자"라는 아주 단순한 교훈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 당시에도 오늘 우리 사회에도 어른들의 세상에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자기가 한 말을 손바닥 뒤집듯이 뒤집어 버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사회를 살아가다 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말과 약속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습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과는 함께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함께하는 공동체가 귀하게 정해 놓은 약속, 공동체가 함께하고자 하는 약속, 개인 간의 약속, 이 모든 약속은 아주 중요합니다. 약속을 잘 지켜야 신뢰할 수 있고, 신뢰하는 사람과 함께 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인간 사이에도 약속이 이렇게 중요한데, 하나님은 당신이 하신 말씀을 지키는 백성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생명처럼 붙들고, 그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발버둥 치는 사람을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시고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노아와 노아의 가족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1. 말씀을 기다린 노아
먼저 13절과 14절을 보십시오. "육백일 년 첫째 달 곧 그 달 초하룻날에 땅 위에서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 지면에서 물이 걷혔더라. 둘째 달 스무이렛날에 땅이 말랐더라."
땅에 홍수가 나고 비가 내린 것은 노아의 나이 육백 세 되던 해 2월 17일이었습니다. 그때 하늘 문이 열리고 하늘에서 비가 쏟아졌습니다. 사십 일 내내 비가 내렸습니다. 낮밤을 가리지 않고 비가 내렸습니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이 다 쓸려 내려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백오십 일 동안 물이 창일했습니다. 그때까지 물이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에 물이 줄어들고 또 줄어들어서 방주는 땅 위에 정박하게 됩니다.
그리고 노아의 나이 육백일 세의 1월 1일에 땅 위에서 물이 걷혔습니다. 그러나 아직 땅이 마르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났습니다. 노아의 나이 육백일 세 2월 27일에야 땅의 물이 다 말랐습니다. 이제 자연이 사인을 준 것입니다. 노아와 노아의 가족들이 방주에서 나와도 좋다는 사인입니다.
얼마나 방주에서 나오고 싶었을까요? 노아를 비롯한 가족들은 일 년하고도 열흘 동안 방주 안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 기간 동안 밖에 나가고 싶어서 안달이 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와 노아의 가족들은 방주 뚜껑을 열고 새를 날려 보내기도 했습니다. 까마귀를 보냈습니다. 비둘기를 보냈습니다. 비둘기가 새 감람나무 잎사귀를 물고 왔습니다. 이제 이 땅에 생명의 기운이 다시 소생하게 되었다는 증거였습니다. 또 한 번 비둘기를 날려 보냈습니다. 그 비둘기가 이제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비둘기가 먹이 활동을 정상적으로 한다는 증거입니다. 먹고 살 것이 있기 때문에 방주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제는 노아를 비롯한 노아의 가족들도 방주 밖을 나가서 생명 활동을 하고 살 수 있게 되었다는 확실한 증거와 사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나오지 않습니다. 자연 만물이 이렇게 사인을 주는데, 이제는 나와도 된다고 외치고 있는데, 노아와 노아의 가족은 한 발짝도 방주에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15절과 1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까지 기다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셔야 노아와 노아의 가족들이 방주에서 나올 수 있다고 그들은 결심하고 결단했습니다. 정말 나가고 싶었지만 일 년 열흘 동안 그 안에 있는 것이 몹시 힘들었지만, 하나님이 아직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미루어 보면 노아와 노아의 가족들은 방주 안에서 말씀의 훈련을 잘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방주 안에 타고 있었던 시간들을 나누어서 생각해 보면 심리적인 변화가 자주 일어났습니다. 처음 사십 일 동안은 안도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방주 밖에 있었다면 저 합기 있는 사람들처럼 우리도 홍수에 휩쓸려 가버리고 말았을 텐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방주 안에 들어와서 은혜를 입어서 생명을 부지했구나!"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동력도 없고 돛도 달려 있지 않은 방주가 물 위를 떠다닐 때마다 그들은 불안했을 것입니다. "이 방주가 어디에 부딪치지는 않을까? 거대한 바위에 부딪혀서 산산조각 나지는 않을까?" 그것 때문에 걱정하고 불안했던 시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억하셨습니다. 노아와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물이 줄어들고 빠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시간이 지나서 방주가 무사히 땅 위에 정박합니다. 그때부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더니 이렇게 되었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얼마나 복되고 감사한 것인지"를 다시 한번 깨닫고 고백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대로 방주를 지으라고 하셨고, 노아는 백이십 년 동안 방주를 지었습니다. 치료를 또 기다리며 칠 일 동안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홍수가 났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은 그들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셨습니다. 물이 빠지게 하시고, 이제는 한 사람도 다치지 않고, 방주 안에 있는 생명과 짐승도 하나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다 안전하고 무사하게 이제는 땅 위에 정박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일 년 열흘 동안 방주에 있으면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졌음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말씀대로 이루시고 말씀대로 행동하시는 분이시구나! 당신이 하신 말씀을 반드시 지키고 이루시는 분이시구나!" 이것을 깨닫고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이제 "우리가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말씀하지 않으시면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 자연 만물이 우리가 나와도 된다고 말하고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지 않으면 결단코 움직일 수 없다." 이 결심을 하고 거기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1-1. 방주의 교훈
방주는 곧 교회라 하였습니다. 우리가 교회 공동체에서 훈련을 잘 받았다고 하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교회 공동체에서 믿음생활 잘하고, 하나님께서 "너는 정말 훌륭한 성도로구나, 너는 정말 믿음생활 잘하고 있는 나의 백성이구나" 이렇게 인정하시는 것은 유일한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 말씀보다 앞서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하지 않는데 움직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라 하지 않는데 내 뜻대로, 내 생각대로, 내 마음대로 행동하지 않아야 됩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생활을 오래 하는 것이, 믿음생활을 오래 한 것이, 내가 이 교회에서 오랫동안 믿음생활을 하는 것이 훈련 잘 받은 증거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직분을 가지고 있는 것이 훈련받은 증거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훈련 잘 받은 좋은 성도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말씀대로 행하고, 말씀하고 난 이후에 행동하고 움직이는 자라야 우리는 믿음생활 잘하는 성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말씀 후에 행동하라
2-1. 여호수아의 순종
여호수아 1장 1절과 10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여호수아가 그 백성의 관리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모세는 불세출의 지도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건져내고 구원한 민족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죽었습니다. 모세의 뒤를 이어서 여호수아가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도 철학이 있고 자기 비전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모아놓고 "내가 이렇게 하려고 합니다"라고 그 비전과 철학을 선포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 전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다음 움직이려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리고 나서야 여호수아가 백성의 관리들에게 명령했습니다. 자기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말씀을 그대로 백성의 관리들에게 전달했습니다. 이것이 여호수아의 성공 비결입니다.
여호수아서는 이런 패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노아가 성공한 사람이 된 이유, 여호수아가 성공한 지도자가 된 이유는 말씀하시고 난 이후에 움직인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이전에는 결단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말씀하신 이후에 행동하고, 말씀하신 이후에 움직인 것, 이것이 바로 그들의 성공 비결입니다.
2-2. 사울의 실패
그러나 성경을 보면 그 반대로 살아간 자들도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울입니다.
블레셋이 쳐들어왔습니다. 블레셋은 호전적인 민족입니다. 그들이 이스라엘과 전쟁할 때는 다섯 부족 연합체가 함께 힘을 합쳐서 전쟁합니다. 두려웠습니다. "과연 우리가 이들과 싸워서 이길 수 있을까? 과연 우리가 블레셋과 싸워서 견딜 수 있을까?"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습니다. 말씀하지 않습니다.
답답했습니다. 제사장의 에봇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가 입고 기도합니다. 우림과 둠밈으로도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습니다. 꿈으로도 말씀하지 않습니다. 어떤 선지자들을 통해서도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너무 답답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정말 지도자라면 그는 유일한 한 가지 선택만 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까지, 전쟁이 일어나서 그 자리에서 죽는다 하더라도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엎드려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엉뚱한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사무엘상 28장 7절을 보십시오. "사울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하니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신접한 여인, 무당을 말합니다. 사울은 하나님께 무릎 꿇고 여쭤봤는데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자 그만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신접한 여인, 무당을 찾아갔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무척 뻔뻔한 행동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그냥 좌시하지 않으십니다.
역대상 10장 13절을 보십시오.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침을 청하고..."
그가 죽은 이유는 하나님께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신접한 여인, 무당을 찾아가서 무당에게 가르침을 청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그는 죽은 것입니다. 왕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해도 되는 권리를 가진 것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가 이름 없는 한 사람이지만,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의 성도가 되려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인정받는 믿음의 백성이 되려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난 이후에 그다음 행동해야 됩니다. 이것이 노아처럼, 여호수아처럼 우리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 비결입니다.
2-3.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 옛날에 하나님은 모세에게도 직접 말씀하셨고, 여호수아에게도 직접 말씀하셨고, 노아에게도 직접 말씀하셨는데, 오늘 우리에게는 직접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꿈에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동하라는 말입니까?"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인 성경 말씀을 가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과거에는 기록된 말씀, 특별 계시인 성경 말씀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직접 당신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이제는 기록된 말씀인 특별 계시, 이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보편적으로 말씀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뜻이 이 성경 말씀 속에 고스란히 그대로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가지 더 의문이 생깁니다. "목사님, 성경은 아무리 읽어봐도 성경에는 내가 궁금한 것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나는 언제 돈을 벌 수 있는지 궁금하고, 주식투자를 지금 해야 할지 빼야 할지가 궁금하고, 나는 내 인생의 반려자가 이 남자인지 이 여자인지가 궁금하고, 나는 땅을 사야 할지 팔아야 할지가 궁금한데, 성경에는 그런 것이 하나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성경을 읽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까?" 그렇게 궁금한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적인 기본 생활을 하지 않는 분들이 하는 말입니다. 영적인 기본 생활은 한쪽에는 말씀, 한쪽에는 기도입니다. 말씀과 기도를 평소에 성실히 하시는 분들, 매일 성경 읽고 매일 기도하고 하나님과 소통하고 교통하는 분들은 어떤 특별한 선택의 상황이 생기면 그 말씀에 대한 응용력과 분별력이 생깁니다. "나는 지금 이때 어떻게 선택해야 되는지, 나는 지금 이때 어떤 결단과 어떤 결심을 해야 되는지, 하나님께서 진정 이 시기에 나에게 바라고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영적인 기본기가 갖추어져 있지 않으면, 영적 기본 생활을 성실하게 하지 않으면, 순간순간 선택의 순간에 길을 잃고 맙니다. 학교 수업을 성실히 하고 열심히 문제집을 풀고 공부를 제대로 한 학생이 응용 문제가 나와도 잘 풀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인생의 말씀과 기도의 양 축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으면 어떤 문제에도 분별력이 생깁니다. "이것이 내 욕심과 탐욕으로 일어나는 문제인지, 하나님께서 나에게 정말 원하고 바라시는 선택이 무엇인지" 우리는 분명히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서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먼저 앞세우려면 영적인 기본 생활인 성경 읽기와 기도,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노아 같은, 여호수아 같은 믿음의 백성이 될 줄로 믿습니다.
3. 예배의 우선순위
이제 하나님의 말씀대로 방주에서 나온 노아와 노아의 가족들이 가장 먼저 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20절을 보십시오.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방주에서 나온 노아와 노아의 가족들이 가장 먼저 한 것은 예배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를 여기에 대입시켜 보았습니다. "만약 나였다면 나는 방주에서 나와서 가장 먼저 무엇을 했을까?" 저는 깨끗한 물을 찾았을 것 같습니다. 깨끗한 물을 마시고 목욕했을 것입니다.
일 년 열흘 동안 방주에 살면서 짐승들과 함께 뒤엉켜 살았습니다. 짐승의 오물을 몸에 묻히고 살았습니다. 더럽습니다. 역겹고 힘이 듭니다. 깨끗한 물을 마실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방주에서 나왔으니 물을 시원히 마시고 몸을 깨끗이 씻자. 그리고 나서 예배 드리면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노아와 노아의 가족은 달랐습니다. 각자 자기들이 하고 싶은 것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일 년 열흘 동안 방주에 갇혀 있었는데, 지금 우리가 도착한 이곳이 어디인지 알고 싶었을 것이고, 하고 싶은 것도 너무 많았을 텐데, 그들은 다른 것 다 접어두고 가장 먼저 예배 드렸습니다. 우선순위가 예배였습니다.
우리 인생에 예배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가 되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예배가 되어야 함을 하나님께서 매번 말씀하시고 끊임없이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생에는 예배보다 더 중요하고 예배보다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예배를 하나의 선택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힘든 시기를 지나다 보면 많은 것을 잃게 됩니다. 많은 것이 사라지고 많은 것이 없어집니다. 물질도, 경제도, 국가 경쟁력도, 인간관계도 이전과 달라집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다 눈에 보이는 것들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는데, 바로 우리의 예배 생활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 얼마나 집중하시고 얼마나 간절히 드리십니까? 처음에 우리가 간절함과 감격으로 예배드릴 때, 그때 그 간절함이, 그 감격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제는 무뎌지고 이제는 무너지고, 예배보다 더 우선되는 우선순위가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 일입니다. 정말 우리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우리 인생의 최우선 순위가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노아와 노아의 가족처럼 자기들이 하고 싶은 것이 정말 많은데, 이것들 다 포기하고, 이것들 다 내려놓고, 가장 먼저 예배 드린 노아와 노아의 가족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3-1. 무릎 꿇는 예배
또 한 가지, 노아와 노아의 가족이 이 자리에서 예배 드린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한 행동입니다. 창세기 2장 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라."
하나님이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곱째 날을 쉬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씀은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복되게 하다"의 히브리어 바라크(בָּרַךְ)는 "무릎을 꿇다"라는 뜻입니다. 무릎을 꿇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릎을 꿇는 자들을 하나님은 복되게 하시고, 그들을 카도쉬(קָדוֹשׁ),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무릎을 꿇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살겠다는 결단이기 때문입니다. 노아와 노아의 가족들은 각자 자기가 원하는 것으로 달려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관절을 굽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결단하고 예배 드렸습니다. "이제 우리는 교만하게 살지 않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리겠습니다."
이들이 왜 이렇게 했을까요? 노아 시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다 망하고 홍수에 쓸려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예배 공동체를 뛰쳐나왔습니다. 무릎을 꿇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에 취한 것, 그 아름다움이 무엇입니까? 용사가 되고 명성을 얻는 아름다움입니다. 유명해지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고, 사람들 사이에 칭송받고, 유명해지고, 높아지는 것, 그것을 선호했습니다.
예배드리고 무릎 꿇고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이 나약해 보이고 별볼일 없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배 자리를 박차고 나와서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용사가 되기를 갈망했고, 유명해지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어떻게 됐습니까? 한 사람도 남지 않습니다. 다 홍수에 쓸려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자들입니다.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자들, 하나님은 그들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노아와 노아의 가족들은 이렇게 결단한 것입니다. "하나님, 이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옛날 망해버린 하나님의 아들들, 예배 공동체를 파괴한 그들처럼 살지 않겠습니다. 사람의 딸들처럼 교만하게 용사가 되고 명성을 얻고자 하는 자로 살지 않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겸손한 자로 살겠습니다." 이 결단이었습니다.
3-2. 바리새인의 교만
예수님 시절에도 교만한 자들이 많았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0절과 11절을 보십시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바리새인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성전에 올라와서 예배 드리며 기도하는 모습이 서서 따로 기도합니다.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자기의 자아를 꺾고 예배 드리지 않습니다. 서서 따로 기도합니다. 얼마나 교만합니까?
차라리 사람의 딸들이나 세상에서 자기 교만대로, 자기 멋대로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 쳐도, 예배 드리면서, 성전에 나와서 예배 드리면서도 자신의 교만에 무릎을 꺾지 않습니다. 서서 따로 기도합니다. 이런 자들이 예배드리는 자들 중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늘날도 성전에 나와서 예배 드린다 하면서도 변하지 않습니다.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자신의 자아를 꺾지 않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꺾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욕망은 빳빳이 고개를 쳐들고 있는 채로 "하나님, 내 욕망을 채워 달라"고 하나님께 요구하고 부탁합니다. "저는 돈을 더 많이 벌고 싶습니다. 하나님, 내 욕심을 채워 주십시오. 나는 저 사람을 미워하고 저 사람을 싫어합니다. 저 사람을 증오합니다. 하나님, 저 사람을 저주해 주십시오."
예배는 자신의 자아를 꺾는 자리입니다. 예배 드리고 나면 사람이 바뀌어져야 됩니다. 사람이 변해 줘야 됩니다. 이런 사람이었는데, 무릎을 꿇고, 관절을 꺾고, 자신의 자아의 허리를 꺾어서 예배드리고 난 이후에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수많은 예배를 드렸지만, 여전히 "내 자아는 그대로이고 나는 변하지 않았습니다"라면, 우리는 똑같이 바리새인들처럼 서서 따로 기도하고 엎드리지 않고 무릎 꿇지 않는 자들이라는 증거입니다.
4. 예배의 축복
노아와 노아의 가족들이 훌륭한 것은 방주에서 나와서 우선순위로 예배를 드린 것과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예배 드리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 사람의 딸들처럼 살지 않겠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살겠습니다" 이 결단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결단을 한 노아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렇게 복을 주십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두 가지 축복을 주셨습니다. 다시는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는 약속, 이 약속이 구체화된 것이 9장의 무지개 언약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예배는, 정말 제대로 드린 예배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평화를 가져옵니다.
또한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이 어려서부터 악한 것을 인정하셨습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는데 그 자유의지를 가지고 인간은 잘못 사용해서 죄가 들어와서 악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나는 너희가 추하거나 악한 존재가 되었건, 연약한 자이건, 나는 있는 모습 그대로 너를 수용하고 받아들인다." 하나님의 수용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셨습니다. 예배는 이런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평화와 우리의 있는 모습을 그대로 하나님께서 받아 주십니다.
오늘 노아와 노아의 가정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마음에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말씀하시기 전에 절대 먼저 움직이지 마십시오. 평소에 믿음생활을 성실히 감당하여서 선택의 순간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예배가 최우선 순위가 되고, 예배보다 앞서는 것은 없기를 바랍니다. 또한 예배를 통해서 무릎을 꿇고, 자아를 꺾고, 교만을 내려놓고, 겸손하게 하나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