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강 / 바벨탑 (11:1-9)

바벨탑

본문: 창세기 11:1-9

사람들과 소통할 때 우리는 말과 글을 사용합니다. 말로 소통할 때 중요한 것은 듣는 자의 경청하는 태도와 말하는 자의 배려하는 자세입니다. 들을 때는 귀를 열고 마음을 열어야 하며, 말할 때는 상대방의 입장과 처지와 수준을 살펴야 합니다. 만약 대화 상대가 초등학생인데 대학생 수준의 용어로 말한다면 그 사람은 단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글로 소통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가 쓴 글을 읽을 때는 성심껏 깊이 들어가야 하고, 내가 글을 써서 상대에게 전할 때도 상대의 수준과 상황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특수한 상황이 개입될 수 있습니다. 소통하는 상대가 문맹일 경우가 있습니다.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경우, 글로는 소통할 수 없으므로 또 다른 언어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영국 17세기 로코코 시대를 살았던 윌리엄 호가스는 아주 특별하고 탁월한 인물이었습니다. 호가스는 그 당시 유명한 풍속화가로서, 영국의 사회상과 상류사회를 그림을 통해 표현했습니다. 당시 17세기 영국 사회에는 문맹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글로 소통할 수 없었고, 그래서 호가스는 그림을 통해 사회상을 고발하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는 한 가지 주제를 정하면 연작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계약 결혼'이라는 주제로 여러 편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림 오른편에는 백작이 있는데, 자세히 보면 그의 오른발이 붕대로 감겨 있습니다. 통풍 때문에 오른발을 쓸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는 그 백작의 지위가 몰락한 집안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림 중간에 보이는 창 밖으로는 폐허가 된 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은 백작이 짓다 만 건물입니다. 돈이 없어서 건물을 올리다가 중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테이블 위에는 금화가 잔뜩 놓여 있습니다. 이 돈을 가져온 사람은 백작 맞은편에 있는 상인입니다. 부유한 상인이 왜 그 돈을 건넸을까요? 상인의 딸과 백작의 아들을 결혼시키기 위해서 돈을 건넨 것입니다. 백작은 상인의 돈이 필요했고, 상인은 백작의 명예와 권력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백작의 아들과 상인의 딸은 어떠할까요? 화면 왼편을 보면 두 사람이 서로 등을 지고 있습니다. 관심이 없다는 말입니다. 서로 사랑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 결혼을 계약으로 맺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윌리엄 호가스는 그 당시 상류사회의 위선적인 모습과 영국 사회의 기만적인 모습을 그림으로 잘 표현했습니다.

만약 호가스가 글을 통해 당시 사회를 고발하려 했다면 수십 장의 글이 필요했을 것이고,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또 다른 소통의 언어인 그림으로 회화적 비평을 시도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신윤복, 김홍도 같은 풍속화가들이 있습니다. 세종대왕도 그 당시 시대 상황 때문에 한자를 몰라 불이익을 당하고 고통받는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훈민정음을 창제하셨습니다. 이분들의 공통점은 겸손한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내려와 민중들이, 백성들이, 시민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는지, 그들과 소통하기 위해서 자신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실천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읽은 하나님 말씀을 보면 언어가 혼잡하게 된 계기가 나옵니다. 인간의 교만 때문에 언어가 혼잡해졌습니다. 하나님과 어깨를 견주려고 높이 탑을 쌓았던 인간의 교만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과연 우리는 진정으로 소통하고 있는지, 나는 어떤 식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함께 대화하는 사람들에게 내 진심이 전달되고 있는지, 나는 타인의 진심을 대화를 통해서 듣고 있는지, 우리 자신의 겸손과 소통 역량을 함께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1. 시날 평지에 모인 자들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창 11:2)

여기서 '그들'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그들'은 누구일까요? 여기서 말하는 그들은 노아의 후손들을 말합니다. 셈의 후손, 함의 후손, 야벳의 후손들이 시날 평지에서 모였습니다. 그러면 이 시날 평지는 그 당시 누가 다스리는 곳이었을까요?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창 10:9-10)

그의 나라, 그의 왕국이 시날 땅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니므롯이 큰 왕국과 제국을 건설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함의 후손과 셈의 후손과 야벳의 후손이 함께 모였습니다.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함은 구스와 니므롯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역하는 삶을 살았지만, 셈의 후손과 야벳의 후손은 비교적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고 따르며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흘러 그들 모두의 경계가 무너졌습니다. 니므롯처럼 힘을 과시하고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며 자신의 나라를 자랑하고, 하나님 없이 힘을 권력으로 삼는 자, 그들의 휘하에 노아의 모든 후손들이 함께 모여 버린 것입니다.

2. 하나님을 진노케 한 두 가지 결의

그런데 그들이 시날 땅에 모여서 한 가지 중요한 의견을 통일합니다. 의기투합을 한 것입니다.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창 11:3-4)

이들은 여기서 아주 중요한 두 가지 결의를 합니다. 그 두 가지 결의가 모두 하나님을 화나게 하는 결의였습니다. 하나님에게 정면으로 반역하는 행위였습니다. 첫 번째가 '우리 이름을 내자'이고, 두 번째는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입니다.

'우리 이름을 내자'에서 '이름'은 히브리어로 '쉠'(שֵׁם)입니다. '쉠'은 곧 '명성'이라는 뜻입니다. 명성이라는 말을 들으면 홍수 이전의 가인의 후손들이 용사가 되어 고대의 명성이 있는 자가 되었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그들은 이름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내고, 자신의 이름을 떨치기를 원했습니다. 그 때문에 그들은 홍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들은 다시 자기 이름을 내고자 합니다. 무엇으로 자기 이름을 내고자 합니까? 탑을 높이 쌓아서 하늘에까지 도달하게 하여 하나님과 어깨를 견주고, 하나님보다 더 높아지려는 자신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 오는 동안 인간의 교만이 인간을 얼마나 불행하게 만들었는지, 교만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최초의 인류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교만 때문에 쫓겨났습니다. 뱀이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선악과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 그 말에 꼬임에 속아 넘어가서 선악과 열매를 따 먹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같아지기는커녕 그들은 그만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그 대가는 참혹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권력을 자신의 힘으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용사가 되고 명성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들은 홍수 심판을 받아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여기 바벨탑 사건도 인간의 언어가 나뉘어지게 되는 이 비극과 참극이 역시 교만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오늘 우리에게 큰 교훈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약 4:10)

여기서 중요한 말씀은 '주께서'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높여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나를 높여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 모습을 한번 돌이켜 보십시오. 조금만 큰 봉사, 조금만큼 성실하게, 조금만큼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일을 하고 나면 우리는 남들이 알아주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으면 화가 납니다. 견딜 수가 없습니다.

'왜 알아주지 않지? 내가 이토록 열심히 섬기고 열심히 일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성실하게 쓰임받았는데, 왜 사람들은 나를 몰라주는 것인가?' 그래서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를 높입니다. 주께서 나를 높여주실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높여주실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서 성실하게 일하고 봉사하고 쓰임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안달복달하며 사람들에게 자기를 드러내려고 합니다. 알아주지 않으면 견딜 수 없고, 속에 교만이 가득 차고 넘칩니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 중에 거북한 분들이 있습니다. 자기 자랑을 지나치게 하는 분들, 만날 때마다 자식 자랑하는 분들입니다. 그것도 한두 번이지, 여러 번 되고 오래되면 만나서 함께 대화하기가 상당히 거북합니다. 그런데 우리도 자기도 모르게 자기 자랑의 늪에 빠집니다. 우리가 우리 입으로 해야 될 말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과 남을 칭찬하는 일입니다. 우리 입으로 스스로를 칭찬하는 망스러운 일을 이제는 멈춰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우리 속으로, 우리 마음으로 교만의 바벨탑을 쌓아서 하늘에까지 올라가려는 이 악한 일을 우리는 멈춰야 할 것입니다. 남이 나를 칭찬하고, 남이 나를 보고 이렇게 성실하게 일하고 섬기는 우리를 격려하고 위로하는 역량이 함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다윗의 겸손, 하나님이 높이신 자

다윗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당시 자기가 있는 그 자리에서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양떼들을 목장에서 열심히 돌보았습니다. 사자가 양을 낚아채 가면 사자의 입에서 양을 건져왔습니다. 곰이 양을 발톱으로 채 가면 곰의 발톱에서 양들을 건져왔습니다. 그는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누가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열심히 일했더니 하나님이 선지자 사무엘을 보냅니다. 사무엘을 통해서 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그는 왕이 되었지만 왕으로 곧장 쓰임받지 못했습니다. 왕궁에 들어가서 사울의 군대 장관이 되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합니다. 쫓겨났습니다. 십수 년을 쫓겨 다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회가 있었지만 스스로 왕이 되지 않았습니다. 사울을 죽일 기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사울을 죽이는 순간 그는 왕이 됩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왕이 되기를 포기했습니다. 원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높여주실 때까지, 하나님이 그를 세워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주실 때까지 그는 인내하고 참고, 있는 그 자리에서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목동이, 그 다윗을 하나님은 데려다가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왕이 되게 해주셨습니다. 스스로 높아져서 스스로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면 그 영광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를 세워서 왕이 되게 만들어주셨기 때문에 그의 가문은 영원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과 다윗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네 허리에서 나오는 후손들을 통해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겠다.' 다윗의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왕 중 왕이 되시고 영원한 왕이 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는 욕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맡은 자리에서 성실하게 일하고 성실하게 섬기면 때가 되면 주께서 우리를 높여주십니다. 우리는 겸손한 자가 되어야 하는데, 겸손의 본질적인 의미는 피조물의 위치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창조주가 아니십니까? 피조물이 어찌 창조주만큼 높아질 수 있겠습니까? 피조물이 어찌 바벨탑을 쌓아서 하나님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있는 자리에서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곧 겸손입니다. 목회자는 목회자의 자리에서, 성도는 성도의 자리에서,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맡은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면 그것이 겸손입니다. 입에 발린 말이 겸손이 아닙니다. "저는 이것 잘 못합니다. 제가 부족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겸손이 아니라, 자기 자리에서 자기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것, 이것이 겸손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4. 흩어지기 위해 모이는 교회

두 번째로 이들이 잘못한 것은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려고' 세력을 형성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의문을 품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모여 있는 것이 왜 죄가 됩니까? 흩어지지 않으려고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 왜 죄가 됩니까?" 하지만 이것은 큰 죄가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도 말씀하셨고 노아에게도 말씀하신 것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입니다. 흩어져야 땅에 충만합니다. 한곳에 모여서 너희 세력을 형성하고 너희 왕국을 건설하고 하나님을 반역하지 말고, 흩어져서 하나님 자녀답게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본질적 의도이고, 흩어짐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교회 공동체의 본질은 흩어지는 교회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여서 예배드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모였습니까? 왜 우리가 모여서 예배드립니까? 우리가 이 자리에 모여서 예배드리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잘 흩어지기 위해서입니다. 흩어지기 위해서 모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18-20)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부활하시고 40일을 지내시고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을 불러 놓고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는 가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풀고, 가르쳐 지키게 하라." '흩어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은 흩어지라는 것입니다. 모여서 세력을 과시하지 말고, 흩어져서 너희에게 가르친 대로 제자의 삶을 살아내고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라, 이것이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 때문에 제자들을 모았습니다. 3년 동안 가르쳤습니다. 말씀을 가르치고 본을 보였습니다. 함께 먹고 함께 자고 함께 훈련시키면서 그들을 하나님의 제자답게,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길렀습니다. 그리고 나서 내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가서 흔들림 없이 믿음생활 하고 말씀대로 살아가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예배 공동체가 아닙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따른다면 우리가 이 자리에 모여 예배드리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잘 흩어지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여서 예배드리면서 세상에서 상처받은 것을 위로받습니다. 빛과 소금으로 살아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됩니다. "하나님,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요?" 말씀을 통해서 치유받고, 말씀을 통해서 위로받고, 성도들과 교제하며 함께 회복되고, 다시 회복되어서 세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모인 것입니다.

교회가 흩어지지 않고 모이기만 한다면 여기에서 탈락이 발생합니다. 모이는 것만 강조하다 보면 모이기 위해서는 예배당을 크게 지어야 되고, 모이기 위해서는 우리가 편리해야 되고, 모여서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서는 뭔가 좋은 건물, 비싼 것들이 있어야 되고,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 교회의 영적인 타락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까? 기독교회는 본질적으로 흩어지는 교회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서 예배드리고 은혜 받았다면, 우리 각자 삶의 현장에서, 직장에서, 일터에서, 가정에서 빛과 소금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고 모이는 것만 원하고 모이는 것만 강조한다면, 그것은 우리도 나도 모르게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과 다름없는 것입니다.

5. 삼위일체 하나님의 개입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창 11:5)

하나님께서 내려오셨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하나님이 하늘에 계셔도 다 보실 수 있는데 왜 '내려오셨다'는 표현을 쓰고 있을까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바벨탑 사건을 친히 해결하려고 개입하셨다는 뜻입니다. 엄중하게 보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사건을 좌시하지 않겠다, 이제 내가 여기에 개입해서 분명히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보이신 것입니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창 11:7)

'우리가'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라는 말씀을 사용하실 때는 아주 중요한 일을 계획하실 때 '우리가'라는 말씀을 쓰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함께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 말씀하셨습니다.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천지창조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이 사람의 창조였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함께 모이셨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일이, 그만큼 엄중하고 무거운 일이 바벨탑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이것이 너무 무서운 죄라서, 하나님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함께 이 문제에 개입하여서 해결하시려고 '우리가'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결하셨습니까? 하나님은 간단하게 해결하셨습니다. 서로 언어를 혼잡하게 하셔서 알아듣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탑을 건설하는 현장입니다. 위층에 있는 사람이 아래층 사람에게 벽돌을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벽돌을 달라 했는데 물을 줍니다. 연장을 달라 했는데 벽돌을 줍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공사가 더 이상 진행되겠습니까? 언어가 다른데, 하나님은 이렇게 간단한 방법으로 공사를 중단시키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창 11:8)

하나님의 뜻대로 그들은 다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6. 같은 언어를 쓰면서도 소통하지 못하는 비극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아주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이들은 언어가 혼잡하게 되어서 더 이상 공사할 수 없어서 흩어졌지만, 오늘 우리는 같은 언어를 쓰고 있는데도 서로 소통이 되지 않습니다. 정치인들을 한번 보십시오. 분명히 대한민국 사람들이고 분명히 같은 한국말을 쓰고 있는데 어쩜 저렇게 소통이 되지 않습니까? 그래도 모두가 다 나라를 위한다고 하고 국민들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모두가 다 각양 다른 말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들이 왜 소통되지 않을까요? 그들의 말이 왜 다를까요? 왜 이 사람은 이 소리 하고 저 사람은 저 소리 하는데 그들이 하나 되지 못하는 것일까요?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다 나라를 위하고 국민을 위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권력 투쟁일 뿐입니다. 그들이 권력을 잡고, 대권을 잡고, 이 나라의 정치를 쥐락펴락하고 좌우하고 싶은 그 욕망 때문에 그들은 겸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만합니다. 그러니 그들의 언어가 소통될 리가 없습니다. 같은 나라 말을 하는데도, 같은 나라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같은 언어를 쓰는데도 소통되지 않는 것은 아이러니한 불행이 아닙니까?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목회자와 직분자들과 성도들이 같은 말을 하는데 소통이 되지 않는다면, 성도와 성도들끼리도 분명히 나는 같은 나라 말을 하는데도 서로가 자기 주장만 하고 있다면, 우리도 교만한 사람입니다. 서로 자기 주장만 하기 때문에, 서로가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서로가 자기 주장을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에 소통하지 못합니다.

가정은 어떻습니까? 가정의 부모가 자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이유는 자녀의 자리로 내려가지 못하기 때문이고,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부모의 마음을 자신의 심정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 식구, 네 식구밖에 되지 않는 가정에서 소통이 정상적으로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서로가 다 교만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서로 소통되지 않는다면 그림이라도 그려서 내 마음을 표현하고, 상대의 눈높이로 내가 무릎을 꿇고 낮아지고자 하는 결단이 오늘 우리에게 없기 때문에, 우리는 소통이 불가한 세대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 공동체에서,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삶의 현장에서, 내가 하는 말을 상대가 알아듣고 있습니까? 나는 상대의 말을 진심으로 수용하고 그분의 마음에 내적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까? 우리가 그들의 자리에 내려가지 않는다면, 겸손하지 않다면, 우리는 수십 년이 지나도 그 사람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본질적으로 교만하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소통이 불가한 세대를 살고 있습니다. 소통되는 척 하고 있을 뿐입니다.

7. 언어가 하나 되는 오순절의 역사

그런데 바벨탑 사건이 일어난 이후로 수천 년이 지나서, 오랜 세월이 지나서 언어가 다시 하나가 되는 역사적이고 기념비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입니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행 2:4, 8)

오순절을 기약해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다 예루살렘으로 모였습니다. 흩어진 유대인들이 다 모인 것입니다. 그들은 외국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말에 서툴고 그 말을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순례자들도 많이 모였습니다. 그들이 모여서 기도합니다. 기도하는데 내 기도 소리를 상대방이 알아듣고, 상대방의 기도 소리를 내가 알아듣습니다. 분명히 국적이 다른데, 자기 나라 말로 말하는데 외국어로 들렸습니다. 방언의 역사가 일어나고 통역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서 옛날의 바벨탑 사건으로 갈라진 언어가 이제는 하나 되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이런 방언의 역사가 일어난 그 뿌리 깊은 배경입니다.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행 1:14)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 받을 때까지 기다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성도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오로지 기도에 힘썼습니다. 기도한 결과 그들은 방언의 역사를 받았습니다.

기도는 겸손한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내가 잘났는데 왜 기도합니까? 내 힘으로 할 수 있는데, 내가 가진 돈으로, 권력으로 다 할 수 있는데" 하는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연약하고 미련하고 부족하오니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십시오." 그래서 엎드리고 그래서 기도합니다. 기도하면서 더 겸손해집니다. 기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역사가 더 크고 놀랍고, 나는 그 앞에서 보잘것없는 먼지 같은 존재임을 깨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자는 겸손해집니다.

겸손하게 기도했더니 방언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알아들었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방언의 역사가 임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방언의 은사를 선호합니다. 방언의 은사를 달라고, 그 방언의 은사를 받기 위해서 기도원에 가서 방언을 배워온 사람도 있습니다. 웃지 못할 코미디 같은 일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방언이 무엇입니까? 진정한 방언은 타인의 말을 알아듣는 것입니다. 타인의 눈높이까지 내려가서 그와 함께 눈높이를 맞추고 소통하는 것입니다. 방언의 은사는 받았는데 타인과 소통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의 말도 알아듣지 못한다면, 그 은사가 어디에 쓸모가 있겠습니까? 진정한 방언의 은사는 누구와도 소통하고, 누구와도 말하고, 누구와도 함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것, 이것이 진정한 방언의 은사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소통하고 있습니까? 내 말이 상대방에게 들려지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나의 말하는 방법이 틀렸습니다. 그들의 눈높이까지 내려가셔야 합니다. 상대의 말을 알아듣고 있습니까? 혹은 알아듣지 못합니까? 타인의 심정과 마음을 헤아리고 겸손하게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그렇게 하면 우리 모두가 진정한 방언하는 자들이 되리라 믿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탑을 쌓아서 우리 이름을 내고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하는 교만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 깨닫습니다. 주여, 오늘 우리가 인정받으려고 했던 우리의 욕망을 내려놓습니다. 아버지, 용서하여 주옵소서. 모여서 세력을 과시하려고 하고, 흩어지지 않으려 했던 우리의 악한 모습을 회개합니다. 아버지,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제 우리가 진정한 겸손한 자가 되어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자가 되어서, 누구와도 소통하며 누구와도 대화 나눌 수 있는 참으로 겸손한 방언하는 자들이 되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가정에, 우리 교회에, 우리가 일하고 있는 터에, 이 나라와 이 민족,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소통하는 아름다운 역사가 일어나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