덮어주다 (창9:18-23)
영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인물은 연예인이나 운동선수가 아닙니다. 바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입니다. 그분은 1926년생으로 95세입니다. 27세 되던 해인 1953년에 영국 여왕의 자리에 올라 오랜 세월 그 위치를 지켜왔습니다. 단순히 영국 여왕이기 때문에, 지위 때문에 영국인들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이 존경받을 만하고 사랑받을 만하기 때문입니다.
여왕이 되기 전 공주 시절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습니다. 영국군의 일원으로 자원입대해서 수송병으로, 운전병으로 복무했습니다. 적군의 포탄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장차 여왕이 될 분이 트럭을 몰고 수송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영국 국민들에게는 큰 감동이요 기쁨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영국인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친히 실천하는 여왕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여왕은 여왕이 된 이후에 사소한 잘못과 사소한 허물은 덮어주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1991년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여왕을 백악관으로 초대한 일이 있습니다. 회담을 마치고 백악관 뜰에서 연설을 하게 되었습니다. 부시 대통령이 188센티미터이고 여왕의 키가 163센티미터입니다.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경우라면 연단 두 개를 따로 준비해서 두 분의 키 높이에 맞추어야 합니다. 하지만 백악관은 이를 놓쳤습니다. 하나의 연단에서 먼저 부시 대통령이 연설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여왕이 연설을 하는데, 키높이 연단도 준비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마이크가 얼굴을 완전히 가려버렸습니다. 이 모습을 본 영국인들은 분노했으나 여왕은 이 자리에서 당당하게 자기가 할 말을 다 하고 내려왔습니다. 오히려 당황한 쪽은 부시 대통령과 백악관이었습니다. 연설 이후에 대통령과 백악관이 공식 사과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여왕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럴 수도 있다는 식이었습니다.
또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여왕이 사는 윈저 궁에 중국 고위관료를 초대해서 식사를 대접하고 있었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식사 이후에 디저트를 먹을 때 과일을 만지기 전에 손을 씻을 수 있도록 핑거볼이라는 작은 그릇에 물을 담아 줍니다. 이 물은 마시는 물이 아니라 손을 씻는 물입니다. 그런데 중국 관리가 이를 모르고 그만 마셔버렸습니다. 여왕이 보고 있다가 따라서 핑거볼에 담긴 물을 마셨습니다. 함께 그 자리에 있던 좌중들, 배석한 사람들도 함께 핑거볼에 담긴 물을 마셨습니다. 뒤늦게 여왕의 진심을 알게된 중국 관리가 자기가 배려받고 대접받았다는 사실에 크게 감동하여 깊은 감사를 전했습니다.
이런 여왕을 영국 국민들이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정치인들의 세계는 아주 사소한 잘못으로, 사소한 실수로 정치적 생명이 끝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물어뜯는 통에 견딜 수가 없습니다. 아주 작은 것까지도 그 사람의 정치적 생명줄을 끊어버리는 이 악한 정치 바닥에서 여왕이 보여준 품격은 영국 국민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들추어내는 사람이 있고 덮어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 말씀에 보면 노아의 잘못을 대하는 아들들의 두 가지 상반된 태도가 나옵니다. 함은 들추어내는 사람이고, 셈과 야벳은 덮어주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함의 길에 서 있는지 셈과 야벳의 길에 서 있는지,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누구의 길을 따라가야 할지를 함께 깨닫고 결단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 영적 긴장을 놓친 노아
먼저 19절과 20절을 보십시오. "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홍수가 지나갔습니다.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노아의 세 아들들은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에 따라서 열심히 자손을 낳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이제는 생육, 번성, 충만의 말씀을 두고 열심히 노력하고 심혈을 기울입니다.
노아도 모처럼 여유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습니다. 사실 그가 홍수 이전에는 방주를 120년 동안 짓느라 먹고 살기에, 입에 풀칠하기에 바빴습니다. 포도 농사 정도는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여유가 없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홍수가 다 끝나고 삶의 여유가 찾아옵니다. 농사뿐만 아니라 목축도 하고 포도 농사도 지어서 삶의 여백을 채워가는 중입니다. 이토록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나 할 정도로, 이토록 평안한 시절이 있었나 할 정도로 노아에게도 이제는 태평성대의 세월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이어서 우리가 볼 때 깜짝 놀랄 만한, 이 사람이 노아가 맞나 할 정도의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집니다. 21절을 보십시오.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원래 이런 사람이 술 마시고 취해서 벌거벗고 누워 있으면 이상할 것도 아닙니다. 원래 그랬으니까, 항상 그런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노아는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노아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충격이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굉장히 당혹스럽습니다.
노아는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에 취해서 예배 공동체가 완전히 파괴되었을 때 노아 단 한 사람만 예배 자리를 지켰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의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친히 동행했습니다. 120년 동안 방주를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라고 하신 대로 하나도 빠짐없이 다 준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던 노아가 이렇게 술에 취해서 쓰러져서 인사불성이 되어서 벌거벗고 누워 있는 이 모습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노아가 이렇게 된 이유는 영적인 긴장감을 한순간 놓쳐버렸기 때문입니다. 영적 긴장감을 놓치면 영적인 예민함이 떨어지고, 영적 예민함이 떨어지면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이 무뎌집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그 엄청난 사람들 중에 하나님은 노아 한 사람하고만 소통하셨습니다. 이유는 노아가 영적으로 예민해서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고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항상 영적으로 긴장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죄에서 떠나야 합니다. 술에 취할 것이 아니라 성령의 충만함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노아는 이제는 다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홍수 심판도 끝나고 두 번째 창조가 이루어지고 이제는 먹고 살만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분은 그만 한순간 영적 긴장을 놓치는 순간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보여주지 말아야 될 자신의 추한 모습을 자기 자녀들에게 보여주고 만 것입니다.
1-1. 다윗의 실패
이것은 노아만 겪는 문제가 아닙니다. 믿음의 위인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문제는 언제든지 얼마든지 찾아올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다윗입니다. 사무엘하 11장 1절과 2절을 보십시오.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에게 속한 그의 신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싸니라 그러나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 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전쟁해야 될 때가 됐다는 뜻입니다. 국지전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다윗은 백성들과 함께 전쟁터로 가지 않고 왕궁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제는 나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요압 장군이 아마 말했을 것입니다. "왕이시여, 이 정도는 제가 가서도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습니다. 왕은 그 옛날 사울에게 쫓겨 다니던 시절의 왕이 아니고, 유다 지파 한 지파의 왕이 아니고 통일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왕이 이런 정도의 일에는 나갈 이유가 없습니다. 이제는 옥체를 보존하십시오. 그냥 여기에 머물러 계십시오."
이 말에 다윗은 그만 동의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목자 정체성을 가진 왕입니다. 목자는 양들의 앞장서서 그 일을 진행하는 사람입니다. 양들은 전쟁터로 몰아놓고 자기는 왕궁에서 편안하게 지내라고 하나님께서 그를 왕으로 세운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백성들은 전쟁하고 있는데, 목숨 걸고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는데, 그는 한숨 늘어지게 자고 저녁이 되어서 일어났습니다. 해가 떨어진 이후에 일어나서 왕궁 옥상을 거닐고 있습니다. 저 길 건너편에 한 여인이 목욕하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태만과 게으름으로부터 안목의 정욕이 찾아왔습니다. 여인을 데려왔습니다. 간음 죄를 범합니다. 간음 죄를 은폐하기 위해서 사람을 죽입니다. 살인까지 했습니다. 한순간 그의 긴장이 무너지는 그 순간 그는 간음한 사람이 되었고, 살인자가 되었고, 네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 한 십계명의 계명까지 범하게 되었습니다. 열 가지 십계명 중에 순식간에 세 가지나 범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간음한 사람, 살인한 사람, 네 이웃의 아내를 탐한 사람. 순식간에 찾아온 범죄가 아닙니까?
이런 사람을 어찌 우리가 다윗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시편 23편의 저자입니다. 시편 150편 중에 73편이나 남긴 사람입니다. 그는 광야에서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도 광야의 영성을 붙들고 잃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을 죽일 수 있었는데도 사울의 옷자락만 베었고 사울의 생명을 존중해 주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한순간 정욕에 눈멀어서 간음한 사람, 살인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1-2. 여호수아의 실패
"그러므로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바울이 말씀한 것처럼 한순간 영적 긴장을 놓는 순간 죄는 순식간에 우리에게 찾아오고, 우리의 마음에 둑이 무너지는 순간 우리의 행위는 생각지도 못하게 이런 지경까지 가고 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어떤 사람입니까? 여호수아의 인생을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이후에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여리고성 전투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병력으로는, 그들의 군사력으로는 그 당시 가나안 땅 48개의 성읍 중에 가장 견고한 여리고성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정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엎드려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지혜를 달라고, 이 성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시기 전까지는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답을 주셨습니다. 하루에 한 바퀴씩 돌고 마지막 날은 일곱 바퀴 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의 병력 손실도 없었습니다. 여리고성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런데 곧장 돌아서서 작고 작은 아이 성 전투에서 그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전에 자기가 직접 공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진두에 서서 자기가 지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36명이나 죽었습니다. 그렇게 큰 성 여리고성 전투에도 한 사람도 피 흘리지 않았는데, 작고 작은 성 아이 성 전투에서 서른여섯 명이나 전사자가 나왔습니다. 철저하게 실패한 것입니다. 이제 다 산 줄로 생각했는데, 다 되었다고 생각하고 영적 긴장의 끈을 놓는 순간 그도 실패한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1-3. 영적 긴장의 필요성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제 다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제 다 이루었다고, 이제는 살 만하다고. 그 순간 악한 사탄의 영은 우리 마음속에 자리를 잡고 우리를 죄와 악으로 끌고 갈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것은 기도하는 모범입니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 새벽 미명에 주님은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제자들은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 예수님 뒤를 따라 기도하러 갔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아닙니까? 하나님과 동등한 분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왜 이 땅에 오셔서 기도해야만 했을까요?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지만 완전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인간의 본성에 내재되어 있는 게으름과 나태함과 죄성이 문득 솟아납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은 그 인간의 죄성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분에게 주신 십자가 사명을 이루지 못할까봐, 주님은 잠시라도 영적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새벽 아직도 밝기 전 미명에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도 기도하셨는데, 예수님도 영적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겟세마네 동산까지 가셔서 기도하시고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는데, 우리는 왜 기도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감히 뭐라고 이제 다 되었다고 생각하고, 이제는 나도 좀 즐기자고 생각하고 살고 있습니까?
옛날에 힘들 때, 정말 가난하고 어려울 때, 먹고살기 걱정하고 살 때, 자녀들이 우리 속을 썩일 때, 그때는 눈물 마를 일이 없이 매 순간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고 간구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녀들이 대학 가고, 졸업하고, 취직하고, 시집장가 가고, 이제 우리도 먹고 살 만하고, 또 노아처럼 한바탕 홍수가 다 지나고 나니 이제 우리도 포도 농사나 지으며 여생을 즐기고 살자, 이제는 먹고 마시며 지금까지 누리지 못했던 것 즐기고 살자. 그 순간 악한 사탄은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 가는 그 날까지, 그 순간까지 영적 긴장의 끈을 놓지 말고 영적 예민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셔야 합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우리 중에 어떤 분들은 "목사님, 그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10년, 20년, 30년 바짝 긴장하고 살았다면 이제 좀 편하게 살 때도 됐는데, 이제 좀 편하게 놓고 살 때도 됐는데, 그렇게 사는 것 너무 딱딱하지 않습니까?"라고 말씀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건 모르고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 가는 그날까지 영적 긴장을 가지고 영적인 예민함으로 하나님과 깊은 소통과 관계 가운데 사는 큰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 기쁨을 누려본 자만 아는 기쁨입니다.
세상에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이상하게 바라봅니다. 주일날 놀기 좋은 날 예배당에 예배드리러 가고, 새벽마다 기도하러 가고, 항상 하나님께 순종하고 교회 중심으로 사는 사람을 답답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의 비밀을 간직한 자들입니다. 그렇게 살아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 크고 놀라운 은혜를 이미 경험했습니다. 이미 경험한 큰 기쁨을 우리는 놓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 나라 가는 그 날까지, 길어봐야 100년 남짓한 이 인생을 사시면서 매 순간 영적 긴장의 끈을 붙잡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과 소통하는 예민한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함의 반응: 들추어내다
이런 노아의 일탈의 모습을 본 함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22절을 보십시오.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여기 '알리다'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나가드'(נָגַד)라는 동사를 사용합니다. '나가드'라는 동사는 담대하게 반대편에 서다라는 뜻입니다. 그냥 아버지가 술 먹고 취해서 벌거벗은 모습을 보고 함이 깜짝 놀라서 가서 형제들에게 있는 것 그대로 전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아버지와 완전히 반대편에 섰다는 뜻입니다.
유추해 보면 함은 평소에 아버지에게 불만이 굉장히 많았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옳지, 잘 됐구나. 이것을 건수로 삼아서, 이것을 빌미로 삼아서" 나가드, 담대하게 아버지 반대편에 설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미루어 짐작해 보면 하나님께서 홍수 이후에 노아와 노아의 가족들에게 생육과 번성과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첫 번째 인류인 아담과 그의 후손들은 이 말씀에 실패했습니다. 이 말씀을 육체적으로만, 생물학적으로만 이해해서 그들은 육체적으로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실패한 것을 본받아 타산지석으로 삼아 노아는 자녀들에게 생육과 번성과 땅에 충만하라는 영적인 말씀을 요구했습니다. 매일같이 요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너희는 영적으로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해야 한다고.
함은 지겨워졌습니다. 이제 좀 그만하시지, 우리도 이제 알아들을 만큼 알아들었는데, 이제 우리도 좀 편하게 살게 그냥 내버려두시지. 아버지가 계속 이렇게 하시는 말씀이 귀찮고 견디기 힘들고 듣기가 싫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때 아버지가 일탈을 했습니다. 술을 마시고 취하여 벌거벗고 드러누운 것입니다. 형제들에게 가서 고합니다. "봤지? 그렇게 잘난 척하던 분 아니에요? 자기 혼자 의인인 척하고 자기 혼자 다 잘난 척하던 분이 이처럼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는 것 봐. 내가 평소에 우리가 아버지에게서 벗어나야 된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함은 셈과 야벳에게 "옳거니" 하고 아버지의 잘못을 꼬집으라고 담대하게 아버지의 반대편에 서버렸습니다.
2-1. 물타기의 악함
함이 악한 이유는 전형적인 물타기의 수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해 부모와 자녀가 살다 보면 부모의 약점이 자녀들에게 고스란히 노출됩니다. 인간적으로 약한 모습도, 때로는 게으르고 때로는 연약한 모습도, 또 때로는 말을 참을 수 없는 모습도, 언어가 험한 모습도 자녀들에게 고스란히 노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부모의 인간적인 약함이 자녀가 함부로 살아야 된다는 면제부가 될 수 없지 않습니까?
정치인들이 전형적인 물타기 수법을 잘 구사합니다. 누군가가 어떤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면 지적받은 사람은 그 잘못에 대해서 반성하지 않습니다. 통렬하게 자기 반성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지적한 사람이 수십 년 전 한 말까지 다 끄집어냅니다. 너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느냐고, 당신도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느냐고. 언론은, 신문과 방송은 이런 정치인들의 하향 평준화된 말싸움을 연일 앞다투어 보도합니다. 국민들은 그런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국정을 위해서, 민생을 위해서 그들이 어떻게 일하고 노력하는지를 알고 싶지, 그렇게 진흙탕 싸움하는 것을 알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들의 수준을 진흙탕으로 끌고 내려갑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진리를 상대화하는 데 익숙합니다. 저 사람보다는 그래도 내가 낫지 않은가? 저 사람은 굉장히 약한데 그래도 내가 저 사람보다는 잘 살고 있지 않느냐? 하나님 앞에서도 그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이 정도면 잘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정도면 잘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상대적인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는 절대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는 수준이 여기까지 있으면 그 수준에 도달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어떤 행동도 하지 않습니다. 노아 한 사람만 하나님은 의인이라고 보시고 나머지는 다 홍수로 쓸어버린 하나님 아니십니까? 함은 자신의 비행과 자신의 악행을 아버지의 비행과 아버지의 실수로 함께 묻어가려고 한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반대편에 나가드, 담대하게 섰지만 사실은 돌이켜보니 하나님 반대편에 선 악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 지을 수 있고, 사람은 누구나 실수하고 잘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반대편에 서는 것이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억하셔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절대적인 말씀의 기준에 합당한 믿음의 백성으로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셈과 야벳의 반응: 덮어주다
반면에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실수를 어떻게 대응하고 있습니까? 23절을 보십시오.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뒷걸음쳐 들어가서 옷으로 아버지의 부끄러움을 가려주었습니다. 덮어주었습니다.
3-1. 악의 연결 고리를 끊다
셈과 야벳이 훌륭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악의 연결 고리를 끊어낸 것입니다. 함이 와서 그들에게 동의를 구하고 함께 나가드하자고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제 아버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자고. 그러나 셈과 야벳은 단호히 끊어내고 단호히 거절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연약해서 죄 짓고 쓰러질 수 있는데, 그분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그로 인해서 나는 떠나지 않겠다며,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고 하나님과 대적하는 자리에 선다 할지라도 나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생육과 번성과 충만하라는 영의 말씀을 지켜 살겠다며 단호했습니다.
사람들의 말에 현혹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가끔 살다 보면 확인되지 않은 말을 내가 받아서 나도 부풀려서 전할 때가 있습니다. 말이 얼마나 위험한지 잠언 11장 13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는 자가 됩니다. 두루 다니며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내 입을 통해서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하면, 그분의 믿음이 어떤지 모르고, 그분의 영적 상태가 어떤지 모르고, 내가 전하는 이 말 한마디가 그분의 영적 상태와 믿음을 송두리째 갉아 먹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때로는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만약에 셈과 야벳이 함의 말을 듣고 자기 부인에게, 자녀들에게, 그 자손들에게 노아의 이런 모습을 그대로 다 전하고 알렸더라면, 우리도 노아와 반대편에 서서 나가드하자고 해버렸다면 이 가문의 영적 상태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들 중에는 믿음이 어린 사람도 있고, 그들 중에는 노아와 노아가 전한 말씀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들의 가정은 아마 영적으로 풍비박산 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셈과 야벳은 분별력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악의 연결 고리를 끊어내는 분별력이 있기를 바랍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어떤 말을 전하면, 그 말이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라면 남에게 전할 이유도 없습니다. 혹은 확인된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 말을 그대로 전해서 타인의 믿음에 손해를 보게 하고 손상시키는 것이라면, 우리는 입을 닫을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아서 공동체가 혼란하게 되고 공동체가 함께 무너져 내리는 일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목격했습니까? 셈과 야벳은 이런 일에 진실되고 분별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3-2. 허물을 덮어주다
두 번째, 셈과 야벳이 훌륭한 것은 그들이 아버지의 허물을 가려주고 덮어주었다는 것입니다. 함은 들추어내는 사람이고, 셈과 야벳은 덮어주는 사람입니다. 사탄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사탄은 끊임없이 참소하고 끊임없이 들추어냅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밤낮 참소한다고 했습니다. 사탄은 시간과 때를 가리지 않고 밤낮으로 사람을 참소합니다. "너 옛날에 그랬지? 네 옛날에 이런 인간이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은 척하고 있다고? 과거의 악행이 사라지냐?" 사람들을 끊임없이 참소하고 괴롭게 합니다.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사탄의 마지막은 유황불과 불못에 던져질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추어내는 인생을 살고 있다면 이것은 사탄의 손으로 사는 것입니다.
노아의 아들 셈과 야벳은 가려주고 덮어주었습니다. 우리 예수님도 덮어주고 가려주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조상인 보아스, 그분은 보아스의 타작마당에 들어온 한 여인 룻의 부끄러움을 덮어주었습니다. 여인이 요청합니다. 반 치마를 덮어주소서, 나의 부끄러움을 가려달라고. 보아스는 그녀의 부끄러움을 덮어주고, 그녀의 가난과 그녀의 상처를 가려주고 덮어주었습니다. 그래서 보아스는 예수님의 조상이 되는 축복을 받아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상에 달려 피 흘려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 아래에 거하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가리움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의 죄를 덮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의 허물을 덮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덮어주셨는데 우리가 감히 그 허물을 어떻게 들추어낸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이 덮어주셨는데 그것을 들추어내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대적하는 일입니다.
3-3. 건강한 비판의 조건
사람들은 건강한 비판과 비난을 잘 구별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건강한 비판은 필요하지 않습니까? 당연합니다. 물론 건강한 비판이 필요합니다. 아주 필요합니다. 하지만 건강한 비판을 위해서는 두 가지 전제 조건을 꼭 지켜야 합니다.
첫째는 비판하기 전에 기도를 충분히 하셔야 합니다. 내가 하는 이 말이 사람을 살리는 말인지 죽이는 말인지, 내가 하는 이 비판이 그의 영적 믿음을 완전히 허물어뜨리는 말인지 아니면 그분을 새롭게 세우는 말인지 분별하고 기도하고 담대하게 말씀하셔야 합니다.
두 번째 전제는 제삼자에게 말하지 않고 직접 말씀하셔야 합니다. 당사자에게, 비판받을 만한 사람에게 직접 말하지 않고 그분이 아닌 제삼자에게 말하는 것은 그것은 비판이 아니라 비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직접 말할 수 없다면 하지 않는 것이 더 좋습니다. 이 원칙을 잘 지켜 가시기 바랍니다.
노아처럼 한순간 무너지지 않고 믿음의 여정을 끝까지 잘 수행하시고, 셈과 야벳처럼 악의 고리를 끊고 덮어주는 놀라운 은혜와 능력이 우리에게 차고 넘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노아처럼 한순간 믿음의 길을 떠나서 어리석게도 넘어지고 쓰러지지 않기를 원합니다. 영적 긴장을 유지하고 끝까지 믿음의 길을 달려가는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함처럼 들추는 자가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담대하게 반대편에 서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셈과 야벳처럼 악의 연결 고리를 담대히 끊어내고 하나님 말씀에 굳게 서서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며 가려주고 덮어주는 넉넉한 인생 되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덮어주는 사랑을 우리가 실천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