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강 / 살았고 죽었더라 (9:24-29)

살았고 죽었더라

본문: 창세기 9:24-29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일제 36년의 암울한 강점기를 벗어나 광복의 기쁨과 환희를 맛보았습니다. 76년이 지난 오늘에도 우리 민족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 속에, 핏속에, 그리고 세포 속에 그 기쁨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는 우리 한반도를 36년 동안 무단 통치하면서 민족 말살 정책을 펼쳤습니다.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교실에서 우리말과 우리글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그중에서도 믿음의 사람들에게 가장 치명적이었던 것은 신사참배 강요였습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면 옥에 가두고 온갖 고문을 가했으며, 심지어 목숨까지 빼앗았습니다. 그로 인해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옥고를 치러야 했고, 그 가운데 생명을 잃은 분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와해되고 가정은 파괴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민족의 독립을 위한 독립투사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국내외에서 일본의 통치가 부당함을 알리고 우리 민족이 독립을 열망한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반대급부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변절자들입니다. 처음에는 순수하게 독립운동을 시작했으나 일제의 회유와 압박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가족을 볼모로 삼은 협박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그들은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변절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변절자 중 대표적인 인물이 춘원 이광수입니다. 그는 1892년 평안도 정주에서 태어났습니다. 1917년, 그의 나이 스물다섯 살에 한국 최초의 근대적 장편소설 『무정』을 발표했습니다. 이 소설은 지금 읽어보아도 필체가 화려하고 등장인물의 심리 묘사가 탁월합니다. 글쓰기에 있어 비범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2년 뒤인 1919년 일본 유학 중에 2·8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독립선언서를 직접 작성했습니다.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독립신문 발간을 주도하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그가 1922년 『개벽』이라는 잡지에 「민족개조론」이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친일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어용 단체인 조선문인협회 회장이 되었고, 스스로 창씨개명도 했습니다. 그리고 전국을 다니며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황국신민의 의무를 다하고 학도병이 되라고 호소하고 다녔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이토록 극적으로 변절할 수 있는 것일까요? 그가 남긴 여러 글을 보면 그는 뼛속 깊이 일본인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해방이 찾아왔습니다. 해방 이후 그는 친일 행적 때문에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그 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북한에 납북되었다가 1950년 어느 겨울, 북한의 한 병원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변절자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과 마음은 어떠합니까? 좋게 보이지 않습니다. 증오스럽고 역겹다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 있을까, 한결같지 못하고 민족을 팔아먹고 민족혼을 배신하는 저 악한 자들을 우리는 입으로 그리고 마음으로 저주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 그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볼 때, 한 길 가는 순례자로서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신앙인의 삶이 생명 다하는 날까지 한결같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또한 영적 변절의 삶을 살지 않습니까?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나님을 떠나기도 하고 다시 돌아오기도 하며, 매 순간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성실한 삶을 살지 못합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 모르나,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은 결코 속이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면 얼마나 안타까우시겠습니까?

오늘 읽은 하나님의 말씀은 한결같음을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노아는 우리가 알고 있던 그 초기의 모습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어떤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지, 하나님 앞에서 한결같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영적 긴장을 놓아버린 순간

노아는 홍수 이후에 포도 농사를 지었습니다. 포도 농사에서 나온 부산물인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서 자기 장막에서 벌거벗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함은 평소에 아버지와 관계가 좋지 못했고, 아버지의 영적 가르침에 반감을 품고 있던 터라 형제들인 셈과 야벳에게 아버지의 추태를 알렸습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함의 말에 동조하지 않았습니다. 뒷걸음질 쳐 들어가서 아버지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가려 주었습니다.

그 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창 9:24)

이 말씀을 보면 노아가 얼마나 깊이 취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술에 취한 채로 자신이 행한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벌거벗고 술에 취해 벌인 행동들을 술이 깨고 난 이후에야 사람들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함이 자신에게 어떤 일을 했는지, 자신이 술에 취해 어떤 일을 벌였는지를 비로소 알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우리 식으로 말하면 블랙아웃, 즉 필름이 끊긴 상태였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상당히 충격적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자제력을 잃었기에, 얼마나 마셨기에 우리가 아는 노아가 이렇게까지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단 말입니까? 노아는 의인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고, 방주를 지은 분입니다. 그런데 그가 한순간 영적 긴장의 끈을 놓아버린 순간, 어젯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인사불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 그의 350년 행적을 성경은 단 두 줄로 간단하게 정리합니다.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오십 년을 살았고 그의 나이가 구백오십 세가 되어 죽었더라" (창 9:28-29)

"살았고 죽었더라." 이 말씀으로 노아의 나머지 350년이 요약되었습니다. '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야'와 '죽다'에 해당하는 '무트'는 지극히 평범한 동사입니다. 특별하게 산 것도 아니고, 특별하게 죽은 것도 아닌, 일반적인 사람들이 살고 죽는 것을 표현하는 바로 그 동사로 그의 350년 인생이 마무리된 것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노아도 보통 사람과 똑같이 살다가 죽는 것인데, 그게 뭐가 문제입니까?" 그런데 문제입니다.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그가 노아이기 때문입니다. 노아였기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노아는 두 번째 창조의 주인공입니다. 아담과 그의 후손들이 홍수에 쓸려 나가고,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대상으로 하나님의 마음과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렇게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의인이었고,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 나머지 350년이 "살았고 죽었더라"로 마무리되는 것이 너무나 아쉽지 않습니까? 성경은 노아와 그의 행적을 창세기 6장에서 9장까지 네 장에 걸쳐 소개합니다. 절수를 세어 보면 총 97절입니다. 97절 가운데 홍수 이후 350년의 삶을 단 열 줄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술 마신 이후에 일어난 일이 대부분이고, 나머지는 "살았고 죽었더라"로 정리됩니다. 나머지 87절은 노아가 방주를 지을 때, 하나님과 동행했을 때, 하나님과 만났던 아름다운 추억의 시간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노아는 480세부터 방주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120년 동안 방주를 지으면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동행했습니다. 이 기간은 은혜의 기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와 함께했던 120년의 시간을 87절에 걸쳐 상세하게 기록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노아가 나눈 추억들이 소상히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홍수 이후 350년의 기간은 건질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제는 되었다"며 영적 긴장을 풀어버리고 놓아버린 그의 인생 나머지 기간은 하나님 보시기에 기록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까?

노아 입장에서 본다면 홍수 이후의 그 인생은 찬란하게 행복한 기간이었을 것입니다. 더 이상 방주를 지을 필요도 없고, 고생하지 않아도 됩니다. 세상에 악이 관영한 것 때문에 갈등하거나 고민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는 두 번째 창조의 주인공으로서 노아 가문의 우두머리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전보다 더욱더 윤택하고 행복한 생활을 꾸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볼 때 그 시간들은 남은 것이 하나도 없고, 건질 것이 없는 의미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기까지 길어봐야 80, 90, 100년 남짓한 인생을 살면서, 그것도 건강하게 살아 봐야 몇십 년 되지 않는 인생 가운데, 하나님과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고 기록할 만한 인생을 과연 몇 년 동안 산다고 생각하십니까? 노아의 인생이 홍수 이후 영적 긴장을 놓친 순간 350년이 단 두 줄로 정리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에녹의 길, 노아의 길

더 안타까운 것은 노아의 인생이 에녹의 인생과 대조되기 때문입니다. 에녹과 노아는 상당 부분 닮아 있습니다. 에녹도 하나님과 동행했고, 노아도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런데 에녹 인생의 결말은 노아와 전혀 다릅니다.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 5:21-24)

에녹은 죽을 때까지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세상에서의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이 그를 천국으로 데려가셨습니다. 영적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천국으로 바로 데려가신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영적 축복이고, 에녹에게 있어서는 영적 훈장입니다. 그는 "이제 되었다, 이제는 다 되었다"라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을 끝까지, 한 번도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의 길을 달려간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노아도 하나님과 동행해서 에녹처럼 될 수 있었는데, 중간에 멈춰 버렸습니다. "이제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악한 사탄 마귀가 틈 타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 3:12)

바울은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빌립보서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기록했습니다. 그때 그는 이미 노인이었습니다. 나이가 많았습니다. 지금까지 이룬 업적도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로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이 감옥의 틀을 벗어나 스페인으로 달려가서 복음을 전할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바울은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3차 선교 여행의 목적지로 에베소를 삼았습니다. 소아시아의 중심 도시인 이곳에서 복음을 전하면 아시아 전역으로 복음이 뻗어져 나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두란노 서원을 세우고 3년 동안 열심히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에베소 전체가 복음으로 흥왕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내가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며 꿈을 꾸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로마를 보여주셨습니다. 로마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로마에서는 다시 스페인을 꿈꾸며 달려가겠다고 결단했습니다.

그의 평생 그 일념, 그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명으로 오로지 방향 지워져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귀가 틈 탈 상황이 되지 않았습니다. 쉴 시간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달려가고 또 달려가는 인생을, 영적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분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디에 멈춰 있습니까? 어떤 분들은 교회에서 직분을 받으면 거기서 멈춰 버립니다. "내가 교회를 한평생 다녔으니 장로는 돼야지, 권사는 돼야지."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교회 직분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시간 동안 교회의 덕을 세우라고 우리에게 주신 기능적인 직분일 뿐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을 담보하지 못합니다. 직분과 상관없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가는 그날까지 믿음을 경주하고 또 달려가고 또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어떤 분은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되면 멈추기도 합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어리석은 부자가 등장합니다. 논과 밭에 소출이 가득 찼습니다. 그가 그날 밤 자기 영혼에게 스스로 말합니다. "내 영혼아 먹고 마시자, 이제는 쉬자, 이제는 만족하자."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밤 내가 네 영혼을 다시 찾으리니 그러면 네가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인생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멈추어 있습니까? "이제는 내가 나이가 들었으니, 이제는 내가 할 만큼 했으니, 여기서 좀 쉬어야겠다." 그 순간 우리는 노아의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의 여정은 결코 멈춰서는 안 됩니다. 삶의 여정은 우리 목숨 다하는 그날까지, 하나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또 달리고 또 달려가야 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갈라디아 교회를 이렇게 책망합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갈 3:3)

갈라디아 교회는 복음과 성령으로 시작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거짓 교사들이 들어와서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교인들이 거기에 넘어가 버렸습니다. 성령으로 시작했는데 육체로 마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책망합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어떻게 육체로 마치려 하느냐?"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 받아서 성령으로 시작했다면, 하나님 나라 가는 그날까지 그 성령을 유지하고 믿음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성령으로 시작했는데 "이제 되었다"고 멈춰 버리면, "살고 죽는 것"밖에 남지 않습니다.

우리는 노아의 길이 아니라 에녹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부디 우리 생명 다하는 그날까지 끝까지 믿음의 여정을 함께 달리고 또 달려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주와 축복, 선택의 갈림길

노아가 술에서 깨어 자기 자손들에게 이렇게 예언합니다.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창 9:25-27)

한마디로 말하면 "가나안이 종이 될 것이다"라는 예언입니다. 셈의 종이 되고, 그 형제의 종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저주에 가깝습니다. 아니, 그냥 저주라 해도 무방합니다. 노아가 술에서 깨어 자손들에게 이런 저주를 퍼부은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의문을 품게 됩니다. 첫 번째 의문은 "함이 잘못했는데 왜 가나안을 저주하느냐"는 것입니다. 가나안은 함의 아들입니다. 함이 잘못한 것은 분명합니다. 아버지와 평소 관계가 좋지 않았고, 아버지의 영적 지도를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나가도록 했습니다. 담대하게 반대편에 서 버렸습니다. 하나님도 대적했습니다. 함은 저주받아 마땅하고, 책망받아 마땅합니다. 그런데 왜 함의 아들 가나안을 저주한 것일까요?

그것은 함과 가나안, 그 가문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견고하게 다스리시려는 것입니다. 가나안 한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함과 그 아들 가나안, 가나안의 아들, 또 그 자손, 함의 가문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말씀입니다. 함도 이미 나이가 많았습니다. 함의 아들 가나안도 나이가 많았습니다. 결혼해서 자식을 낳았고, 손자까지 보았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주시는 엄중한 책망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지금처럼 이렇게 살면 앞으로 이렇게 저주가 될 것이다"라는 경고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부모의 영향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함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았던 그 영향력은 아들 가나안에게 그대로 흘러갑니다. 함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그 말씀을 온전히 이루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부한 것이 알게 모르게 아들 가나안에게 흘러가서 그 가문과 그 가정의 문화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에서 부모는 자녀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존재입니다. 좋은 영향력이든 악한 영향력이든, 삶과 말과 행동, 사고방식, 신앙생활하는 일거수일투족이 자녀들에게 그대로 흘러가고 그대로 스며들어갑니다. 이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함의 영향력은 가나안에게 그대로 흘러 들어갔고, 이것은 그 가문의 특징이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우리 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대에서 그냥 끝내고 마무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들과 나와 함께하는 자손들에게까지 그대로 영향력이 흘러간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정신이 바짝 나지 않습니까? 믿음 생활을 제대로 해야 되겠다고 다짐하지 않습니까?

오늘 이 말씀이 주는 두 번째 의문은 "노아가 아들과 손자를, 이 가문을 이렇게 저주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라는 것입니다. 잘못은 노아에게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아들과 그 손자와 그 가문을 이런 식으로 저주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가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 상식으로 생각해 보면 노아가 아들 함을 앉혀 놓고, 손자 가나안을 앉혀 놓고 "너희 가문이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타일러야 합니다. 영적 지도를 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도 되지 않으면 눈물로 기도하고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집 나간 둘째 아들 탕자가 다시 돌아오기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아버지처럼 노아도 그렇게 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노아는 그 모든 과정을 생략하고 가나안을 저주했습니다. 이것이 과연 합당한가, 정당한가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성경의 난제를 만나면 성경 전체로 시야를 넓혀서 보아야 합니다. 성경 전체를 보면 여러 저주의 말씀이 많이 등장합니다.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저주한 말씀도 있고, 선지자들이 이방 민족을 저주한 말씀도 있습니다. 유다 백성, 이스라엘 백성, 여러 이방 민족에게 "앞으로 이렇게 될 것이다"라는 무서운 저주의 말씀이 성경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저주 말씀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저주는 불변적인 언약이 아닙니다. 유동적이고 가변적입니다.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는 뜻입니다. 언제든지 저주는 철회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돌이키면 회복하게 하실 것입니다. 돌이키면 하나님은 애장중에 다시 붙잡아 인도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저주를 주시는 본심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 선지자를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보내십니다. 니느웨가 얼마나 타락하고 얼마나 악한 곳입니까? 그곳에 보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요나 선지자가 니느웨 성에 가서 외친 첫 번째 말씀입니다.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욘 3:4)

이것은 요나 자신이 원해서 한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전하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사십 일이 지나면 이 성이 무너질 것이다." 죄가 관영했습니다. 하나님에게까지 닿았습니다. 이 죄악된 성을 하나님이 심판하시겠다고 요나를 통해서 예언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납니다. 이 말씀을 듣고 왕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백성이 회개합니다.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 (욘 3:6)

왕이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았습니다.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니느웨 성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회개했습니다. 진실한 회개를 하나님은 받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욘 3:10)

여기서 중요한 말씀은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라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이 저주하신 니느웨 성에 "사십 일이 지나면 이 성이 무너지리라"는 말씀은 불변적인 약속이 아닙니다. 가변적이고 유동적입니다. 왜냐하면 니느웨 성에 있는 백성들이 회개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언제든지 철회할 생각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언제든지 심판에 대한 말씀을 철회할 생각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심판하는 것이 본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저주가 본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심은 그들이 돌이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진심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 "내가 내 입으로 뱉은 말이니까 나는 반드시 너희를 저주하고 말겠다, 나는 반드시 너희를 심판하고 말겠다"고 고집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루에도 열두 번 손바닥을 뒤집으실지라도 하나님 백성들이 구원받을 수만 있다면, 그 백성들이 죄악에서 돌이킬 수만 있다면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얼마든지 철회하실 용의가 있는 분이십니다.

같은 맥락으로, 하나님이 노아를 통해서 함과 가나안에게 주셨던 저주의 말씀도 이해해야 합니다. "너희들이 지금 살던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의 반대편에 서서 나가도록 하고 산다면 너희들은 형제들의 종의 종이 될 것이다. 영원히 종살이를 면치 못할 것이다. 너희들이 지금 살던 방식 그대로 살면 이 저주가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돌이키기만 하면, 나가도록 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 앞에서 알곡처럼 생명처럼 그 말씀 붙잡고 살아간다면 너희들에게는 언제든지 새로운 축복과 은혜가 있을 것이다." 이것이 그 약속입니다.

동시에 셈과 야벳에게는 축복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야벳은 창대하게 되고 셈도 창대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축복도 보장된 복이 아닙니다. 변함없이 자손만대에 보장받은 복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금은 비록 셈과 야벳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나가도록 하지 않으면서 아버지의 허물을 뒷걸음질 쳐 들어가서 덮어 주는 사람이지만, 살다가 변절하면, 살다가 믿음 생활을 함부로 하고 제대로 살지 않고 함의 길을 걷게 되면 너희에게 보장된 복도 그 복도 즉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과 저주의 길은 우리 앞에 갈래길처럼 놓여 있습니다. 복의 길을 가는 것도 저주의 길을 가는 것도 순전히 우리의 몫입니다. 믿음 생활은 운명론이 아닙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길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이면 그 길 끝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모든 복이 함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리저리 갈짓자로 횡단하고 다니며 죄악의 길을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우리도 예외 없이 함과 가나안의 저주를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어떤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우리 앞에는 셈과 야벳의 길, 복의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을 꼭 선택하시는 믿음의 백성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노아처럼 마지막 350년을 "살고 죽는다"는 단 두 줄로 남겨야 하는 그런 인생을 살지 마시고, 에녹처럼 끝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사시는 믿음의 백성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노아처럼 마지막 인생을 이렇게 마무리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에녹처럼 끝까지 하나님과 동행하여 믿음의 길에서 승리하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아버지, 우리의 믿음을 순전하게 붙잡아 주시옵소서. 셈과 야벳의 길을 걷게 하시고, 함의 길을 벗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셈의 길, 야벳의 길인 복의 길을 걸어가게 하시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생명의 길을 걷게 하여 주옵소서. 비록 우리가 지금은 함과 가나안의 길을 걷는다 할지라도 깨닫고 돌이켜서 저주의 언약을 축복의 언약으로 바꿀 수 있는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이 되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