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을 주시다 (창9:1-7)
임진왜란은 우리나라 역사상 그 어떤 전란보다도 피해가 막심했던 최악의 전쟁이었습니다. 임진왜란은 7년 동안 지속되었는데, 그중 5년을 재상으로 지낸 분이 바로 서애 유성룡입니다. 이 분은 훌륭한 재상인 동시에 탁월한 군사 행정가였습니다. 사실 이 분이 발탁한 인물들이 임진왜란을 그나마 막아내고 이겨낸 장본인들입니다. 권율 장군, 이순신 장군 같은 불멸의 용사들을 유성룡이 발굴하여 국가의 근간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유성룡의 참된 위대함은 전쟁 때보다 전쟁 이후에 더욱 빛났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나라를 살펴보니 그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전란으로 온 나라가 황폐해졌고, 백성들의 삶의 터전은 처참하게 무너져 있었습니다. 깊이 성찰했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왜 이런 전란이 일어났는지, 우리는 왜 이를 막지 못했는지, 전쟁 중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앞으로 이런 참화를 막으려면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그 모든 것을 상세하게 기록하여 펴낸 책이 바로 징비록입니다.
그는 징비록 서문에서 자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지난 일을 경계하여 앞으로 환란이 생기지 않도록 대비한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내가 징비록을 지은 까닭이다. 나처럼 보잘것없는 사람이 어려운 시기에 중대한 임무를 맡아 나라가 위태롭고 쓰러지는 형편인데도 제대로 일으켜 세우지 못하였으니, 그 죄는 죽어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그는 이렇게 겸손하게 기록했지만, 사실 유성룡이라는 분이 계셨기 때문에 그나마 임진왜란이 그 정도 피해를 보고 끝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인 사실은 이 분이 이렇게 심혈을 기울여서 다시는 이 땅에 이런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반성하며 기록한 징비록이 그의 사후에 조선에서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그 책을 읽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과거에 잘못한 것을 돌이키고 들추어 내고 살펴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프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것을 고치기 위해서는 과거의 아픔을 직면해야 되고 직시해야 되고 다시 돌이켜야만 했지만, 백성들도 위정자들도 아무도 징비록을 들추어 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책이 역사의 전면에 다시 나타난 것은 1712년입니다. 조선의 사신들이 일본 오사카의 거대한 상업지구에 갔는데, 그곳에 큰 책방이 있었습니다. 책방에서 날개 돋친 듯이 팔리는 책이 있어서 사신들이 책을 구입하려고 줄을 섰습니다. 구입하고 보니 조선 징비록이었습니다. 어떻게 그 책이 1712년 일본 오사카에서 성황리에 팔리고 있었느냐 하면, 1695년 일본 교토에서 조선 징비록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기 때문입니다.1695년 당시 출판될 때 열여섯 권의 책으로 나뉘어져 세상에 나왔습니다.
조선에서 사라진 책이 어떻게 일본에서 그토록 팔릴 수 있었겠습니까. 일본인들이 임진왜란의 패배를 뼈아프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압도적인 군사력과 총칼을 갖추고 7년 동안 모든 것을 쏟아부었는데도 조선을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무엇 때문인가, 왜 그랬는가, 다시 조선 정벌에 나선다면 그때는 반드시 승리하리라는 것이 그들의 속셈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재상의 눈으로 전쟁을 바라보고 반성한 것을 입수해서, 다음에 침략할 때는 꼭 이기리라 다짐하면서 책을 읽어 갔습니다.
이것은 비단 일본뿐이 아닙니다. 1880년에 중국의 학자 양수경은 조선 징비록을 중국에서 출판했습니다. 중국인들 입장에서 조선과 일본의 전쟁은 흥미로운 이야기거리입니다. 어떻게 일본이 압도적인 군사력을 가지고 조선을 정복하지 못했을까, 조선은 어떻게 전쟁 이후에 그 다음 대비책을 세웠을까, 제3자인 중국의 입장에서 징비록을 분석하고 파악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피해자인 당사자 우리는 징비록에 대해서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임진왜란 이후 400여 년이 지나 우리는 다시 일본에 국권을 침탈당했습니다. 수치와 수모를 겪었고, 수많은 동포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정직하게 돌아보면 이것은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준엄한 교훈입니다. 과거를 돌아보지 않고 반성하지 않는 민족에게 미래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돌이키지 않고 반성하지 않으면서 또다시 나라를 잃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숙명입니다. 돌이켜 고쳤더라면 그런 치욕은 당하지 않았을 터인데, 그때 고치지 않았기 때문에 400년 후 36년간의 일제 강점기를 겪어야 했습니다.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여전히 일본에 대한 반일감정을 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감정에 치우쳐 있을 뿐입니다. 조목조목 따져 보지 않습니다. 그들이 왜 강했는지, 우리는 왜 나라를 잃어야 했는지, 지금은 어떠한지 정직하고 냉철하게 분석하지 않습니다. 그저 감정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와 정치의 영역만이 아니라 우리의 영적인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최초의 인류가 실패한 이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아담과 그의 후손들이 실패했기에 하나님은 홍수로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노아와 그 가족에게 세상을 재창조하시면서 너희는 그렇게 살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쓰러지고 넘어지고 잘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우리 삶을 정직하게 관조하고 성찰해야 합니다. 고쳐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노아와 그 가족이 방주에서 나와 가장 먼저 한 일은 예배였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럼에도 그들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하는 노아와 그 가족을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시고 가장 중요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 1절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는 세 가지 핵심 단어가 등장합니다. 생육, 번성, 충만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이 말씀이 우리 귀에 익숙한 것은 자주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도 동일한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첫 사람 아담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똑같지 않습니까? 생육, 번성, 땅에 충만하라.
1. 영적인 충만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아담에게 하셨던 말씀을 노아에게 그대로 반복하시는 것일까요? 단어 하나 바꾸지 않고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동일하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담과 그 후손들이 이 명령을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첫 인류가 실패했으므로 하나님은 그 실패를 거울 삼아 다시 시작하시면서, 노아와 그 후손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이 명령을 반드시 이루어 내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1-1. 육체적 번성의 한계
그렇다면 아담과 그 후손들은 이 명령을 어떻게 실천하지 못했을까요? 그들은 생육, 번성,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을 오직 육체적으로만, 생물학적으로만 이해했습니다. 아담의 후손, 특히 가인의 후손 중에 라멕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결혼 제도를 파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한 남자와 한 여자로 가정을 이루라고 하셨는데, 그는 아내를 둘이나 두고 자녀를 낳았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을 라멕은 잘 실행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내용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은 악한 자가 라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담, 셋, 에노스의 후손인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에 현혹되어 예배 공동체를 뛰쳐나갔습니다. 그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하고 자녀를 낳았습니다. 생물학적으로, 육체적으로는 생육과 번성의 명령을 성실히 수행했지만, 영적으로는 생육하지 못했고, 영적으로는 번성하지 못했고, 영적으로는 충만하지 못했습니다.
노아 시대 그 악했던 시절을 예수님은 이렇게 평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장 38절을 보십시오.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 심판이 임하기 직전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들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창세기 1장 28절과 9장 1절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알맹이가 빠져 있습니다. 육체적으로만 번성하고, 육체적으로만 생육할 뿐, 영적인 것은 빠져 있습니다.
1-2. 포악함이 충만한 세상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창세기 6장 11절과 13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포악함이 땅에 가득했습니다. 여기서 '가득하다'는 히브리어로 '말레'(מָלֵא)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 '말레'가 창세기 1장 28절과 9장 1절에서 '땅에 충만하라' 할 때 쓰인 '충만하다'와 동일한 단어라는 점입니다. 육체적으로만 생육하고 번성했기에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영적으로 생육하고 번성했다면 영적인 것으로 땅에 충만했을 터인데, 영을 빼버렸기에 이런 결과를 맞이한 것입니다. 그 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땅과 함께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 홍수 심판이 일어난 것입니다.
1-3. 영과 육의 온전함
하나님은 사람을 육체와 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흙으로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은 생령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육체만으로도 사람이지만, 영이 함께할 때 비로소 온전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육체만 살고 있지 않습니까? 육이 원하는 것만 좇아 산다면 그것은 잘못된 인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과 육이 온전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갑니다. 돈을 많이 벌고, 집을 넓히고, 높은 지위에 오르고, 권세를 얻기를 원합니다. 좋은 집을 사고 좋은 차를 타고 높은 자리에 오르면 생육하고 번성하여 하나님의 복을 받은 성공한 인생이라고 자부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영혼이 어떻게 되었는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영혼은 어떻습니까? 우리 영혼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육하고 번성하고 있습니까? 우리 영혼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해 있습니까?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아무리 넓은 집에 살아도, 높은 지위에 올라도 마음의 허탈함은 지울 수 없습니다. 30년 전과 비교할 때 오늘 우리는 물질적으로 얼마나 풍요롭습니까. 그런데도 이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불행하다고 느낍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1-4. 세속화된 교회의 위험
이것을 교회에 적용해 보십시오. 세속화된 교회는 생육과 번성을 세속적으로만 이해합니다. 교인이 많이 모이면 생육하고 번성했다고 여깁니다. 교회 곳간이 가득 차고 헌금이 넘쳐나면 교회가 복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성도들의 영적 상태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회가 가득 차 있는지, 말씀 안에서 우리가 진정 행복한지, 그것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이 빠진 채 숫자만 많고 창고만 가득 차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 심판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1-5. 참된 충만의 의미
이사야 선지자는 참된 충만의 개념을 다시 정의해 줍니다. 이사야 11장 9절과 33장 5절을 보십시오.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여호와께서는 지극히 높으시니 그는 높은 곳에 거하시며 정의와 공의를 시온에 충만하게 하심이라."
여기서 '충만하다', '말레'라는 단어가 두 번이나 등장합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해지고, 정의와 공의가 세상에 충만해진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충만입니다. 영적으로 생육하고 영적으로 번성하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교회 공동체에 가득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육하고 번성하면 이 세상에 정의와 공의가 충만할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성령으로 충만해질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영혼을 깊이 살펴보십시오. 우리 영혼이 성령으로 충만합니까? 여호와를 아는 지식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우리 가정은, 교회는, 이 나라와 민족, 내가 일하는 일터는 무엇으로 충만해 있습니까? 만약 여호와를 아는 지식으로 충만하지 않다면, 정의와 공의로 충만하지 않다면, 우리는 여전히 육체적인 일에만 매몰된 존재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 자신을 다시 한번 점검하시고, 아담과 그 후손의 실패를 돌이켜 보시고,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믿음의 백성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생명을 존중하라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 가족에게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들이 방주에서 나와 보니 세상의 모든 것이 쓸려 내려가고 없었습니다. 이제 씨를 뿌리고 그것이 자라 나무가 되어 열매를 맺으려면 한참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육식을 허용하셨습니다. 짐승을 먹어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다만 그중에 한 가지 중요한 단서를 붙이셨습니다.
2-1. 피는 곧 생명
4절과 5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피는 곧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짐승을 먹되 피째 먹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최소한 그 짐승에게도 생명이 있으니, 피만큼은 소중히 다루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기서 더 나아가 사람의 생명을 해하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그 이유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여기서 '흘리다'라는 말을 히브리어로 보면 '쇼페크'(שֹׁפֵךְ)라는 현재분사가 쓰였습니다. 원형은 '샤파크'(שָׁפַךְ)입니다. 히브리어 문법에서 현재분사는 현장감을 생생히 드러내고자 할 때 사용합니다. 피를 흘리는 것을 왜 현장감 있게 표현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그 옛날 가인이 돌을 들어 동생 아벨을 쳐 죽일 때, 아벨의 피가 흐르는 그 현장을 직접 지켜보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너희가 형제를 미워하여 상해를 입히고 그의 피를 흘리게 하면, 바로 그 순간 내가 현장에서 지켜보고 있으니 절대로 형제의 몸에 손대지 말라, 피 흘리지 말라.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2-2. 가인의 후손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으로 피의 사건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가인의 후손 라멕도 그러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상처 때문에 소년을 죽이고 사람을 죽였습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용사가 되기를 꿈꿨습니다. 고대의 명성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용사란 어떤 자입니까? 전쟁에 능한 자들입니다. 사람을 함부로 해치고 죽이는 자들입니다. 자기 욕심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 방해되는 모든 사람을 제거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명성을 얻었고 고대의 용사가 되었습니다.
이런 짓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명하십니다. 그것 때문에 첫 인류인 아담과 그 후손이 멸망당했으니 너희는 결코 그렇게 살지 말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을 함부로 해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3. 인격의 살해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손에 돌을 들고 가인처럼 사람을 죽이지 않습니다. 칼이나 흉기를 들고 사람을 찌르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살인과 무관한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일터에서 내뱉는 말, 가정에서 내뱉는 말, 하나하나의 행동이 타인의 인격을 살해하는 것일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세상이 바로 그런 세상이 되었습니다. 극단적인 자기 중심성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 예외가 아닙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질투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질투의 뿌리를 파고 들어가면 극단적인 자기 중심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예배는 받으시고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내 예배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하나님은 왜 내 예배를 받지 않으시는지 성찰해야 합니다. 그런데 가인은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반성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배 받은 아벨을 질투하고 미워했습니다. 그 때문에 살인을 저지른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비극적인 사건들을 보십시오. 누군가의 사망으로 비로소 세상에 알려진 사건들입니다. 만약 끝까지 견뎠다면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그 고통 속에 지내야 했을 것입니다. 지속적이고 의도적인 가해가 계속되었습니다. 그것 자체가 이미 사람을 인격적으로 살해하는 행위입니다. 주변의 책임자들은 신고를 받고도 적절히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리 보전에만 급급했습니다. 은폐에만 골몰했습니다. 모두가 한 패거리가 되어 한 사람을 인격적으로 살해한 것입니다. 모두가 공범입니다.
우리 사회가 이런 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학대하고 자녀가 부모를 학대하는 일이 이제는 놀랄 만한 뉴스거리도 되지 않습니다. 형제자매 간에, 가족 간에 서로 폭행하고 죽이는 일이 뉴스에 나와도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이미 일상의 사건 사고 중 하나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극도의 이기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2-4. 교회 공동체의 성찰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 공동체에서도 여전히 같은 갈등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 수십 년간 신앙생활하며 직분을 맡으신 분들이 이제 막 신앙의 길에 들어선 분들에게 함부로 말합니다. 말 때문에 상처받는 분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 말 한마디 한마디가 형제를 사랑하고 지체를 아끼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쏟아내어 사람에게 상처를 줍니다. 이것은 곧 인격을 죽이고 살해하는 행위입니다. 우리 손에 칼이 없어도, 돌이 없어도 혀로, 말로, 행동으로 사람을 살해하는 일에 공범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2-5.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며칠 전, 제자들을 모두 불러모으셨습니다. 제자들 앞에 무릎 꿇고 앉으셔서 한 사람 한 사람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만류했지만 주님은 묵묵히 그 일을 계속하셨습니다. 그중에는 가롯 유다도 있었습니다. 주님은 유다의 발도 깨끗이 씻어 주셨습니다.
그 후에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요한복음 13장 14절과 15절입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십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죄인들 앞에 무릎 꿇고 그들의 발을 하나하나 씻어 주신 것은 본을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서로 사랑하라고 예수님께서 친히 보여 주신 것입니다.
부모님들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 연로하신 부모님이 자녀들을 불러놓고 유언으로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꼭 돈 많이 벌어라, 출세해라, 성공해라, 이런 말씀을 하지 않습니다. 서로 사랑해라, 화목해라, 우애 있게 지내라, 그 말씀만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모 입장에서 자녀끼리 싸우는 것만큼 가슴 아픈 일이 없습니다. 누구 편을 들겠습니까? 모두가 내 자식인데, 서로 화목하고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부모에게는 가장 큰 행복입니다. 비록 돈을 많이 벌지 못해도, 세상에서 대단한 인정을 받지 못해도, 서로 아끼고 사랑하면 그것이 부모에게는 최고의 기쁨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십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내가 그토록 미워하는 그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내가 그를 미워하고 저주하고 그의 인격을 살해하여 피해를 끼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직전에 황금을 모아라, 출세하라,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마다 달란트가 다르고 능력이 다릅니다. 재능이 많은 사람도 있고 적은 사람도 있습니다. 능력의 차이 때문에 열심히 봉사하고 싶어도 못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나이가 많아도, 젊어도, 능력이 부족해도 사랑은 할 수 있습니다. 내 자아와 자기 중심성을 내려놓기만 하면 사랑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첫 인류의 실패, 형제에게 피를 흘리게 한 그 죄악을 다시 한번 돌이키게 하시며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명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실패하지 않는 인생을 살려면, 무엇보다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고, 서로 손을 잡아 주며 사랑을 세워 나간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귀한 은혜가 우리 인생 위에 차고 넘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첫 인류인 아담과 그 후손들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을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육체적으로만, 생물학적으로만 이루었을 뿐입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으로 세상을 채우지 못했고, 정의와 공의로 세상을 충만하게 하지 못했으며, 성령으로 자신을 가득 채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실패했습니다.
주여, 우리로 하여금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이 말씀을 영적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여호와를 아는 지식으로 우리를 채워 주시고, 성령으로 가득 채워 주시며, 정의와 공의로 세상을 채워 가는 믿음의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피 흘리지 말라 하시고 사랑하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대로 형제를 내 몸같이 사랑하게 하시고, 그를 존중하며,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대로 발을 씻어 주고 서로 사랑하는 믿음의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과거의 실패를 돌이키고 회복하여, 두 번 다시 실패하지 않는 믿음의 백성으로 세워 주옵소서.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성공적인 삶만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