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강 / 갈대아 우르, 하란, 가나안 (11:10-12:3)

갈대아 우르, 하란, 가나안

본문: 창세기 11:10-12:3

'부르주아'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성 안에 사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성 안과 성 밖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경제력입니다. 돈을 많이 벌고 세금을 내는 사람은 성 안에 살며 적의 침입으로부터 보호받습니다. 그러나 세금을 낼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성 안에 살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성 밖에 살아야 하고, 적이라도 쳐들어오면 그 위험에 고스란히 내몰릴 수밖에 없습니다. 중세가 지나고 근대가 오면서 상공업이 발전하고, 상업을 통해서 부자가 된 사람들이 부르주아가 됩니다. 이들은 산업혁명 시대의 공장을 소유했고, 역사를 통해서 보면 부르주아가 혁명과 혁신의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과정을 살펴보면, 하나님 나라의 형성은 성 안 사람들보다 오히려 성 밖 사람들을 통해서 더 많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당시 성 안에는 누가 살고 있었습니까? 빌라도와 헤롯, 그리고 권력에 기생하며 살던 종교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권력에 취해 있었고,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님도 성 밖 사람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갈릴리 어부들, 가난한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복음 사역에 헌신했던 분들도 대부분 성 밖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 말씀에 등장하는 아브라함도 역시 성 밖 사람입니다. 성 밖 사람의 특징은 불안합니다. 미래에 대한 불투명성이 그들 앞에 가로놓여 있습니다. 안전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성 밖 사람인 아브라함에게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을 따라 오게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안개처럼 자욱한 새해를 시작합니다. 우리는 심리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성 밖 사람들입니다. 불안정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능력의 말씀이 안개 같은 이 세상을 헤쳐 나가며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더하여 주시리라 믿습니다.

1. 상처를 통한 부르심

아브라함의 조상을 올라가 보면 노아를 만납니다. 노아는 셈과 함과 야벳, 세 아들을 두었습니다. 그중에 셈의 계보를 따라 내려가 보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 그리고 데라의 아버지 나홀을 만납니다.

"나홀은 이십구 세에 데라를 낳았고 데라를 낳은 후에 백십구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창 11:24-26)

이 말씀은 우리에게 두 가지 정보를 줍니다. 데라의 아버지 나홀은 비교적 젊은 나이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지만 데라는 칠십 세가 될 때까지 자녀가 없었습니다. 칠십 세가 되어서야 아들을 낳았는데, 그 큰아들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그런데 이 가정에 시간이 한참 지난 후 큰 풍파가 찾아옵니다.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더라" (창 11:27-28)

데라의 가정에 칠십 세 후에 세 아들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큰아들이 아브라함, 둘째가 나홀, 막내가 하란입니다. 그런데 막내아들 하란이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물론 이때가 어린 시절이 아니고 장성한 후였으며, 하란에게는 자녀까지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식이 먼저 떠난 뒤, 자녀를 가슴에 묻는 부모의 심정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정도로 굉장히 고통스럽습니다. 데라는 막내아들 하란을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잃고 말았습니다.

이들이 살았던 삶의 터전은 갈대아인의 우르입니다. 이곳은 유프라테스 남쪽에 수메르인이 세운 도시입니다. 이곳은 문명이 굉장히 발달한 곳이었고 우상숭배가 성행했습니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점토판이 다량 발굴되었습니다. 점토판이 발굴되었다는 것은 그곳에 학교가 있었고 교육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곳 연안에는 페르시아 만이 있습니다. 페르시아 만을 통해서 우상 제작에 필요한 각종 재료들이 수입되었습니다. 금과 은과 각종 여러 가지 제작 도구들이 수입됩니다. 이곳은 굉장히 우상숭배가 성행했던 우상숭배의 본거지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자신의 고별 설교에서 데라의 우상숭배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수 24:2)

여호수아의 고별 설교에 데라의 우상숭배가 등장할 정도로 데라는 굉장한 우상숭배자였습니다. 그런데 평생을 우상을 섬겨 왔는데, 평생 동안 우상숭배자로 살았는데, 그 결론이 사랑하는 막내아들이 세상을 떠나버린 것입니다. 얼마나 허탈하겠습니까? 얼마나 낙심이 되겠습니까? 평생 동안 우상을 섬겨 왔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그 뿌리를 찾아 올라가고 또 찾아 올라가면 데라의 조상은 노아입니다. 노아의 조상은 셋과 에녹입니다. 예배 공동체 아닙니까? 가인의 후손이 아닙니다. 예배 공동체의 후손들이 어떻게 해서 갈대아인의 우르까지 떠내려 갔고, 그곳에서 우상숭배자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들은 열심히 우상을 섬긴 그 결과가 가정의 비극이었고, 아들의 죽음이라는 파국을 맞이합니다.

여기서 데라는 각성하게 됩니다. "내가 평생 동안 우상을 섬겨 왔는데 결과가 이것이라니! 하나님을 떠나서, 내 조상들의 하나님을 떠나서 내가 이곳까지 와서 열심히 우상을 제작하고 우상을 섬기고 충성을 다했는데, 결과가 아들의 죽음이란 말인가? 나는 왜 여기서 이 짓을 하고 있을까?" 각성한 이후에 그는 길을 떠납니다. 함께 떠나는 사람들을 성경은 이렇게 소개합니다.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창 11:30-31)

함께 떠난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십시오. 데라의 아들은 셋입니다. 큰아들이 아브람, 둘째가 나홀, 막내가 하란입니다. 하란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데라가 떠났고 아브라함과 사래가 떠나고 롯이 떠났습니다. 둘째 아들 나홀은 함께 떠나는 대열에 동참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상처받은 사람, 결여된 사람, 고통이 있는 사람이 길을 떠났다는 사실입니다. 데라는 아들을 잃었고, 롯은 아버지를 잃었고, 아브라함과 사래는 자녀가 없습니다. 그런데 나홀은 부족한 것이 없지 않습니까? 아픔도 없고 부족한 것도 없습니다. 열심히 우상을 섬겨 왔는데 자신의 인생에는 상처도 없고 결여된 것도 없고 문제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떠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데라와 아브라함과 사래, 롯은 상처가 있고 아픔이 있고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었고, 이런 사람들이 함께 길을 떠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두 가지 교훈을 줍니다. 첫 번째 교훈은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과 상처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떠난 당시의 이들은 굉장히 쓰라린 가슴을 안고 길을 떠납니다. 아들이 죽지 않았습니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들은 다 있는 자녀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열심히 우상을 섬겨 왔는데 우상 섬긴 결과가 이것이라면 우리는 더 이상 여기에 미련을 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떠났습니다. 그들이 결단하고 그들이 결심하고 떠났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고 돌아보면 그 상처를 통해서 그 자리를 떠나게 하신 분은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들은 쓰라린 고통과 상처와 교류의 아픔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 고통을 통해서 그들을 우상숭배 자리에서 건져 내셨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건 하나님의 은총이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밖에 말할 수가 없습니다.

모세도 그렇지 않습니까? 모세는 바로의 궁전에서, 애굽 궁전에서 사십 년을 살았습니다. 그곳은 죄악이 광양한 곳이었습니다. 그는 거룩한 분노로 히브리 동족을 괴롭히는 애굽 관리를 죽였습니다. 살인자가 됩니다. 바로가 그를 잡아서 죽이려고 합니다. 두려워서 길을 떠나고 광야 길로 내몰렸습니다. 사람 입장에서 보면 도망자였고 도주자였지만,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악한 바로의 왕궁에서 건져 내신 하나님의 부르심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도 상처가 있고 고통이 있는데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고 기뻐하지 않는 우상숭배 자리를 떠났다면, 이건 하나님 앞에서 그만큼 큰 축복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 순간 고통과 그 순간 아픔과 눈물과 결여의 수고가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 고통을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 가셨다면, 가난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왔다면, 돈이 없어서 돈의 결여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왔다면, 나도 아브라함과 사래처럼 자녀가 없어서 하나님 앞에 울부짖기 위해서 나왔다면, 나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고통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나왔다면, 그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과정을 통해서도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이시고 좋으신 아버지이십니다.

2. 과거에 발목 잡힌 절반의 성공

둘째로, 이들의 떠남의 여정을 통해서 우리가 깨닫는 두 번째 교훈은 데라의 떠남은 절반의 성공으로 끝나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창 11:31)

가나안으로 가고자 했는데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했습니다. 여기에 '거류하다'에 해당하는 동사 '야샤브(יָשַׁב)'는 그냥 임시로 잠깐 머물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예 눌러앉다, 정착하다, 자리를 펴다라는 뜻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이 그들을 떠나게 하시고 고통과 상처 때문에 우상숭배 땅을 떠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들이기를 원하시는데, 그들은 왜 가나안 땅으로 가다가 하란에 머물고 말았을까요?

하란이라는 이름이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지만 죽은 아들 하란의 이름과 똑같지 않습니까?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원래 그 지명 이름이 하란이든지, 아니면 성경에 나오는 여러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지명과 전혀 상관없이 데라가 그 지명을 죽은 아들의 이름을 따서 하란이라고 불렀든지, 두 가지 가능성 전부 아직까지 데라는 아들의 상처에 발목 잡혀 있는 것입니다. 길을 떠나다가 아들의 이름과 똑같은 지명 하란을 만났습니다. 죽은 아들이 생각납니다. "이제 우리가 아들을 기념하며 이곳에 여장을 풀고 이곳에 정착하고 여기 뿌리내리고, 여기서 이제 우리가 그다음 인생을 결정하자."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들이시기를 원하시고, 그들의 최종 목적지는 가나안이었는데, 그들은 가나안으로 가다가 그냥 하란 땅에 자리를 잡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 가능성이라면 그 땅이 원래 하란이 아니었는데 죽은 아들의 이름을 따서 하란이라고 지었다면 마찬가지로 데라는 아들의 상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과거의 상처에 발목 잡혀서 믿음의 여정을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지난해에 우리가 받았던 상처가 올해 믿음 생활을 시작하는 일에 걸림돌이 되는 일이 왜 없겠습니까? 누구 때문에 나는 신앙생활 하기가 힘든데, 그 사람 때문에 내 인생의 믿음의 여정이 걸림돌이 되고, 그것 때문에 내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문제가 되는 사람이 우리 중에 왜 없겠습니까? 그런데 그건 어리석은 일입니다. 지나간 일이 내 믿음의 여정에, 가나안 땅의 삶을 방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은 내 속에 있는 상처에 발목 잡혀서 가나안까지 나가지 못하고 하란에 몸을 누여 버립니다. 그래서 그렇게 얻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이미 그 아들은 세상을 떠났고, 그런데 나는 그 아들 때문에 하나님께서 원하는 자리까지 믿음의 성장을 한 발자국도 이루지 못하고 있다면 그건 자신에게 영적으로 손해가 될 뿐입니다.

세상의 많은 타종교들은 인간의 상처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런데 결론은 궁극적 진리인 목적지 가나안 땅에 도착하지 못하고 하란에 멈추고 맙니다. 공자를 보십시오. 공자는 칠십 세 노인과 십육 세의 무당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비정상적인 관계 아닙니까? 그 사이에서 태어나자마자 아버지는 세 살 때 세상을 떠납니다. 어머니는 공자의 나이 이십사 세에 세상을 떠납니다. 공자가 그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무엇을 배웠겠습니까? 너무 이른 나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에게서 배운 것은 굿하는 것, 죽은 자와 접신하는 것, 그것밖에 배운 것이 없습니다. 공자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 장례 대행업을 하면서 호구지책으로 연명합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인생 무상을 깨닫고 사람 관계에서 자기 나름대로 깨닫는 것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을 모으고 학파를 형성하고 유학과 유교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사람의 상처에서부터 출발한 여정이기 때문에 가나안까지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하란에 멈추고 맙니다. 그 상처가 결국 그의 발목을 잡아서 하란에 머물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지난해에 일어났던 일이 올해에 우리의 믿음의 여정을 방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난날 우리의 아픔과 상처가 우리 신앙 성장을 방해하면 우리는 과감히 떨치고 일어나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의 여정을 향하여 다시 한번 걸어가고 달려가야 합니다. 이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믿음의 여정입니다.

3. 보장된 현재와 불확실한 미래 사이에서

데라는 그만 하란 땅에 멈추고 말았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보시기에 데라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 땅 하란에서 죽은 아들을 부여잡고 여전히 과거에 멈춰 있는 데라, 하나님은 이제 그에게는 소망이 없음을 발견하시고 아브라함을 직접 불러 내십니다. "너는 거기에 멈춰 있지 마라. 과거의 상처에 매몰되어 있지 마라. 이제 내가 너에게 다시 부름을 허락하였으니 다시 길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라"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창 12:1)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이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축복의 말씀 아닙니까? 그런데 이 말씀이 주어진 시점이 중요합니다. 데라가 죽기 전에 이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데라가 세상을 떠난 후에 이 말씀이 아브라함에게 임했습니까?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창 11:32)

창세기 11장을 데라의 죽음으로 마무리 짓고 12장을 시작하기 때문에 우리는 12장을 읽을 때 하나님께서 데라가 죽은 후에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데라의 나이 칠십에 아브라함이 태어났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 나이가 칠십오 세이면 데라의 나이는 백사십오 세입니다. 아브람이 칠십오 세에 부름을 받았습니까? 그러므로 데라가 이백오 세까지 살았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떠나고 난 이후에 하란 땅에 육십 년을 더 살았다는 결론입니다. 아직까지 데라가 하란 땅에 백사십오 세가 되어 살아 있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면 성경은 마치 데라가 죽은 후에 아브라함을 부른 것처럼 왜 이렇게 기록해 두었을까요? 성경이 이렇게 기록한 이유는 믿음의 여정은 혈육도 물질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어떤 것도 다 끊고 떠나는 것임을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록해 주신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가장 질긴 것이 혈육의 정 아닙니까?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것이 물질 아닙니까? 아직까지 아버지 데라가 살아 계시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려면 유산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유산을 상속받을 수가 없습니다. 가장 확실한 유산과 물질과 아버지 집을 두고 떠나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렇게 표현하기 위해서 성경을 이렇게 기록해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여정을 우리가 돌아보면 가장 확실한 현재와 보장된 현재, 그러나 불확실한 미래, 아직까지 보장되지 않은 미래 사이에서 결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혈육만큼 확실한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물질만큼 보장된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보장된 현재와 가장 확실한 혈육의 정을 끊고, 이제 너는 과거에 매몰되어 살지 말고 원래 가려고 했던 가나안 땅으로 내 말씀을 쫓아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아직까지 보여주지도 않은 땅입니다. 아직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서 보장된 현재, 확실한 지금을 놓고 떠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길이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믿음의 여정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도 똑같이 하신 말씀입니다.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막 1:16-18)

베드로와 안드레를 예수님께서 부르실 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물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보장된 현실 아닙니까? 가장 확실한 지금 아닙니까? 그들은 그물을 가지고 평생 동안 갈릴리 호숫가에서 먹고 살았습니다. 그것만 있으면, 그물과 배만 있으면 먹고 사는 것은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평생 동안 그것 가지고 살았고, 앞으로도 그것 가지고 연명하고 호구지책을 삼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불확실하고 애매한 말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이 말씀을 통해서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확실한 현재를 포기하고 불확실한 미래에 자신의 인생을 걸었습니다.

요한과 야고보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막 1:19-20)

아버지도 보장된 현실입니다. 아버지는 튼튼한 울타리가 되어주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유산을 받을 수 있는데, 아버지를 배에 두고, 배와 아버지를 함께 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야고보와 요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지금 확실한 현재를 버려두고 불확실한 미래인 예수님께 인생을 걸었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가 되었고, 그들은 복음서의 저자가 되었고, 사도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훌륭한 영적 지도자들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도 보장된 현실을 버려두고 하나님의 말씀,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는 그 말씀에 보배를 두고 그리로 갔을 때, 그도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고 말씀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말씀을 따라가는 것에 방해되는 것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데라가 그랬던 것처럼 과거의 상처가 우리의 발목을 잡기도 하고, 보장된 현실, 눈에 보이는 물질이 말씀을 따라가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확실하다면 그 말씀 따라서 희뿌연 안개가 가득히 놓여 있는 올 한해를 다시 도전하고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 따라 걸어가면 시간이 지나면 안개가 걷히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고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놀랍고 위대한 영적 축복이 우리 앞에 가득 차 있으리라 믿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처를 통해서도 사람들을 불러 주셨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실의 아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결여된 아픔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자리에서 떠나게 하셨지만, 그러나 데라는 과거에 발목 잡혀 다시 하란에 머물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시고 안타까이 여기셔서 아브라함을 다시 불러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보장된 현재를 뒤로하고 불확실한 미래에 자신의 인생을 걸었습니다. 주여, 우리에게도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자신의 인생을 걸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새해 우리 앞에는 희뿌연 안개가 가로 놓여 있습니다. 아직까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코로나 상황과 경제적인 상황과 정치와 사회적인 현실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붙잡지 않도록 도우시고, 불확실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가장 확실한 진리의 말씀인 주의 말씀을 붙잡고 걸어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그 길 끝에서 계신 우리 주 예수님을 만나게 하옵시고, 우리 주님과 함께 믿음의 여정을 온전히 승리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