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강 / 바로의 책망 (12:15-20)

바로의 책망

본문: 창세기 12:15-20

사람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책망을 받기도 하고 책망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책망에는 일정한 법칙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책망한다는 대원칙입니다. 나이가 많거나 직책이 높은 사람이 나이가 어리거나 직책이 낮은 사람을 따끔하게 꾸짖어서 그들의 행동과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책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 보면 나이가 많거나 직책이 높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삶이 엉망이고 책망할 만한 위치에 있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책망을 받아야 하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는 직책이 낮거나 나이가 어린 사람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상대방을 책망해야 하는 책망의 역전 현상이 일어납니다.

윤동주는 스물일곱의 나이로 시대를 책망했고, 나라를 팔아먹은 수많은 어른들과 정치인들을 책망했습니다. 윤동주는 1917년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총명했습니다. 명동촌 서전서숙 출신이었던 그는 어려서부터 더 넓은 곳에 나가서 공부하고 싶은 열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넓은 곳이란 곧 일본을 의미했고, 그에게는 큰 고민이 생겼습니다. 당시 일본에 가서 공부를 하려면 창씨개명을 해야 했는데, 민족의식이 투철한 윤동주로서는 이름을 바꾸면서까지 공부하는 것이 못내 내키지 않았습니다.

오랜 세월 고민하다가 결국 그는 뜨거운 공부에 대한 열정을 이기지 못해서 이름을 바꾸고 일본으로 떠납니다. '히라누마 도주(平沼東柱)'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하고 1942년에 일본 동지사 대학에 입학합니다. 하지만 그때부터 그의 마음에는 깊은 양심의 가책이 자리잡았습니다. 내가 민족의 혼을 팔아먹고 일본식 이름을 가지고 이곳에 와서 공부하고 있구나. 그 때문에 그는 일본에서 항일운동에 투신합니다. 결국 체포되어 1943년에 감옥에 들어가고, 2년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세상을 떠납니다. 그가 감옥에서 약 백여 편의 시를 남겼는데, 그 시들은 대부분 그가 이름을 바꾼 것에 대한 수치와 부끄러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표작인 「별 헤는 밤」의 일부분입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자기 이름을 써 보았다가 흙으로 덮어 버린 이유, 그리고 이름을 부끄럽다고 말하는 이유가 결국 자신의 이름을 창씨개명했기 때문입니다. 윤동주의 시 「서시」의 일부분입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왜 부끄러워했겠습니까?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왜 괴로워했겠습니까? 이름을 바꾸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윤동주는 이렇게 감옥에서 약 백여 편의 시를 쓰면서 자신의 창씨개명을 돌아보고 해결하고 돌이키고 참회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신을 향한 참회인 동시에 그 당시 나라를 팔아먹었던 수많은 정치인들과 어용 지식인들, 매국노들을 향한 강력한 책망이었습니다. 나이 어린 윤동주였지만 오히려 나이 많은 사람, 책임지는 자리에 있는 사람을 책망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 말씀 본문을 보면 바로에게 책망받는 아브라함이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이 세상의 왕에게 책망당하고 있습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책망해야 하는데, 요즘 세상은 오히려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고 세상이 교회를 향하여 책망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과연 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상을 책망하는 자리에 서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세상 사람들에게 책망받고 부끄럽게 손가락질당하고 있는가,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우리를 믿음의 반석 위에 굳게 세우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주는 것의 본질

아브라함과 사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왔습니다. 준비된 땅에 왔을까 하는 부푼 기대를 가졌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그 땅에서 훈련시키기를 원하셨습니다. 게다가 기근까지 닥쳤습니다. 그들은 고민 끝에 이집트로 내려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훈련의 장소, 울타리를 뛰어넘어 간 그들에게는 불안과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아브라함과 사래는 거짓말을 합니다. 두 사람이 부부 사이인 것을 숨기고 남매 사이라고 말합니다. 순식간에 아내를 빼앗기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까지 큰 차질을 빚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는 아브라함에게서 사래를 데려가면서 거저 데려가지 않습니다. 그를 후대했습니다.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창 12:16)

그 당시 고대에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여성을 노동력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친정집에서 여성을 데려가면 그만큼의 노동력이 상실됩니다. 그 때문에 남자는 여성의 가정에 여성의 노동력만큼의 돈과 물품을 지불하는 것입니다. 일종의 결혼 비용입니다. 바로는 아브라함에게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까지 많은 물품들을 주고 사래를 데려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 할 단어는 '후대하다'라는 말입니다. '후대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 '야타브(יָטַב)'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데, 이 단어는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 때 주로 사용된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다 할 때 이 '야타브'를 쓰는데, 왜 바로는 하나님도 아니면서 이 단어를 성경에서 이렇게 기록해 두었을까요? 이유는 이렇습니다. 바로가 마치 신적 권위를 가진 존재인 것처럼,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처럼 은혜를 베푸는 것처럼 많은 것을 주고 그의 아내 사래를 데려갔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바로가 아브라함에게 준 것은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기근을 해결하고 먹고 살 것이 평생 동안 차고 넘치는 엄청난 재물입니다. 그런데 바로 입장에서 보면 티끌 같은 것, 먼지 같은 것, 쓰레기 같은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는 이집트의 왕입니다. 그 당시 세계 최고의 권력자입니다. 그런데 그가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 따위를 줬다고 해서 그에게 얼마나 손해가 되겠습니까? 바로는 먼지와 티끌 같은 것만 주고 아브라함에게서 전부를 데려갔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내 사래는 그의 인생의 전부입니다.

세상은 이렇습니다. 사탄은 이렇습니다. 마치 우리에게 전부를 주는 것처럼 말하지만, 그때 가져가는 것은 참혹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다 가져가고 그들은 마치 하나님인 것처럼 "나는 너희에게 모든 것을 주겠다"고 말하는 것이 세상의 거짓 소리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속으면 안 됩니다. 만약에 아브라함이 전부를 잃었는데, 기근이 해결되었다고, 나는 아내를 주고 이 많은 물질을 받았으니 기쁘다고 말했다면 그는 심각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유혹한 사탄 마귀도 이런 식으로 주님을 유혹했습니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마 4:8-9)

악한 마귀가 예수님을 유혹하고 시험에 들게 합니다.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여주며 만약 나에게 엎드려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주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에게 이 땅에 구원자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엎드려 절하는 순간 주님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립니다. 마귀에게 있어서 천하만국의 영광과 세상의 모든 물질과 공중의 권세는 티끌과 부스러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마귀의 이런 유혹의 본체를 잘 눈여겨보고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믿음은 전부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우리를 유혹합니다. "너의 믿음을 잠깐만 접어 넣어 두라. 너는 지금 이 자리에서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말라. 너의 믿음을 잠깐 멈추고 접어 넣어 두면 너는 많은 돈을 벌 것이다. 물질을 얻을 것이다. 너는 출세하고 명예를 얻고 건강을 얻고 네 가정은 앞으로 대대손손 행복할 것이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잠깐만 접어 둘라." 세상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거래를 제안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야타브' 하시는 것처럼, 마치 은혜를 베푸는 것처럼 세상은 이렇게 우리를 지금도 유혹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넘어가서, "그래 잠깐만 내가 자존심을 접어 두자. 다음에 주일날 하나님 앞에 가서 회개하면 되니 지금 이 자리에서 잠깐만 접어 두고 물질을 받자, 명예를 받자, 권력을 받자" 이렇게 해버리면 우리는 거기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처럼 말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간악하고 사탄 마귀는 이런 식으로 지금도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후대하셨습니다. 야타브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8)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시기가 언제입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입니다. 우리가 죄악길을 헤매고 다닐 때, 우리가 무지 속에서 열심히 죄 짓고 있을 때, 하나님은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으시고 오직 모든 인류를 사랑하시며 나 같은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대일의 교환, 등가의 관계를 요구하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가시고 하나님은 조금만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으시고 하나님 당신의 전부이신, 사랑하는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내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시간이 지나서,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그 사실을 깨닫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내가 구원받았는데! 그 감격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충성하고 봉사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런 믿음과 이런 신앙이 변질되고 있습니다. 복 받기 위해서 하나님께 헌금하고, 복 받기 위해서 하나님께 봉사하고, 복 받기 위해서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세상의 사탄 마귀 권세와 마치 똑같이 일대일의 등가의 관계로 생각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값없이 돈 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말씀하셨고,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후대하셔서 야타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탄은 철저하게 계산적입니다. 바로가 아브라함의 모든 것을 데려가고 바로에게는 먼지와 티끌과 부스러기 같은 것만 던져 준 것처럼, 우리가 깨어 있지 않으면 분별하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빼앗길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재산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명예도 건강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모든 것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굳게 지키고 신앙의 순결을 굳게 지켜가시는 하나님의 백성, 믿음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위기에 개입하시는 하나님

이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구원 계획이 위기에 빠지자 직접 행동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창 12:17)

어떤 재앙을 내리셨는지, 바로가 이 일 때문에 어떤 큰 어려움을 겪었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성경이 더 이상의 정보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두 가지는 확실합니다.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셨다는 사실과 동시에 바로가 이제 모든 것을 알았다는 사실입니다. 사래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을 바로가 분명히 알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 봐야 할 것은 과연 하나님의 개입이 공정한가 하는 문제입니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보면 대단한 은혜입니다. 아브라함이 지금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그는 자기 입으로 사래를 남매라고 말했습니다. 바로에게 합당한 모든 결혼 비용을 받고 아내를 내주고 말았습니다. 합당하게, 합법적으로 아내를 빼앗겼습니다. 아브라함은 할 수 있는 말이 단 한 마디도 없는데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셨으니 아브라함은 대단한 은혜입니다.

하지만 바로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이건 반칙 아닙니까? 바로는 아브라함의 말만 그대로 믿었습니다. 바로는 아브라함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사래를 데려왔고 그 결혼 비용을 다 지불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렸습니다. 바로가 화가 날 법도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우리는 이 사실을 보면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위기에 빠지면 일단 건져 놓고 보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가 잘못했다면 하나님이 직접 꾸짖으시고 그를 혼내시고 그를 다루십니다. 그러나 하나님 당신의 백성이 위기에 빠지면 하나님은 직접 그를 건져 주시는 귀하고 놀라운 은혜를 우리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위기에 처한 다윗에게도 똑같이 하셨습니다.

"다윗의 믹담 시, 인도자를 따라 요낫 엘렘 르호김에 맞춘 노래, 다윗이 가드에서 블레셋인에게 잡힌 때에" (시 56편 표제어)

믹담(מִכְתָּם)은 '황금시' 또는 '돌비에 새긴 노래'라는 의미로, 귀중하게 여겨야 할 시편을 뜻합니다. 배경은 이렇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서 광야를 전전하고 다녔습니다. 너무 피곤하고 지쳐서 다윗이 이제는 더 이상 이 도망자 생활을 할 수 없겠다 생각해서 가드 왕 아기스에게 가버렸습니다. 그런데 가드는 다윗이 죽인 골리앗의 고향입니다. 아기스가 다윗을 반갑게 맞아줄 리가 없습니다. 다윗을 의심합니다. 그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다윗이 미친 척합니다. 침을 흘립니다. 수염을 잡아 뜯습니다. 그래서 그는 거기서 겨우 살아 나왔습니다. 살아 나온 후에 지은 시가 시편 56편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편이 되셨으니, 하나님이 나를 건지셨고, 하나님이 내 편이시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건져 주시고 그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훈련의 장소인 광야를 떠나서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하고 들어갔지만, 그러다가 큰 위기에 처하자 하나님은 다윗이 자기 발로 걸어 들어간 그곳에서 하나님은 그를 다시 건져 주셨습니다. 마치 아브라함을 바로의 손에서 건져 주신 것처럼 하나님은 다윗에게도 직접 개입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공정한 행동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해야 됩니까? 예를 들어 어떤 아버지가 퇴근길에 동네 골목 어귀에서 자기 아들이 동네 형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봅니다. 달려가서 자초지종을 물었더니 우리 아들이 잘못했습니다. 내 아들이 백 번 잘못했습니다. 만약 그럴 때 아버지는 어떻게 행동하겠습니까? "그래 이놈이 잘못했으니 실컷 두드려 패고 나중에 집에 보내라" 그리고 돌아서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그 형들을 꾸짖고 아들을 데려와서 집에 와서 아들을 매질하겠습니까? 정상적인 아버지라면 후자를 선택할 것입니다. 비록 공정하지 않다 하더라도 내 아들이고 내 새끼니까, 다른 아이들에게 혼나는 것이 싫어서, 이 아들을 내가 데려와서 내가 혼내더라도 그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아들을 건져 주는 것이 아버지의 본분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철이 든 후에, 아들이 시간이 한참 지나서 철이 들고 나니까 아버지의 진심이 이해가 됩니다. 아버지가 얼마나 부끄러우셨을까? 얼마나 수치스러우셨을까? 내가 잘못한 것 때문에 아버지는 공정하지 않은 모습으로 동네 형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셨구나. 아브라함도 시간이 한참 지나서 하나님의 얼굴이 낯이 뜨거워지셨음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아, 하나님이 믿지 않는 바로에게 못할 일을 하셨구나. 내가 제대로 살지 않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웠구나 이렇게 깨달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제대로 살지 못하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말씀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부끄러움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은 일단 급하기 때문에 당신의 백성을 건져 주시지만, 믿지 않는 사람, 불신자 바로의 입장에서 보면 그 하나님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제대로 살아야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나타내고 드러낼 것입니다. 부디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이 제대로 살고 믿음 생활 성실하게 감당해서 하나님을 수치스럽게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없기를, 우리가 믿음 생활 제대로 해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기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하나님을 칭송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역사가 있기를,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살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방인에게 받은 책망

이제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책망합니다.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와 함께 그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창 12:18-20)

우리는 여기서 어디에 집중해야 합니까? 바로는 사래도 돌려보내고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까지 온갖 예물까지 다 주어서 돌려보냈습니다. 기뻐해야 할 일입니까? 아내도 멀쩡하게 돌아왔고 예물까지, 각종 결혼 비용까지 다시 되찾아 가지 않고 그대로 돌려 보내 주었으니 기뻐하고 춤출 일입니까?

우리는 여기서 비참한 아브라함의 모습을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사람 바로에게 불려가서 이렇게 호되게 책망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브라함이 믿지 않는 바로를 책망해도 이것이 당연한 일인데, 믿지 않는 사람 바로에게 하나님의 사람이 불려가서 부끄러운 책망을 당하고 있으니 이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이런 일이 아브라함의 교만에 어떻게 남았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였던 당시에 발람이라는 자칭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물질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모압 왕 발락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저주해달라는 청을 듣고 길을 나섭니다. 그런데 발람이 타고 간 나귀에게는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 들고 서 있는 모습이 나귀의 눈에는 보였습니다. 나귀가 놀라서 앞으로 나가지 않고 뒤로 물러섰습니다. 발람의 눈에는 여호와의 사자가 보이지 않습니다. 나귀를 세 번이나 때렸습니다. 나귀가 입을 열었습니다. 사람처럼 말을 합니다.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발람 밑에 엎드리니 발람이 노하여 자기 지팡이로 나귀를 때리는지라 여호와께서 나귀의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냐" (민 22:27-28)

발람은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자칭 말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짐승인 나귀에게 책망받았습니다. 그는 영안이 어두워져서 여호와의 사자가 보이지 않습니다. 만약 나귀가 그대로 길을 갔더라면 여호와의 사자의 칼에 그는 금방 목숨을 잃고 말았을 것입니다. 나귀는 영안이 열려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주인을 지키기 위해서 길을 가지 않습니다. 길을 물러났습니다. 그 때문에 그가 목숨을 건졌습니다. 비참하게 하나님의 사람인 발람이 짐승인 나귀에게 책망받았습니다.

제대로 살지 못하면 짐승에게도 책망받고 이방인 바로에게도 책망받습니다. 책망받아 마땅합니다. 그렇게 책망받아서 그가 깨닫고 돌아오기를 하나님은 기대하고 바라시면서, 나귀의 입을 열어서 발람을 책망하기도 하시고, 바로의 입을 통해서 아브라함을 책망하기도 하십니다.

결론

오늘날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는 산 위에 있는 동네입니다. 등경 위에 놓인 등불입니다. 세상을 환하게 밝히는 동네가 교회입니다. 교회는 빛이 되고 교회는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악을 교회가 지적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세상을 책망하는 곳이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대의 교회는 그 자정 능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세상이 교회를 걱정합니다. 저 교회가 저렇게 싸워서 어떻게 되겠느냐고, 저 교회가 저렇게 탐욕적이어서 어떻게 저 교회를 교회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고, 세상이 목회자를 걱정하고, 세상이 목회자를 책망하고, 세상이 교회 중직자들을 걱정하고,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고 책망하고 있는 오늘, 이런 역설의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한국에 복음이 이 땅에 전파될 때 믿음의 1세대, 2세대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가난했습니다. 성도들도 가난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교회는 세상의 존중과 존경을 받았습니다. 교회가 교회다웠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성도다웠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가지지 못하고 그들은 누리지 못해도 세상의 가난한 자, 빈 자들, 연약한 자, 눌린 자들을 위해서 그 없는 것을 나누어 베풀었습니다. 나누어 주었습니다. 교회는 흘려보내는 교회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정직했습니다. 도덕적이었고 윤리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어떻습니까? 교회는 자꾸만 모으는 데만 집중합니다. 흘려 보내지 않습니다. 교회의 첨탑은 갈수록 높아져 가고, 교회 건물은 갈수록 아름다워져 가고, 그러나 그와 반대로 교회 주변의 동네 이웃들은 가난과 어려움과 수치와 고통을 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교회가 교회다워야 세상의 존중을 받을 수 있습니다.

부디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과연 나는 성도다운가, 과연 우리 교회는 교회다운가, 세상의 존중과 사랑과 기대를 한 몸에 품고 있는가, 아브라함처럼 바로의 책망을 받지 않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울타리를 벗어나서 거짓말하는 그 순간 세상의 진흙탕에 발을 담그고 말았습니다. 그때부터 세상 사람들과 하나가 되고 그 자리에서 뒹굴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훈련의 울타리 안에 거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가 성도답고 교회가 교회다워서 세상의 존중과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교회, 그래서 세상을 선도하고 세상의 악을 지적하고 세상에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아름다운 우리 교회가 되어 가고 성도들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아브라함이 바로에게 책망당하는 이 모습을 통해서 오늘 이 세상의, 오늘 이 교회의 모습을 봅니다. 과거 우리 믿음의 조상들은 가난하고 없이 살고 배우지 못했지만, 그러나 그들은 세상의 존경과 존중을 받았습니다. 교회가 교회다웠고 성도가 성도다웠고 목회자가 목회자다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습니다. 목회자가 타락하고 교회가 변절하고 성도가 성도답지 않아서 세상의 걱정거리, 손가락질을 받고 있습니다.

나귀에게 책망받은 발람처럼, 바로에게 책망받은 아브라함처럼 살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가 산 위에 있는 동네가 되고 등경 위에 놓인 등불이 되어서 세상을 책망하는 아름다운 교회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이 사명을 기억하고 감당하기를 원합니다. 세상 사람들보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고 나눔을 실천하고, 하나님 말씀과 복음 위에 굳게 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세상에 당당한 하나님의 교회, 성도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