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에서
본문: 창세기 12:11-16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안전에 대한 욕구를 지니고 있으며, 안전하게 살고 싶은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국가 제도가 발달하지 않았을 때, 사람들은 저마다 성곽을 만들고 울타리를 치고 무기를 제작하여 자신의 생명과 재산, 그리고 가족의 안전을 도모했습니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하고 국가 제도가 고도화되면서 국가는 법과 제도, 질서, 그리고 여러 가지 공동체 사회의 유대를 통해 개인의 안전과 생명, 재산을 보호해 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국가는 완전하거나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힘이 강할 때도 있으나 힘이 약할 때도 있고, 힘이 약해지면 외부의 침략을 받기도 합니다. 심지어 국가가 망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국민들은 피폐해지고 삶이 힘들어집니다.
우리나라도 일제 강점기 36년의 세월은 굉장히 힘들고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일제 강점 기간 동안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들 중에는 유명한 정치인도 있었고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사람도 있었지만, 일반 국민들도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한 사람이 김약연이라는 분입니다. 이분은 일제 강점기 시절 자신의 재산을 모두 팔고 북간도로 이주했습니다. 그곳에서 땅 5만여 평을 매입하고 그곳에 한인들의 정착촌을 만들었으니 이름하여 '명동촌'이라고 했습니다. 동쪽을 밝히는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이분이 생각하기에 우리나라가 이렇게 된 까닭은 조상 대대로 민족 교육을 등한시했기 때문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국민들을 제대로 교육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사재를 들여 학교를 세웠습니다. 그 학교 이름이 서전서숙입니다. 그 학교에서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독립 영화이자 민족 영화인 「아리랑」을 제작한 나운규 감독이 이 학교 출신이고, 동시에 저항 시인 윤동주 역시 명동촌의 서전서숙 출신입니다.
또한 서울 남산골에 이회영이라는 분도 계셨습니다. 이분은 일제 강점기가 되자 자기 집안이 소유하고 있었던 현재의 서울 명동 땅의 넓은 부지를 처분했습니다. 오늘날 시세로 환산해 보면 약 2조 원 가량이 됩니다. 그 엄청난 돈을 들고 서간도로 이주했습니다. 그곳에서 무관학교를 세웠습니다.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학교를 세우고 그 학교는 훗날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이 됩니다. 만주에서 독립군들을 길러 일제에 무장 항쟁하도록 그는 그들을 뒤에서 지원했습니다. 무기를 사서 공급하는 역할도 했습니다.
이렇듯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일어난 까닭은 역설적으로 생각해보면 국가가 국가의 기능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무능한 임금과 부패한 관리들이 한 통속이 되어 나라를 외세에 팔아먹은 결과가 바로 이런 피눈물 나는 몸부림이었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안전을 지키고 가족의 안전을 지켜야 하며 국권을 되찾으려고 하는 많은 국민들의 몸부림이 독립 투쟁, 무장투쟁, 항일 운동으로 발현된 것입니다. 인간이 세운 나라는 이렇듯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강한 나라도 망할 수 있고 약해질 수도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울타리를 떠난 자의 불안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강하신 하나님, 이 세상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세상을 통치하시는 한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쇠약해지거나 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울타리 안에만 있으면 안전합니다. 그런데 가끔 어리석은 사람들 중에 자기 발로 하나님의 보호의 울타리를 벗어나고 떠나는 자들이 있습니다. 탕자가 그러했고, 오늘 본문의 아브람 역시 그러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아브람이 하나님의 울타리를 떠난 이후에 겪는 어려운 일들입니다. 세상은 어떤 곳인지, 세상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고 사고하는지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잘 알려줍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나는 정말 하나님의 보호 울타리 아래 거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울타리를 떠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분명히 깨닫고, 우리도 하나님 안에 거할 길을 다시 한번 결단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브람과 사래와 롯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을 거쳐 가나안 땅에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온 아브람의 가족은 큰 기대를 가졌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버려두고 하나님을 따라왔으니 하나님이 보상해 주시지 않겠는가, 적어도 먹고 살 곳과 정착할 땅은 주시겠지 하는 기대였습니다. 그런데 살만한 땅에는 이미 가나안 원주민이 다 살고 있었습니다. 정착할 땅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당황했고 낙심했고 실망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간절히 기도해 보았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근이 몰려왔습니다. 아브람과 사래와 롯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애굽으로 내려가 버립니다.
그런데 그들이 애굽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쯤 뒷덜미가 서늘해집니다. 마음속에 불안과 염려,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그 때문에 아브람과 사래는 거짓말을 공모합니다.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창 12:11-13)
두 사람이 우리는 부부라고 하지 말고 남매라고 하자고 거짓으로 공모했습니다. 사실 따지고 들어가면 이 두 사람은 원래 이복 남매였습니다. 아버지는 데라로 한 아버지였지만 배가 다른 이복 남매 출신입니다. 하지만 그건 과거의 일이고 현재는 엄연한 부부입니다. 동시에 이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약속의 동반자요 약속의 계승자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서로 남매라고 하고 부부인 것을 숨기겠다고 거짓말을 하기로 공모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두려움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말하기를 당신은 미모가 출중한 여인이니 애굽에 있는 사람들이 당신을 빼앗아 가고 나를 죽일 것 같으니 우리 서로 남매라고 합시다 하고 공모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 사람들이 하란을 떠나서 가나안 땅에 올 때도 미지의 땅이었습니다. 그 땅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남매라고 소개하자고 공모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갈 때는 이 땅도 역시 미지의 땅인데 여기서는 두려움을 더 심하게 느낍니다. 거짓말을 해야 될 만큼 두려웠습니다.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사실 가나안 땅에 올 때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신다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니까 일부러 속일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데 무엇이 겁나고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경우가 다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떠나서 애굽으로 도망가는 중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람과 사래도 애굽 행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양심의 가책이 됩니다. 신앙 양심에 찔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의 울타리를 우리가 떠났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우리 스스로 우리의 안전을 지켜야 된다고 그들 스스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의 보호 울타리를 떠나는 사람들의 심중과 불안함이 얼마나 큰지, 강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 울타리를 떠나면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불안해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가인이 그렇지 않았습니까?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벌을 주셨는데 유리 방황하는 벌이었습니다. 그 벌을 받고 가인이 몹시 불안해합니다.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 4:13-14)
하나님의 형벌을 받고 유리 방황하는 자가 된 가인은 사람들이 나를 만나면 나를 죽일 것 같다며 불안하다고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이 불안 때문에 가인은 하나님 앞을 떠나 에덴 동쪽 놋 땅에 성읍을 쌓았습니다.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려 한 것입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무기를 만들었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라멕 같은 사람은 자신의 상함 때문에 사람을 죽였습니다. 살인하는 것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불안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의 연약한 모습이 불안과 공포, 두려움으로 표현됩니다.
사람이 불안하며 두려우면 행동양식에 몇 가지가 나타납니다. 첫 번째는 위선입니다. 선하지 않은데, 착하지 않은데 선한 척, 착한 척합니다. 그리하여 친구들을 얻으려 하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서 그 사람들을 통해 나의 안전을 도모하려고 합니다. 얼굴에 가면을 씁니다. 또 어떤 사람은 위악(僞惡)을 행합니다. 사실은 그렇게 악하지 않은데 내가 약하게 보이면 저 사람이 나를 무시할까봐, 그것 때문에 사람들은 얼굴에 가면을 쓰고 강한 척, 악한 척합니다. 위선과 위악은 반대 개념 같으나 사실은 뿌리가 똑같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오늘 본문의 아브람과 사래처럼 거짓말을 합니다. 조금밖에 없는데 많이 가지고 있다고 허풍합니다. 그래야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무시당하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아버지에게 유산을 받아서 떠난 탕자가 그렇지 않았습니까? 먼 나라로 갔습니다. 유산을 가지고 떠났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무시할까봐 친구들을 만들기 위해 술판을 벌입니다. 술을 사줍니다. 술값 계산을 자기가 다 합니다. 그러다가 거지가 되었습니다. 위선과 위악과 거짓말이 함께 버무려져 있는 모습이 탕자의 모습 아닙니까?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도 마음껏 먹을 수 없을 만큼 그는 완전히 망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아브람은 거짓말을 통해서 자신의 불안과 염려, 두려움을 덮으려고 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은 두렵지 않습니다. 겁나지 않습니다. 공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상황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디에 있는가가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했으면 어디에 있든지 누구와 함께했든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평안합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시편 3편의 표제어와 1절을 보겠습니다.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시 3편 표제, 1절)
다윗은 일평생 광야에서 두 번 생활했습니다. 첫 번째는 젊은 시절 십수 년 동안 사울을 피해서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젊은 시절이었기 때문에 할 만했습니다. 견딜 만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나이가 들었습니다. 이미 왕이 되었습니다. 아들이 반란을 일으킵니다. 아들의 칼날을 피해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광야로 나왔습니다. 서럽지 않겠습니까? 가슴 아프지 않겠습니까? 내 아들이 나를 향해 칼을 겨눈다는 것은 참으로 비통한 일입니다. 엊그제까지 나를 호위하던 병사들이 이제는 나를 죽이려고 칼과 창을 가지고 나를 찾아다닙니다. 이런 상황입니다. 일어나 나를 치려 하는 원수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우리 같으면 한순간도 숨 쉴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염려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스스로 하나님 앞을 떠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여전히 하나님과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 있게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시 3:5-6)
편안하게 누워 자고 일어나 깨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천만인이 나를 둘러 진 친다 할지라도 나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을 떠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 광야에서 시각을 다투며 사람들에게 쫓겨 다니나 그러나 나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고 두 다리 뻗고 편안하게 자고 일어나 깰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이 평강은 하나님과 함께하고 있는 자의 자신감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어도, 재산도 있을 만큼 있고 집도 있고 자녀들도 다 장성하고 다 잘 먹고 잘 사는데, 그런데 내 마음속 깊은 곳 중심 속에 왠지 모를 불안감이 계속해서 올라오고 있다면 우리의 영적 상태를 점검해 보셔야 됩니다. 내가 너무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나온 것은 아닌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아브람은 애굽으로 가는 중입니다. 애굽에는 먹고 살 것이 풍성합니다. 나일강이 있습니다. 비옥한 땅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땅에 들어가는데 불안합니다. 설레지 않습니다. 기대감이 없습니다. 죽을까봐 불안하고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에는 기근이 있습니다. 먹고 살 만한 것도 변변치 않습니다. 그런데 그 땅에 있을 때는 거짓말하지 않아도 될 만큼 마음만은 평안했습니다. 이것을 깨달았다면 즉시 돌이켜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오늘 우리 마음속에 평안이 없다면, 자꾸만 불안하고 불편하고, 위선을 행하든지 위악을 행하든지, 가면 쓰고 살아야 된다면, 거짓말을 해야 될 정도로 우리 마음속에 불안감이 감추어져 있다면,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다시 돌이켜 돌아가야 됩니다. 우리의 믿음 자체가, 근본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2. 거짓이 불러온 파국
아브람과 사래 그리고 롯이 거짓말한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이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 (창 12:14-15)
사래의 미모가 소문이 났습니다. 고관들이 보러 왔습니다. 정말 보니 아름답습니다. 바로 앞에서 칭찬합니다. 바로가 말합니다. 이 여인을 데려오라고. 여인이 바로 앞에 섰습니다. 한순간에 바로의 후궁이 되게 생겼습니다.
아브람과 사래가 생각 없이 한 거짓말, 불안과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서 한 거짓말이 심각한 두 가지 문제를 야기합니다. 첫 번째는 가정이 깨지게 되었습니다. 아브람과 사래는 어디 가서 하소연할 수도 없습니다. 자기들끼리 남매라고 했기 때문에, 자기들이 누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합법적으로 아내를 빼앗겨 버린 것입니다. 가정이 파괴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문제도 심각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구원 계획이 엉망이 되기 직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과 사래를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세상에 가인의 후손이 아니라 아담과 셋과 에노스의 후손을 통해서, 특별히 아브람과 사래를 통해서, 지금은 비록 자녀가 없지만 "내가 네 몸에서 날 자라야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들을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고 하나님 나라의 구원 계획을 성취시켜 가려고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였습니다.
그런데 아브람과 사래의 거짓말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쐐기를 박았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죄가 됩니까? 거짓말했기 때문에 자신의 가정도 박살이 나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도 심각하게 훼손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거짓말은 이렇게 큰 위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진실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거짓은 사탄의 것이요 마귀가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요 8:44)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우리 주님이 책망하시는 장면입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성전에서 설교할 때의 말이 다르고 군중들에게 할 때의 말이 다릅니다. 권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과 권력이 없고 연약한 자들에게 하는 말이 달랐습니다.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들의 거짓말의 목적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들로부터 많은 돈을 거두어 들일까? 그것 때문에 그들은 항상 거짓말을 일삼았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거짓말하는 것을 보니 너희 아비는 사탄 마귀로구나, 악한 사탄 마귀는 거짓의 아비인데 너희가 거짓말하는 것을 보니 너희는 마귀에게서 나온 것이 분명하구나 하고 우리 주님은 그렇게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왜 진리입니까? 영원토록 변함이 없습니다. 수천 년 전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토록, 예수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아버지시고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그런데 마귀 사탄은 진리가 아닙니다. 거짓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속이려 합니다. 거짓은 자기를 파괴하고 남도 파괴합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이 자신의 간음 죄를 가리기 위해서 거짓말을 했습니다. 결국 살인까지 하고 말았습니다. 한 가정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파괴했습니다. 자신의 인격도 파괴하고 자신의 왕국, 하나님의 나라도 파괴합니다. 나중에는 이 거짓말을 스스로 수습하지 못하게 되었지 않습니까?
오늘 아브람과 사래의 거짓말이 하나님의 위대하고 원대한 구원 계획을 망치기 직전까지 갔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혼돈에서 질서로의 창조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심으로 혼돈스러웠던 온 우주가 질서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거짓말은 이 질서를 다시 혼돈으로 바꿔놓습니다.
세상을 보십시오. 이 세상에 정치인들이 말하는 거짓말, 이 거짓말이 나라를 얼마나 혼란스럽게 만듭니까? 공론을 분열시킵니다. 멀쩡한 국민들끼리 싸움을 붙입니다. 우리가 직접 경험하고 눈으로 보고 있지 않습니까? 정치인들의 거짓말이 국가를 사분오열로 찢어놓습니다. 만약 교회 공동체를 이끌고 가는 목회자와 중직들이 거짓말을 일삼는다면 그 교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매일같이 크고 작은 공동체에서 진실을 규명하는 말이 오가지 않겠습니까? 진실공방을 요구할 것입니다. 이 말을 믿어야 된다, 못 믿겠다. 이것을 어떻게 교회 공동체라고 말하겠습니까?
하나님의 교회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진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곳입니다. 초대 교회의 공동체인 예루살렘 교회가 정말 진실하고 귀했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는 이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서 거짓의 영을 물리치셨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거짓말하다가 그들의 목숨을 잃었습니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초대교회의 첫 번째 교회이기 때문에 이 교회는 절대로 거짓의 영이 들어오면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거짓말을 무척 싫어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정말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이 사람 앞에, 하나님 앞에 진실한가 우리의 입술과 생각과 행동을 돌이켜 보셔야 됩니다.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우리 말과 행실에 거짓이 일절 없어야 됩니다. 잘한 건 잘했다 하고, 아닌 건 아니라고, 실패했다면 용서를 구하고 사과하고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래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질서 가운데 들어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부디 오늘 우리가 아브람과 사래처럼 거짓말하지 않는 믿음의 백성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보는 것'과 '듣는 것'
다시 14절과 15절을 보겠습니다.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이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 (창 12:14-15)
우리는 여기서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봅니다. 그래서 중요한 단어가 나오는데 '보다'라는 단어입니다.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의 아리따움을 보았고',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라며 '보다'라는 말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믿지 않는 세상의 사람들은 보는 것이 곧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보는 것이 가장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봤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내가 봤다는 말은 확실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보는 것이 얼마나 허망합니까? 이 사람들은 보고 사래를 바로의 후궁으로 데려갑니다. 그런데 보는 것 이면의 진실을 놓쳤습니다. 사래는 남편이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그들이 보는 것은 진실을 보지 못했습니다. 외모만 보았습니다. 이것이 보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깨닫게 해주는 장면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보는 것은 말초적인 아름다움이라고 말하고 듣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온 세상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첫 번째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보라, 내가 지은 이 우주와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우냐? 하늘을 보라, 땅을 보라, 바다를 보라, 하늘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땅의 짐승들을 보라, 각종 초목과 풀과 꽃을 보라"고 하나님은 그렇게 '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처음 하나님이 첫 번째 인간을 창조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보라'고 하지 않고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1:27-28)
여기서 중요한 말씀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보라' 말씀하지 않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듣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첫 번째 인류에게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유대인들이 지금까지 가장 사랑하는 말씀은 신명기 6장 4절과 5절 말씀입니다. '쉐마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4-5)
'보라 이스라엘아'가 아니고 '들으라 이스라엘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주 하셨던 말씀이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입니다. 사도 바울 선생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성경은 창세기부터 끝까지 '들음'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보는 존재가 아니라 듣는 존재입니다. 보는 것은 말초적인 아름다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우리가 그 말씀 안에서 믿음을 얻고, 그 믿음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우리가 변화된 삶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 있는 인격이 될 것입니다.
부디 오늘 이 말씀 꼭 기억하시고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 거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울타리를 벗어나면 거짓말하게 되고, 이 거짓은 나를 파괴하고 하나님의 나라도 파괴합니다. 부디 하나님 안에 거하면서 평안과 안정을 누리시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를 불러주시고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 품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미련한 우리는 하나님의 울타리를 떠나고 벗어나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아브람의 교훈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날개를 떠나서 불안하고 두려웠던 아브람이 거짓말하여 자신의 인생도 위기에 처하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도 수포로 만들 수밖에 없는 위험한 상황을 우리는 목도하였습니다. 아버지, 우리는 하나님 안에 거하게 하옵소서.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 전념하기를 원합니다. 주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가 그 인격 안에 거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