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강 / 너는 복이 될지라 (12:1-4)

너는 복이 될지라

본문: 창세기 12:1-4

자유민주주의가 선택한 경제 체제는 자본주의이고, 사회주의가 선택한 경제 체제는 공산주의입니다. 이 둘 사이에는 여러 가지 차이점이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본질적인 차이를 꼽으라면 단연 사유재산 제도입니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공산 사회에서는 사유재산을 소유할 수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간혹 북한의 실상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면 북한 가정에도 텔레비전이 있고, 심지어 북한 주민들이 휴대전화를 가지고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를 보면 우리가 알고 있던 상식이 잘못된 것인가, 혹시 저것도 당에서 대여해 준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게 됩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면 그들도 텔레비전과 휴대전화 정도는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는 생산수단은 결코 개인이 소유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생산수단이란 토지나 공장, 기업 같은 것을 말합니다. 쌀과 농작물을 만들어내는 수단이 되는 토지, 공산품을 만들어내는 수단이 되는 공장과 기업 등은 공산 사회에서 철저하게 국가와 당의 소유입니다. 모든 국민은 다만 노동자일 뿐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공산주의 사회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꿈을 꿀 수도 없고, 설령 꿈을 꾼다 하더라도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노동자라는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없다면, 누가 꿈을 꾸고 누가 열심히 일하겠습니까? 하지만 좋은 의미에서 기업은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고용을 창출하고 연구개발을 통해서 국가와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를 영적인 영역으로 옮겨보면 복의 곁가지만 쫓아다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복 자체가 되어서 복을 지어 나누어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너는 복이 될지라" 말씀하셨습니다. 복을 평생 따라다니고 복의 곁가지만 쫓는 인생이 아니라, 복 자체가 되어서 복을 만들고 복을 나누어주는 복의 원천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일컫고 따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이렇게 복 자체가 되게 해 주셨다면, 우리도 아브라함의 믿음의 길을 따라 걸어간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도 역시 복 자체가 되어서 복을 지어 나누어주는 인생으로 함께 세워 가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그 길을 결단하고 걸어가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1. 떠나가라 하신 하나님의 명령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창 12:1)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서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길게 말씀하셨지만, 이 말씀은 한마디로 "떠나가라"는 말씀입니다. 떠나서 가라는 명령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해서 갈대아 우르를 떠났습니다. 그곳은 우상이 가득한 곳이었는데, 그곳을 떠나서 영적 목적지인 가나안까지 가야만 했건만 중간에 멈추고 말았습니다. 죽은 아들의 이름과 똑같은 '하란'에 멈추어 서서 과거에 발목 잡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데라에게 향한 소원을 거두시고 아브라함을 불러서 이제는 네가 떠나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실 아브라함이 그곳을 떠나가는 데는 상당한 제약이 있었습니다. 일단 혈육의 정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신데 살아계신 아버지를 두고 떠나가는 것이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신데 유산을 상속받을 수가 없습니다. 먹고사는 문제, 돈 문제가 걸려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보장된 유산을 포기하고 불확실한 미래를 선택하기가 결단코 쉽지 않습니다. 세 번째 문제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실 땅을 아직 가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보여 주실 땅"이라고 하셨습니다. 아직 답사도 해보지 않은 불확실한 미래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아브라함은 사실 떠날 마음이 썩 내키지 않았을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나오는 여러 위인들을 통해서 "떠나가라"는 메시지를 자주 들려주셨습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서 공생애의 삶을 사시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너 있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가라"고 여러 번 말씀하시고 재촉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베데스다 연못 사건이 나옵니다.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안식일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베데스다 못 가에 몰려들었습니다. 그 연못에는 전설이 하나 내려오고 있었는데, 천사가 가끔씩 내려와서 물을 동하게 할 때 그때 일등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이든지 낫는다는 전설이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병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병 낫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몰려들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그 연못에 들어가서 보시니 삼십팔 년 된 병자가 보입니다. 그 연못에서 가장 오래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병이 낫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병자에게 다가가서 묻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질문은 사실 어리석은 질문처럼 보입니다. 삼십팔 년 동안 병자로 살았는데 왜 낫고 싶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낫고 싶고, 당연히 일어나서 건강하게 다니고 싶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었는데, 그 사람은 우리의 상상과는 전혀 다른 대답을 합니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요 5:7-8)

이 사람은 "예수님, 저도 어서 병 낫고 싶습니다"라고 말한 것이 아니고, 주변을 원망하고 핑계거리를 잡고 있습니다. 물이 동할 때 누구도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고, 다른 사람들이 먼저 내려가서 제가 이 모양 이 꼴로 삼십팔 년째 그 자리에 이러고 앉아 있습니다. 주변을 원망하고, 자기 신세를 한탄하며, 사람들에 대한 불평과 핑계거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인생의 모두가 불평불만입니다. 주변 사람들 때문에 내가 지금 병 낫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자에게 우리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 말씀은 지금 네가 삼십팔 년 동안 그 자리에 머무는 그 자리를 둘둘 말아 걸어가라는 뜻이 아닙니다. 원망의 자리, 불평의 자리, 지금까지 여러 사람들을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마음이 상한 그 자리를 들고 일어나 떠나가라는 말씀입니다. 언제까지 원망하고 앉아 있으려고 하느냐, 언제까지 불평하고 언제까지 남 탓하고 핑계대고 앉아 있으려고 하느냐, 이제는 핑계하지 말고 원망하지 말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가라고 방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신기하게도 그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갔고, 병이 나았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초막절 잔치 마지막 날에 뒷골목을 헤집고 다니면서 간음하는 여인을 현장에서 붙잡아 예수님 앞에 데리고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손에 돌멩이 하나씩을 쥐고 있습니다. 그 여인에게 던져서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땅바닥에 손으로 뭔가를 쓰셨습니다. 그리고 일어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이 여인을 돌로 쳐라." 사람들은 저마다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한 사람 한 사람씩 슬금슬금 자리를 떠나갑니다. 예수님과 여인 두 사람만 남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요 8:10-11)

우리 예수님이 무작정 이 여인을 용서하신 것이 아닙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정욕의 자리, 음란의 자리, 죄의 자리를 떠나가라는 말씀입니다. 너는 남모르게 은밀한 죄의 낙을 누렸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 보고 계시고 다 알고계시니, 이제는 일어나서 죄의 자리를 청산하고 떠나가라, 다시는 죄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죄 지으면 너는 더 이상 죄의 종 노릇을 하고 더 이상 해방될 수 없으니, 이제는 죄의 종 노릇하지 말고 떠나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서 과거의 환영에 사로잡혀 있지 말라 하셨고, 혈육의 정에서 떠나가고 먹고사는 문제에서 떠나가고 불확실한 미래를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떠나가라 말씀하셨습니다. 원망의 자리에 매여있는 삼십팔 년 된 병자에게는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말씀하셨고, 죄악을 누리고 있는 여인에게는 "이제는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죄의 자리에서 일어나 버리고 떠나가라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는 어디에서 떠나가라고 말씀하십니까? 우리는 누구나 인생의 고민들이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남들에게 말하지 못하는 가정의 고민들, 문제들이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믿음이 한 뼘도 성장하지 못하는 문제들을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청산하려고 해도, 빨리 벗어나고 일어나서 떠나가려고 해도 여전히 우리는 거기에 발목 잡혀 살고 있는 문제가 왜 없겠습니까?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인간관계와 혈육의 정 때문에, 원망과 불평 때문에, 남모르는 은밀한 죄의 낙을 누리는 것 때문에, 그것 때문에 우리 믿음이 성장하지 못하고 "떠나야지, 떠나야지, 이제는 청산해야지, 이제는 청산하고 떠나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새 사람이 되고 새 삶을 살아야지" 이렇게 결단하면서도 매번 무너지고 또 무너지는 것들이 왜 없겠습니까?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떠나가라고. 이제는 네가 머물러 있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떠나가야 너희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마음만, 생각만 새로운 인생을 살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제는 행동하고 보여달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십니다. 그 요구와 요청에 충실하게 응답하시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복 자체가 되게 하시는 약속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떠나가라고 하시고, 떠나가기만 하면 너를 이렇게 만들어주겠다며 복을 약속하십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창 12:2-3)

"너는 복이 될지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나님은 그렇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사실 이런 어마어마한 약속이 아브라함에게 과연 와닿았을까요? 우리가 그 당시에 아브라함이라면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너를 복 자체가 되게 할 것이다, 너를 만나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이 과연 와닿았겠습니까? 전혀 와닿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에게 필요한 것은 민족 따위가 아닙니다. 복 자체가 되는 것이 그에게는 문제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한 가지, 아들 문제입니다. 남들 다 있는 자식이 그에게는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 저는 민족도 필요 없고 복 자체가 되는 것도 관심 없고, 땅의 모든 족속이 나로 말미암아 복 받는 것은 통째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저에게는 아들 하나만 주십시오. 그것만 있으면 됩니다. 저는 큰 욕심이 없습니다. 그냥 아들 하나만 주십시오."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눈앞에 보이는 복만 생각합니다. 지금 닥친 인생의 문제가 가장 급하다고 생각합니다. 발등에 떨어진 불을 꺼야 하는데, 하나님은 그런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너는 복이 될지라, 큰 민족을 이룰 것이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이러고 계시니, 우리는 하나님의 스케일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더 크게 보시고, 하나님의 스케일은 우리의 상상을 훨씬 초월하여 계십니다.

이 간극을 어떻게 메꾸어 갈 수 있을까요? 과연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이렇게 부르실 때 하나님의 의도와 뜻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깨달았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창 15:2)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창 17:18)

창세기 15장 2절 말씀은 자식이 전혀 없었을 때 하나님께 투정 부리는 장면입니다. "하나님, 자식 하나 달라 해놓고 주지 않으시니 우리 집에는 똘똘한 종이 하나 있습니다. 다메섹 엘리에셀인데, 이 종을 세워서 제 후사로 삼겠습니다. 이 사람에게 저의 모든 재산을 다 상속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투정을 부립니다. 시간이 더 지나서 약속의 아들이 아닌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마엘을 통해서 내가 너를 복 주려고 하는 게 아니다. 사라를 통해서 아들이 태어날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시자 아브라함은 "아닙니다 하나님, 저는 지금 늙었습니다. 제 아내 사라도 늙었습니다. 그러니 여기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잘 살았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이라는 이름은 '존귀한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그저 존귀한 아버지로, 이스마엘의 아버지로만 살고 싶었습니다. 소시민적인 삶으로 만족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그림은 그런 그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복 자체가 되기를 원하시고, 열국의 아버지가 되어서 모든 민족을 먹이고 모든 민족을 돌보게 하시며, 그에게 하나님은 큰 꿈과 비전을 품으시고 그렇게 세워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우리 가정에서 성장하고 있는 자녀들에게도, 우리 교회에서 자라고 있는 어린 생명들에게도 큰 꿈을 가지고, 큰 기대와 큰 비전을 가지고 계십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꿈을 내 꿈으로 만들어서 함께 이루어 갈 수 있을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가 아주 필요합니다.

그 첫 번째가 철저한 자기관리가 필요합니다. 즉 죄짓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고 교제하려고 하는데 죄를 지으면 하나님과 교제하고 동행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꿈을 내 꿈으로 끌어안고 인정하고 함께 세워져 나가는 데 죄는 아주 방해가 됩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은 어려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될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길고 긴 광야 생활에 지쳐서 마음 상한 적이 있습니다. 자존심이 몹시 다친 일이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칼을 찾습니다. 그것 때문에 군대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자기를 마음 상하게 한 나발을 죽이려고 군대를 이끌고 말을 달려 달려 갑니다. 그에게 길을 맞서고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다윗의 앞을 막아선 한 지혜로운 여인이 있습니다. 아비가일입니다. 아비가일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생명 주머니에 당신이 지금 들어가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이스라엘의 왕이 될 인물입니다. 그런데 어찌 좀스러운 나발 때문에 당신의 칼에 피를 묻히려 하십니까? 앞으로 큰일을 하셔야 되고 큰 인물이 되셔야 될 분이 왜 함부로 죄를 지으려 하십니까? 걸음을 멈추십시오. 당신의 정체성을 기억하십시오." 그때 다윗은 크게 깨달았습니다. 달리던 길을 멈추고 칼을 거두고 말머리를 돌리고 아비가일을 칭찬하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하마터면 큰 죄를 지을 뻔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비전을 이루고 그 꿈을 이루어 가는 데는 죄짓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하고 눈높이를 맞추어 가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또한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주시려고 하는 큰 복과 복 자체가 되려면 고난을 통과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주시려고 하는데 당연히 고난과 어려움이 따르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밥 먹고 사는 일도, 돈을 벌기 위해서도 사람들은 땀 흘리고 수고합니다. 영적인 위대한 복을 누리기 위해서 고난은 당연히 우리에게 오는 필수 과목입니다. 고난을 피하지 말고 고난에 정면으로 맞서서 고난을 이겨 나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두 번이나 꿈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요셉을 향하여 가지고 있는 꿈과 비전을 그에게 꿈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요셉은 그 꿈을 이루어 가기 위해서 고난을 올곧게 견뎌 냅니다. 노예의 삶도, 죄수의 삶도 온전히 견디고 이겨냈습니다. 그래서 정말 그 꿈대로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가지고 계셨던 비전과 꿈이 온전히 이루어졌고, 애굽의 위대한 총리가 되었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품고 계신 그 꿈을 하나님의 손으로 이루어 드리려면 우리도 죄짓지 않고 믿음의 길을 걸어가고, 고난의 길을 잘 견디고 이겨 나가고, 우리 자녀들을 그렇게 길러 가고, 우리 믿음의 후세대들을 그렇게 키워 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꿈을 우리가 마음으로 받아서 함께 성취하고 반듯이 세우고 이루어갈 줄로 믿습니다.

3. 말씀을 따라 걸어간 아브라함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꿈과 비전을 주시고,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합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창 12:4)

이 장면을 영화로 만든다고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과 사라와 롯, 세 명이 멀고 먼 길을 사막을 횡단해서 걷고 있습니다. 멀리서 보면 이 세 사람이 똑같이 믿음의 여정을 걷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갔고, 롯은 사람을 따라갔습니다. "롯도 그와 함께 갔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과 롯이 사람을 따라가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엄청난 차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간 아브람이 앞으로 받아 누릴 복은 어떤 복일까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협박하거나 위협하지 않았습니다. 인격적으로 말씀하셨고, 아브라함은 자발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따르고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사 40:8)

풀과 꽃으로 대변되는 이 세상, 다 마르고 시드는 것입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화려한 꽃도 열흘이 지나면 다 시들고 말지 않습니까? 위대한 권력도 몇 년 가지 못하고 다 스러지고 사라지는 것이 오늘 우리 인생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그렇게 건강했던 사람도 하루아침에 병상에 눕고, 그렇게 많았던 돈도 한순간에 휴지 쪽처럼 다 사라지는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토록 우리 앞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갔습니다. 사람 따라 갔으면 사람은 아침저녁으로 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토록 변함없는 진리의 말씀으로 아브라함을 생명 다하는 그날까지 인도해 가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속이지 않습니다.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민 23:19)

하나님은 거짓말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행하시고 반드시 지키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거짓말하는 법이 없습니다. 사람은 얼마나 거짓말을 많이 합니까? 사람에게 우리가 한두 번 속아 보셨습니까? "내가 반드시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해놓고도 사람들은 잘 지키지 않습니다. 핑계거리를 찾습니다. 약속을 어기는 것을 반복하기 일쑤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많은 사람에게 속고 실망하고 낙심하고 여기까지 오지 않았습니까?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갔기 때문에, 거짓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복이 될지라" 하셨으니 반드시 복이 되게 하시고, "너를 통하여 모든 족속이 복을 얻을 것이라" 하셨으니 반드시 그렇게 되게 하시고, "너로 인하여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실 것이라" 하셨으니 반드시 그렇게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없고 거짓말이 없습니다.

반면 사람을 따라가는 롯은 어떻게 됩니까? 사람 따라가는 것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그 사람과 관계가 좋을 때는 문제가 없는데, 그 사람과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면, 그 사람이 쓰러지면, 그분의 믿음이 무너지면 나의 믿음도 함께 문제가 생깁니다. 아브라함을 따라왔던 롯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삼촌을 아버지처럼 믿고 따라갔습니다. 그런 롯이 시간이 지나서 가세가 부유해집니다. 애굽에 내려갔다가 올라오면서 금은보석과 가축을 얻어왔습니다.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툽니다. 목초지 문제 때문에 서로 갈등이 생겼습니다. 거기서 롯은 미련 없이 소돔 땅을 선택하고 떠나 버렸습니다. 아브라함과 롯 사이에 물질 문제가 들어오자 두 사람이 미련 없이 떠나고 만 것입니다. 사람을 따라가는 것이 이렇게 위험합니다. 그 사람이 정말 좋아서, 그 사람의 인격이 믿을 만해서, 그 사람이 나에게 정말 친절하게 대해줘서 나는 그 사람을 마치 하나님처럼 믿고 따랐는데, 그 사람의 실체를 보는 순간 내 믿음도 함께 무너져 내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는 롯의 비극적인 결말을 잘 알고 있습니다. 소돔 사람은 악하고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소돔 땅에 들어갔고, 그 가정 전체가 파멸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잘못이 없을까요? 당연히 아브라함도 잘못이 있습니다. 그의 잘못은 그가 정말 자식처럼 키워서 길렀던 롯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데려다 놓지 못한 것입니다. 자기가 정말 먹이고 입히고 돌봤던 자식 같은 롯인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양해줘야 할 때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자신의 그늘에서, 자신의 휘하에서만 돌보고 키우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실패한 것입니다.

좋은 부모가 어떤 부모입니까? 훌륭한 부모는 어떤 부모일까요? 시기가 되면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양시켜 주어야 합니다. 부모의 말이 먹히는 시기가 한정되어 있지 않습니까? 사춘기 시절이 지나가고 나면 자녀들은 부모의 말이 백 퍼센트 잘 먹히지 않습니다. 그전에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먹이고 돌보고 이양시켜서, 부모 말에서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마가 앞으로 생강처럼 붙들고 살아가라고 자녀들을 하나님 앞으로 옮겨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훌륭한 부모입니다.

좋은 목회자는 어떤 목회자입니까? 하나님과 성도들 사이를 말씀으로 연결해주는 목회자입니다. 대단한 카리스마로 성도들 위에 군림하고 하나님과 성도들 사이를 가로막는 목회자가 훌륭한 목회자가 아니라,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말씀을 먹이고 돌보고 기도해주고, 성도들이 스스로 자립 신앙을 가질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서 홀로 설 수 있도록, 그 말씀으로 스스로 먹고 살 수 있도록, 영적으로 일어설 수 있도록 그렇게 길러주는 목회자가 좋은 목회자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영역에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떠나라고 한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떠나라고 하신 것에서 일어나 떠나가셔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큰 그림과 비전을 가지고 복이 되게 하시고, 복 자체를 지어서 나누어주는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사람 따라가지 마시고 말씀 따라가서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거장이 되시고, 훌륭한 믿음의 가문을 이루어 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아브라함은 혈육의 자리, 먹고사는 현실의 자리를 떠나서 미래 말씀의 자리를 좇아서 떠났습니다. 음란과 정욕의 자리를 떠나라 하신 예수님, 원망과 불평의 자리를 떠나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믿고 떠났던 자들도 결국 이기고 큰 복을 받아 승리하였습니다. 주여, 오늘 우리에게도 떠나라고 하신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하시고 깨닫게 하옵소서. 지금까지 여러 가지 핑계로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던 것을 회개하고, 다시 일어나서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믿음의 자리를 향하여 온전히 전진하고 나아가기를 원하오니, 아버지 하나님 함께하여 주옵소서. 복의 곁가지만 따르는 자들이 아닌, 복의 원천이 되리라 하신 말씀처럼 우리 모든 믿음의 백성들이 고난을 잘 견디고 이겨내며, 우리 자기 자신을 잘 관리하고 죄짓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복의 원천이 되기를 원합니다. 사람 따르지 않도록 도우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서 영원토록 변함없고 거짓이 없으신 주의 진리의 말씀을 따라 걸어가게 하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