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근이 심하였음이라
본문: 창세기 12:5-10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을 우리는 익히 들어왔습니다. 시작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시작을 하면 과정이 있고, 과정을 거치면 결과가 따라오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시작과 과정은 결과로 향하는 매우 중요한 여정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은 시작과 과정은 무시한 채 오직 결과만 중시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과정에서 반칙을 저지르고, 범법 행위를 자행하며,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행동도 서슴지 않습니다. 결과만 좋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시작과 과정을 결코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됩니다.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겪을 수 있고, 때로는 실수도 하고 실패도 하며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귀한 비전과 약속을 따라 걸어가는 그 길 자체에 깊은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삼국통일의 역사도 그러한 과정과 절차가 지극히 중요했습니다. 우리는 삼국통일이라 하면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는 결과만 기억합니다. 과정에 대해서는 자세히 배운 적도 없고, 배웠다 하더라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삼국통일은 그 과정과 시작이 무척이나 중요했습니다. 백제가 멸망한 것이 660년이고, 신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이 668년입니다. 하지만 그 시작은 그보다 훨씬 위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신라의 선덕여왕 때부터 삼국통일이 준비되었습니다. 선덕여왕은 632년부터 647년까지 재위했으며, 신라의 27대 왕이자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었습니다.
선덕여왕 당시 신라는 보잘것없는 나라였습니다. 백제와 고구려의 기세가 워낙 강렬했고, 바다 건너 일본과 서쪽의 당나라가 강력한 제국이었습니다. 신라는 정말 보잘것없는 변방이었습니다. 신라의 백성들은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선덕여왕은 이 패배의식부터 일깨우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경주 한복판에 9층짜리 목탑을 세웠습니다. 높이가 자그마치 80여 미터나 됩니다. 그 당시에는 고층 건물이 전혀 없었기에, 경주 사람들은 어디서나 그 80미터짜리 목탑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선덕여왕이 이 목탑에 담은 뜻은 이러했습니다. "이제 우리도 저 9층 목탑처럼 우리나라 모든 백성이 큰 비전과 꿈을 가지자. 비록 지금은 이렇게 살고 있으나, 삼국 중에 가장 강력한 나라가 될 것이다." 특히 젊은이들과 청년들이 그 꿈을 가지고 다시 일어서기를 여왕은 간절히 염원했습니다. 그다음 선덕여왕은 인재를 등용합니다. 김춘추와 김유신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김춘추는 진골 출신이었지만 몰락한 집안의 자제였습니다. 하지만 여왕은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능력 하나만 보았습니다. 그를 등용하여 외교를 맡겼습니다.
김유신은 금관가야 출신입니다. 성골도 아니고 진골도 아닙니다. 몰락한 나라의 장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용맹함을 높이 샀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국방을 맡겼습니다. 온 나라 왕실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왜 하필 김춘추와 김유신인가? 그 과정에서 여왕은 여자라고 무시당했고, 외교적인 결례도 수차례 당했으며, 크고 작은 전쟁에서 패배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삼국 중에 가장 강력한 나라"라는 목표만 가지고 한 걸음 한 걸음 과정을 충실하게 밟아 나갔습니다.
여왕의 사후에 삼국통일이 이루어졌습니다. 그가 살아있을 때 통일을 보지는 못했지만, 여왕이 등용했던 김춘추와 김유신을 중심으로 삼국을 통일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것이 그녀가 가시밭길을 걸어왔던 결과였습니다.
사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과정을 견디어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신화가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무조건 복받고, 무조건 돈 잘 벌고, 무조건 성공한다는 신화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아브람이 기근을 겪은 사건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믿음의 여정을 걸어갔는데,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기근이었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기근이 있고 가시밭길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 기근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어떻게 극복하느냐, 어떻게 믿음으로 승화시켜 나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 인생에 닥친 기근을 어떻게 믿음으로 극복하고 이겨 나가야 할지를 함께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순종의 길 끝에 선 기대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창 12:5)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완벽한 호응이요, 완벽한 순종입니다. 하나님이 "떠나가라"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하셨고, 아브람은 그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입니다.
아브람은 어떤 기대를 가졌을까요? 마음에 큰 기대를 품었을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고, 하나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해서 이 길과 이 여정을 걸어왔으니, 하나님께서 보상해 주실 것이다." 아브람은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하나님 이야기를 잘 알고 들어왔습니다. 천지만물을 6일 동안의 말씀으로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은 인간 세상에 죄가 관영하자 세상을 심판하시기도 했습니다. 노아 시대에 세상을 심판하셨고, 바벨탑 사건을 통해서 인간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이라면, 그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면,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나와 우리 가정에게 위대하고 놀라운 축복을 이미 준비해 놓으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복을 받아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아브람은 그렇게 생각하고 여정을 달려와서 드디어 가나안 땅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그가 기대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현실이 그와 그의 가족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창 12:6)
원주민들이 가나안 땅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람이 그 땅에 살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살 만한 곳에는 이미 자리 잡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농사짓기 좋은 땅, 목축하기 좋은 땅에는 이미 원주민들이 다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아브람은 당황했습니다. 아브람은 목축하고 농사짓는 사람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을 위하여 준비해 두신, 숨겨둔 땅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원주민들이 적당한 땅에는 다 살고 있습니다. 만약 아브람이 그 땅에 정착하려면 개척해야 합니다. 개척하다가는 충돌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아브람의 가족은 이주민입니다. 충돌하다 보면 그들의 생명이 위협당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어려운 상황을 아브람은 겪으며 상당히 당황스러워합니다.
이런 아브람의 마음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창 12:7a)
하나님이 아브람을 안심시킵니다. "걱정하지 마라.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겠다." 아브람은 믿고 싶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이 땅을 주시겠지? 믿고 싶었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지 않으면 그는 이제 오갈 데가 없지 않습니까? 아버지를 떠나왔고, 유산 상속도 포기하고 떠나왔습니다. 이제는 돌아갈 곳도 마땅치 않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정말 이 땅을 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두 가지 행동을 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창 12:7-8)
여호와께 제단을 쌓았다는 말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이 말은 예배드렸다는 뜻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아브람은 어떤 기도를 드렸을까요? 어떤 기도 제목으로 간절하게 아뢰었을까요?
아마 아브람은 이렇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이제 보여주십시오. 좌표를 찍어 주십시오. 사람들이 살지 않는, 하나님께서 우리만을 위하여 숨겨 두신 그 땅을 이제 보여주십시오. 이제 하나님, 그만 감추시고 보여주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붙들고 여기까지 왔다면 보상해 주셔야 옳지 않습니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우리가 먹고살 만한 땅도 왜 보여 주시지 않습니까? 이제는 보여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고 또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일 이후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아브람과 그의 가족은 점점 다른 땅을 찾아서 계속해서 옮겨 다닙니다.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창 12:9)
가나안 땅을 유람하기 위해서 여행 다닌 것이 아닙니다. 먹고살 만한 땅, 정착하기 좋은 땅, 목축하고 농사짓기 좋은 땅을 찾아서 점점 남방으로 옮겨 다니며 그들이 살 땅을 찾았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마땅한 곳이 없습니다.
아브람은 지금까지 평생을 갈대아 우르에서 살다가 하란에서 살았습니다. 그가 경험한 곳은 두 장소입니다. 그런데 갈대아 우르나 하란보다 나은 땅을 찾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인데, 하나님이 주시기로 분명히 약속하신 땅인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적어도 하란보다는 나아야 합니다. 적어도 우상의 도시 갈대아 우르보다는 나아야 하는데, 그런 땅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하란만큼만 되어도 정착했을 텐데, 그런 땅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브람은 얼마나 실망했을까요?
2. 복을 향한 먼 길, 훈련의 시작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왜 이렇게 하십니까? 하나님은 이런 상황을 통해 우리를 부르시고 복을 주시기 전에 한 단계 중요한 과정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하나님은 부르시고 훈련시켜서 복이 되게 하십니다. 아브람은 훈련의 과정을 잊어버리고 간과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면 곧장 복이 되게 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 전체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부르시고, 부르신 사람을 훈련시켜서, 하나님은 복받을 만한 그릇을 갖추게 하시고, 사람답게 만드셔서, 그를 복이 되게 하시고 복을 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은 전적인 은혜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구원 이후의 우리를 성화의 삶으로 이끄시고 인도해 가십니다. 이 성화의 과정이 곧 훈련입니다.
하나님이 요셉을 부르셨습니다. 그에게 두 번의 꿈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요셉을 훈련시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감옥에서 훈련시킵니다. 그 후에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시고 복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를 광야에서 40년 동안 훈련시킵니다. 장인의 양을 치게 하시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그를 충분히 훈련시키신 이후에 바로에게 가게 하셔서 출애굽의 영웅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하나님은 그를 세워 주셨습니다.
아브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부르시고, 이제는 부름받은 가나안 땅 그 땅이 아브람에게 훈련소가 됩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 땅에서 스스로 개척하게 하시고, 그 땅에서 목축하게 하시고, 그 땅에서 농사짓게 하시면서, 하나님을 닮아 가고 깨닫게 하시면서, 그 땅의 사람들과 함께 부딪히며 어울리며, 그곳에서 하나님의 사람답게 성장하게 하시려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오늘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서 교회에 앉혀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는 훈련받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우리는 예배드리면서 훈련받습니다. 할 일이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주일날 예배드리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훈련받습니다. 성경 공부하면서 훈련받고, 기도하면서 훈련받고, 전도하고 선교하고 친교하고 봉사하면서 훈련받습니다. 나와 결이 다른 사람과 만나면서 뾰족했던 내가 깎여 나가고 둥글둥글해집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이 훈련을 통해서 주인이 바뀌어집니다. 세상에서는 내가 주인이었고, 물질이 주인이었고, 세상의 권력이 주인이었는데, 이제는 우리가 교회 공동체에서 믿음생활 신앙생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이 됩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아버지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에 올 때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끊임없이 훈련시켜서 복을 주십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예수 믿으면 복받습니다." 그런데 더 정확하게 말하려면 이렇게 해야 합니다. "예수 믿고 훈련받으며 복받습니다. 훈련을 잘 통과해야 복이 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우리는 지금 훈련 어디쯤 보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만져 가시고 빚어 가시고 훈련하고 계신데, 그 훈련을 피하게만 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미 준비하신 복을 받아 누릴 수가 없습니다. 훈련을 빨리 끝내는 방법은 순종이 최선입니다. 하나님의 훈련에 순종해서 훈련을 잘 받으면 이 훈련은 빠르게 끝납니다. 그런데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훈련을 요리조리 피해가기만 한다면, 평생 훈련만 받다가 끝납니다. 야곱처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준비하신 훈련 잘 받고, 그 훈련을 잘 통과해서, 하나님이 "복이 될지라" 하신 그 복이 다 우리의 복이 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 훈련 안에서 피하지 마시고, 훈련을 넉넉히 이기는 믿음 달라고 기도하면서 나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상황과 본질 사이에서
이제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본격적인 훈련에 돌입합니다. 하지만 그 훈련을 피해서 그만 도망가 버리고 맙니다.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창 12:10)
기근이 찾아왔습니다. 울고 싶었는데 뺨 맞은 격입니다. 도망갈 명분만 찾고 있었는데 마침 기근까지 왔습니다. 적당한 땅도 정착할 곳도 찾지 못했는데 그만 기근이 찾아왔습니다. 이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애굽으로 내려가 버리고 맙니다.
기근이 심하였습니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당연한 일입니다. 아브람 혼자 사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사래도 있고 조카 롯도 있습니다. 딸린 식구들이 있습니다. 아브람의 결정 하나에 그들이 죽고 사는 문제가 걸려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논리적으로는 이렇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면, 영적인 눈으로 보면, 과연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이 옳은가? 두 가지 측면에서 아브람의 결정은 중대한 잘못입니다.
첫 번째 문제는 아브람이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한 번도 의논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 이전에 아브람이 기도한 것은 그 땅에서 좋은 땅을 달라고만 기도한 것이지, "하나님, 저에게 왜 이렇게 하십니까?" 물어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부르실 때 "떠나가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큰 민족을 이루고 너를 복이 되게 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그러면 아브람은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따져 물어야만 옳았습니다.
"하나님, 나를 한 민족이 되게 한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복이 될지라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기근을 주십니까? 왜 우리의 살 곳을 보여주지 않으십니까?" 하나님께 묻고 여쭤보고 따져야만 옳았습니다. 대화를 통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계획과 훈련하려는 하나님의 의지를 읽어야만 옳았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그 과정을 건너뛰고 맙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여쭤 봐야 합니다. 인생의 고생 중에 죄로 인해 고생하는 경우도 있고, 내 죄와 상관없이 정말 믿음생활 성실하게 하고 하나님 안에 살았는데 고난이 닥칠 때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라면 하나님께 물어봐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제가 하나님을 섭섭하게 한 일이 뭐가 있습니까? 지금껏 이렇게 진실하고 성실하게 살았는데 내 인생에 왜 이런 문제가 생깁니까?" 하나님께 여쭤 봐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겠습니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우리를 누구보다도 사랑하셔서 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훈련하시고 벼랑 끝처럼 몰아가시는 이유를 설명하실 것입니다. 묻지 않고, 여쭤보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두 번째로 아브람이 잘못한 것은, 상황이냐 본질이냐 이 두 가지 선택 가운데 그가 상황을 선택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아브람 앞에 놓여 있는 상황은 기근입니다. 정착할 땅입니다. 먹고사는 문제입니다.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하지만 그가 여기까지 오게 된 본질은 말씀을 붙잡고 왔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그의 인생의 본질이었습니다.
말씀을 붙잡느냐, 상황을 붙잡느냐, 이 문제는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앞에도 항상 이 문제가 놓여 있지 않습니까? 상황이냐 본질이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선택 앞에서 상황을 선택하고 맙니다. 그런데 상황을 선택하고 급한 불을 끄기 시작하면 마지막 결론이 어떻게 됩니까? 상황 한 가지는 정리되었는데 또 다른 상황이 다시 일어납니다. 본질적인 문제가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우리나라는 절대적인 빈곤과 가난에 시달리는 나라였습니다. 너무나 가난했습니다. 그때는 당면 과제가 하루 세 끼 밥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온 나라 온 국민들이 열심히 일했습니다. 오로지 한 가지, 잘 사는 나라, 이것만 보고 달려왔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국민소득 3만 불을 넘어섰습니다. 이제 4만 불 시대를 앞두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여권으로 비자 없이 126개국을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여권의 파워가 전 세계 2위입니다. 그 정도로 우리나라의 국력이 신장했고 대단한 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해 있지 않습니까? 절대적 빈곤은 해소되었으나 상대적 빈곤의 문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자살률이 전 세계 최고입니다.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세대 간의 갈등, 남북의 갈등, 여러 가지 갈등이 이 사회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으로 가진 자는 어마어마하게 많이 가지고, 그렇지 못한 자는 정말 처절하게 고생하는 나라가 오늘 우리의 과제가 되고 말았지 않습니까?
한 가지 상황을 해결했는데 또 다른 국면에 봉착하고 말았습니다. 발등의 불은 껐는데 큰 불이 일어나서 이제는 그 불길을 잡을 수조차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상황에 집중하면 본질이 해결되지 않아서 이런 문제를 우리는 숱하게 많이 경험합니다.
우리 예수님도 십자가를 앞두고 역시 상황과 본질 사이에서 고민하셨습니다. 예수님 앞에 놓인 상황은 죽음입니다. 십자가 고통입니다. 예수님 앞에 놓인 본질은 모든 인류의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실 때 모든 인류를 구원하라고 보내주셨던 이 본질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시기에 죽음 앞에 서 있는 한 연약한 인간으로서의 두려움, 이것이 상황입니다.
우리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때까지 상황과 본질 앞에서 갈등하고 기도하셨습니다. 결국 주님이 붙잡은 것은 구원이라는 본질이었습니다. 그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 때문에 우리가 오늘 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에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제자들을 찾아갑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 20:19)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제자들은 예수님처럼 잡혀가서 십자가에서 고통받고 죽을까 봐 두려워서 모인 곳에 문들을 닫고 빛이 새어 나가는 것도 다 단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말씀하셨습니다. 상황은 하나도 해결하지 않고 평강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그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성령 받고 나서 그들은 담대해졌습니다. 상황은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려고 당국이 눈에 불을 켜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성령 받고 본질에 집중하기 시작합니다. 상황은 두려움이었지만 본질은 복음 전파였습니다. 제자들은 복음 전파라는 본질을 붙잡고 온 세상에 복음 전하는 믿음의 백성,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앞에 어떤 상황이 놓여 있습니까? 이 상황에 집중하느라 하나님의 말씀인 본질을 져버릴 때가 있지 않습니까? 상황 때문에 애굽으로 내려가면 그것은 더 큰 문제를 가지고 옵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바로에게 가 버렸지 않습니까? 아내를 빼앗긴 더 심각한 문제를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오늘 우리가 상황에 집중하고 말씀을 놓치면 또 다른 큰 문제를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부르셔서 훈련시킨 이후에 복을 주십니다. 이 말씀을 꼭 기억하시고, 이 과정 안에서 상황이 아닌 말씀, 본질을 꼭 붙잡고, 본질 안에서 해결하고 승리하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부르시고 그를 훈련시킨 후에 그에게 복이 되게 하겠다 하신 말씀을 이루어 가십니다. 하지만 훈련받는 아브람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본질을 붙잡지 않고 상황에 집중하며, 상황을 견디고 이겨내기 위해서 먹고사는 문제를 따라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아버지, 오늘 우리에게는 이런 문제가 없습니까? 우리 앞에 본질과 상황이 놓여 있을 때, 우리가 발등의 불을 끄기 위하여 본질을 붙잡지 않고 상황을 해결하려는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인 본질을 붙잡고 놓지 않도록 도우시고, 우리가 본질을 붙잡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급한 불과 상황은 해결하시는 놀라운 은혜를 맛보고 누리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세상 살아갈 때 우리를 훈련시켜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여 훈련을 속히 끝낼 수 있는 지혜도 허락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