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본문: 창세기 13:1-13
영국의 철학자이자 과학자인 프란시스 베이컨은 과학자들 중에 세 부류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개미 같은 과학자, 거미 같은 과학자, 그리고 꿀벌 같은 과학자입니다. 개미 같은 과학자는 부지런합니다. 실험도 열심히 하고 자료를 열심히 모읍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실험과 자료에는 열심인데 창의적이지 않습니다. 거기까지입니다. 거미 같은 과학자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료와 실험 데이터를 가지고 시스템을 만듭니다. 마치 거미가 거미줄을 짜듯이 열심히 시스템을 만듭니다. 그러나 그다음에는 게으르게 행동합니다. 일하지 않습니다. 먹이가 걸리기를 기다리는 거미처럼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고 생산성이 없습니다.
꿀벌 같은 과학자도 있습니다. 벌이 열심히 날아다니면서 이 꽃, 저 꽃을 다니며 꿀을 따고 자신의 몸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유익한 꿀을 생산해 내는 것처럼, 꿀벌 같은 과학자는 자신을 통해서 성실하게 일하고 열심히 일해서 사람들에게 유익한 창의적인 인재라는 말입니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이 세 부류가 우리 인간 군상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사람들 중에는 개미 같은, 거미 같은, 그리고 꿀벌 같은 사람이 존재합니다. 개미 같은 사람은 부지런하긴 하지만 눈앞에 있는 이익만 추구합니다.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거미 같은 사람은 시스템을 만들고 그 안에 뭔가가 걸리기만을 기다리는 게으른 사람이고 창의성이 없습니다. 그러나 꿀벌 같은 사람은 성실하기도 하고 창의적인 존재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 말씀에는 롯이 나오는데, 롯은 개미 같은 존재입니다. 부지런하고 성실하기는 하지만 눈앞에 있는 이익만 따라다니는 사람입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께서 주신 가나안 땅을 떠나서 소돔 땅으로 떠나가 버렸습니다. 소돔 땅에서 농사짓고 목축하기가 훨씬 좋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롯을 비난하지만 우리 속에도 롯과 같은 기질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내 안에 있는 롯과 같은 기질을 발견하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를 찾고 깨닫고 발견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회개와 감사의 예배
"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 (창 13:1-2)
아브람과 사래와 롯은 애굽에서 큰 위기를 겪습니다. 아내를 빼앗길 뻔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전격적으로 개입하셔서 아내를 되찾고 많은 소유를 가지고 올라옵니다. 이 모든 소유를 성경은 더 구체적으로 가축과 은과 금이라고 말했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외형적으로 보면 아브람이 크게 성공한 것처럼 보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애굽으로 내려갈 때는 빈털터리였습니다. 기근 때문에 내려갔습니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가난했습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크게 성공했습니다. 아내도 되찾고 가축과 은과 금을 가득 싣고 다시 가나안 땅으로 올라옵니다.
아브람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아브람은 이것이 못내 불편했습니다. 바로에게 책망받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사람인데 하나님의 울타리를 떠나서 거짓말하고 불신자 바로에게 강하게 책망받았습니다. 이것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바로가 주는 선물을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한순간 탐심 때문에 은과 금과 가축을 다 끌고 올라옵니다.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오자마자 하나님께 예배드렸습니다. 만약에 아브람이 '내가 수지 맞았구나, 아내도 되찾고 은과 금과 가축도 다 얻었구나, 기쁘구나' 이렇게 생각했더라면 그는 예배 드리러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그가 그렇게 생각했더라면 가나안에 올라와서 가장 먼저 가축이 풀을 뜯어 먹을 수 있는 목초지를 구하러 달려갔을 것입니다. 은과 금이 많았기 때문에 많은 돈으로 넓은 목초지 평원을 차지하러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뭔가 모르게 불편하고 찝찝하고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는 마음 때문에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러 나갑니다.
"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 13:3-4)
예배를 드렸습니다. 아브람이 여기서 드린 예배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회개요, 둘째는 감사입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간 것을 회개합니다. 사랑하는 내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고 거짓말한 죄를 회개합니다. 하나님, 이 물질을 내가 받지 않았어야 되는데 한순간 탐심 때문에 이 물질을 가지고 온 것 회개합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했습니다. 또한 예배를 통해서 아브람은 하나님께 깊은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전격적으로 개입하셔서 나를 위기 가운데서 건지시고 사랑하는 아내를 다시 되찾게 하시고 우리를 안전하게 이곳으로 인도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회개와 감사가 넘치는 충만한 기쁨의 예배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담 이후로 인간은 누구나 원죄를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납니다. 원죄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죄 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투쟁하고 죄짓지 않으려고 발버둥치지만 한순간 잘못 판단하면 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후가 더 중요합니다. 죄짓고 난 이후에 우리는 하나님께 깨달았다면 회개해야 됩니다. 회개하지 않는 인생은 가능성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다섯 가지 제사 중에 속죄제가 있습니다. 속죄제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너희들이 회개하기만 하면 다 받아주겠다는 뜻입니다. 죄 지을 가능성을 하나님도 인정하시고 인간의 약함과 연약함을 굽어 살펴보신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였으되 만일 기름 부음 받은 제사장이 범죄하여 백성이 죄에 빠지게 하였으면 그는 범한 죄로 말미암아 흠 없는 수송아지로 속죄제를 여호와께 드릴지니" (레 4:2-3)
'누구든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다 죄 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세운 제사장조차도 누구든지 다 죄 지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삼가하고 겸손해야 됩니다. 내가 죄 지을 가능성이 있구나, 내가 이렇게 연약한 존재구나. 누구도 교만할 수 없습니다. 나는 이 문제만큼은 자신 있다고, 나는 이성 문제만큼은, 나는 물질 문제만큼은 자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누구나 다 죄 지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투쟁했으나, 한순간 잘못해서 죄를 지었다면 그다음 후속 조치 회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유다 백성들에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사 1:18)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하셨습니다. 너의 죄를 나의 제단 앞에 가지고 나와서 다 말해라. 그러면 양털같이 다 희게 해주겠다. 용서해 주겠다는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죄 문제를 가지고 이 자리에 나와 있습니까? 살아가다 보면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문제를 일으킬 때가 있습니다. 신앙양심에 우리 마음에 거리낌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 나와서 다 토설하고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놀라운 긍휼과 사랑의 은총을 덧입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물질이 끼어든 관계의 비극
그런데 반면, 롯은 어땠을까요? 롯은 돌이키지 않습니다. 롯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물질에 더 사로잡혀 살고 있습니다.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창 13:5-7)
우리는 여기서 롯에 대한 몇 가지 정보를 얻습니다. 중요한 것은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은 장막입니다. 롯이 독립생활을 했다는 근거가 됩니다. 롯이 애굽으로 내려가기 전까지는 아브람과 사래와 함께 같은 장막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애굽에서 올라오고 난 이후에는 롯도 가정을 이루고 그의 가정, 그의 식구들과 함께 독립된 장막에 거주하게 됩니다.
그런데 단순히 이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가난했을 때는, 기근 때문에 먹고살 것이 없었을 때는 그들은 함께 같은 장막에 머무르며 같이 고생했습니다. 같이 걱정하고 같이 미래를 위해서 같이 살을 맞대고 고민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소유가 많아집니다. 애굽에서 가지고 온 가축도 있고 은과 금이 풍부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서로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게 됩니다. 장막도 나뉘어지고 서로 함께 같이 살지 않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더 심각해집니다.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툼이 잦아집니다. 목자들이 다툰다는 것은 아브람과 롯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가 됩니다. 주인들의 사이가 좋으면 종들이 왜 다투겠습니까? 아브람과 롯이 서로 친밀하면 목자들도 서로 친밀하게 지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있습니다. 그래서 목자들도 다툼이 잦아집니다.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 때문에 이런 문제가 불거졌는지를 돌아봐야 됩니다. 물질 때문입니다. 사실 아브람은 바로에게서 받은 은과 금과 가축을 바로에게 다시 돌려주고 올라와야 옳았습니다. 아내를 속였지 않습니까? 누이라고 속였지 않습니까? 그 결과로 받은 물질입니다. 노동하고 땀 흘려서 얻은 물질이 아닙니다. 거짓말의 대가로 받은 물질입니다. 아내를 찾았다면 그 물질은 원주인에게 돌려주고 오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한순간 탐심을 이기지 못해서 은과 금과 각종 가축을 다 받아서 올라왔습니다. 이것이 화가 되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롯의 믿음이 상실됩니다. 롯과 아브람의 사이가 멀어집니다. 사실 롯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온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브람을 따라왔습니다. 아브람과 롯 사이에 물질이 끼어들자 자연스럽게 아브람과 롯 사이는 멀어지게 된 것이 어쩌면 정해진 수순,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성경의 교훈을 깨닫습니다. 아브람은 분명히 하나님 앞에 이 문제를 가지고 회개했습니다. 울타리를 벗어난 것, 거짓말한 것, 원치 않은 물질을 한순간 탐심 때문에 가지고 온 것. 그런데 이 과정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회개했는데 왜 이런 문제가 불거지는가? 하나님은 회개를 받으시고 용서를 해주셨다면 이런 문제까지도 깔끔하게 해결해 주시지 왜 이 가정에 갈등이 여전히 존재하게 하시는가? 우리는 하나님께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정신은 그것이 아닙니다.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은 100퍼센트 용서하십니다. 그러나 죄의 흔적은 남습니다. 그 흔적은 우리가 평생 가지고 가야 할 자신의 십자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바다를 건너 시내산 아래에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셨습니다.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진멸해버리겠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탄원합니다. 하나님 차라리 제 이름을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지워주십시오. 그렇게 하시고 이 백성들을 건져주십시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하나님은 모세의 탄원을 받아주셨습니다. 용서하겠다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를 철저하게 다루셨습니다. 적극적으로 가담한 3천 명의 생명을 하나님은 거두어 가셨습니다. 그다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출 34:6-7)
이 말씀을 자세히 보셔야 됩니다. 하나님은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벌을 면제하지는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밝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진심이요, 본 마음입니다.
궁금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용서하셨다면 벌을 면제해 주셔야지, 왜 이렇게 하십니까? 그런데 만약 하나님이 벌까지 면제해 준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 인간은 타고난 악함이 있습니다. 원죄가 있습니다. 죄성이 있습니다. 이 죄성 때문에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고 벌까지 면제해 주시면 다시 똑같은 죄를 짓습니다. 인간은 그렇게 완악하고 교만하고 악한 존재입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은 죄의 흔적을 우리의 몸에 남겨두시는 것입니다. 고통받으라고, 다시는 그 죄를 짓지 말라고, 다시는 그 죄를 짓지 않고 너희가 이 지은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깨달으라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아브람은 하나님 말씀의 울타리를 벗어났고 거짓말했고 한순간 탐욕으로 그 물질을 탐내어서 가지고 온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자식 같은 롯에게 믿음이 상실되고 그가 물질에 탐닉된 이 모습, 아브람과 롯이 결국은 떨어져 나가게 된 이 가슴 아픈 일을 아브람은 겪을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방임이라는 이름의 무책임
이제 아브람은 더 이상 이런 일을 두고 볼 수가 없어서 롯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창 13:8-9)
이 아브람의 말을 어떻게 읽으십니까? 요즘 말로 쿨하지 않습니까? 아브람이 멋져 보이지 않습니까? 롯의 자율성을 그대로 인정하는 멋진 삼촌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읽으셨다면 우리는 더 깊이 말씀을 봐야 됩니다. 믿음의 눈으로 다시 한번 이 말씀을 보시면 아브람은 자신의 책임을 방임하고 있는 무책임한 존재입니다.
사실 아브람은 롯의 영적 상태, 신앙 상태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 아닙니까? 롯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온 것이 아니라 삼촌인 자기를 따라왔다는 사실을, 롯과 함께 애굽에 내려갔다가 올라온 이후로 롯이 변했다는 사실을, 그가 지금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물질에 심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브람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롯을 제지하지 않습니다.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영적으로 영글지 않은 롯에게 선택을 위임했습니다. '너 멋대로 해보라'고. 워낙 싸우니까 너무 갈등하니까 더 이상 싸우기 싫고 갈등하기 싫어서 롯에게 선택권을 던져버린 것입니다.
가끔 부모님들 중에도 이런 분들이 있습니다. 사춘기 자녀들과 다투기 싫어서 공부해라 하기 싫고,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 가라 말하기 싫고, 교우 관계, 친구 관계 똑바로 하라고 말하기 불편하고, 더 이상 핸드폰 게임 하지 말라고 하기도 싫고, 교회 가서 믿음 생활 제대로 하라고 하는 것도 한두 번인데, 말 듣지 않는 자녀 때문에 '이제 너 멋대로 하라. 나는 더 이상 너의 인생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부모님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화가 나서 순간적으로 그런 말은 할 수는 있을지언정 정말 그 말이 현실이 되면 무책임한 부모님입니다. 자녀의 믿음이 영글지 않고 자녀의 인격이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모는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자녀를 지켜줘야 됩니다. 책임져야 됩니다. 교회학교 교사 선생님, 교회학교 교역자, 담임목사, 부모님, 학교 선생님이 총동원되어서 그 한 영혼이 인격적으로 성장하고 거듭날 때까지 우리는 절대로 우리 자녀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 보면 여러 가정의 유형이 나오지 않습니까? 홉니와 비느하스의 아버지 엘리 제사장은 두 아들을 포기해버렸습니다. 어떤 말도 하지 않습니다. 성전에서 예배를 방해하든지, 성전에 시종드는 여인과 동침하든지, 어떤 제재도 가하지 않고 포기해버렸습니다. 두 아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브람은 아들 같은 롯을 방임했습니다. '너 멋대로 하라'고.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자식 같은 열두 제자를 곳곳을 다니며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교육하고 양육합니다. 3년 동안 함께 먹고 함께 마시고 함께 자고, 예수님은 당신의 삶으로 그들에게 직접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설교하시고 때로는 강하게 질책하기도 하고 때로는 달래고 어르기도 해주셨습니다. 가끔씩 주님은 둘씩 둘씩 짝지어서 실습도 보내주셨습니다.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막 6:7-9)
예수님은 제자들을 온전한 신앙 인격으로 세우기 위해서 가끔씩 이렇게 둘씩 둘씩 여섯 그룹을 만들어서 실습도 보냅니다. 가서 돌아와서 선교보고도 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적극적으로 그들의 보고를 듣고 피드백도 해주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이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3년 후에 부활하고 승천하시고 나면 제자들만 이 땅에 남아야 되는데, 이들이 이 땅에서 독립된 신앙 인격으로 교회를 세워가고 이끌어 가기에 부족함 없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주님께서 3년 동안 열과 성을 다해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제자는 실패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부모가 자녀를 포기하겠습니까? 싸우기 싫다고, 귀찮다고. 우리 교회학교도 한 영혼도 포기해서는 안 되고 가정에서도 우리 자녀를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우리 자녀, 우리 가정의 믿음의 자녀, 우리 교회 공동체에서 자라나고 성장하고 있는 우리 영혼들, 교회와 가정이 하나 되어서 이 자녀를 믿음 안에서 독립된 신앙 인격으로 스스로 설 수 있을 때까지 온전히 세워줘야 됩니다. 이것이 부모와 교회의 역할입니다.
아브람은 그런 책임을 방임했습니다.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리라.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리라.' 멋진 말처럼 보이지만 '이제는 네 갈 길을 가라. 너와는 어떤 말도 하기 싫다'는 방임 이외에는 다름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에 사로잡힌 선택
롯은 아브람의 이 말을 듣고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결정합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창 13:10-11)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롯의 신앙 상태 현주소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눈을 들어'라는 말씀. 롯의 신앙은 듣는 신앙이 아닙니다. 롯의 신앙은 보는 데 머물러 있습니다. 무엇을 보았습니까? 물이 넉넉한 소돔 땅을 보았습니다. 농사짓기에 좋은 땅, 목축하기에 좋은 땅을 보았습니다.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다 했습니다. 여호와의 동산은 에덴동산입니다. 그러나 롯은 에덴동산을 본 적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핑계입니다. 그의 본심은 애굽 땅에 있었습니다.
애굽을 보고 왔지 않습니까? 그가 애굽을 보고 얼마나 시험에 들었겠습니까? 하나님을 얼마나 원망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땅을 주시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나일강의 풍성함과 나일강 유역의 풍족한 아름다움과 넓은 목초지와 농사 잘 되는 땅을 보고 와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땅은 기근이 있는 땅인가?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이런 땅을 주지 않고 저런 말라 비틀어진, 기근이 있는 땅을 우리에게 주시는가?
롯은 삼촌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애굽에 내려왔으면 여기 정착하고 살아야지, 왜 다시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는가? '기회만 있으면, 나는 기회만 있으면 애굽 땅과 같은 땅을 찾아서 떠나리라.' 마음속에 소원을 가지고 마음의 포부를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장막을 따로 짓고 독립생활을 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몫으로 한 몫을 받아서 자신의 가축을 기르기 시작합니다. 독립을 준비한 것입니다. 차근차근, 차곡차곡 준비했습니다. 그런 롯에게 아브람은 방임으로 일관합니다. 결국 롯은 소돔 땅으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의미 있는 한 절 말씀을 우리에게 남깁니다.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창 13:13)
롯은 소돔 사람이 악하고 하나님 앞에 죄인이었던 것 신경이나 썼을까요? 롯에게는 이것은 전혀 신경 쓸 거리가 아닙니다. 오직 보이는 것이 전부였고 눈앞에 있는 이익이 전부인 개미 같은 존재인 롯에게는 당장 잘 먹고 잘 사는 것, 당장 그 땅에 가서 풍요롭게 사는 것, 이것만 생각하고 달려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아브람은 아들같이 기른 롯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 시점에서 애굽에서 가지고 온 가축과 은과 금이 과연 축복이었는가 생각해 보셔야 됩니다. 축복이었습니까? 재앙이었습니까? 그것은 결론적으로 말하면 저주였고 재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노동하지 않은 것, 일확천금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것은 사탄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개입하셔서 사래를 돌려주셨습니다. 그러면 아브람은 사래를 돌려받은 그 대가로 만족해야만 했습니다. 바로에게 받은 가축과 은과 금은 돌려주고 와야 옳았습니다.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내려가서 많은 재산을 가지고 돌아왔지만 결국 그 돈 때문에, 그 가축 때문에 사랑하는 조카 롯의 믿음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결론
오늘 우리는 어떤 인생을 살고 계십니까? 눈앞에 보이는 것만 좇아 살지 말기를 바랍니다. 롯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고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떠나서 소돔 땅으로 떠나는 어리석은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 자녀들, 어떤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말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강구하고,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해서 그들을 믿음의 자녀로 세우는 일에 힘써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말씀 깨닫고 기억하고 실천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울타리를 떠나서 다시 돌아올 때 가축과 은과 금을 가득 안고 돌아옵니다. 그러나 이것이 불편해서 하나님께 회개하고 예배드렸지만 죄의 결과와 흔적은 오로지 자기의 몫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 오늘 우리에게 아브람의 이 이야기가 많은 교훈을 줍니다. 삼가고 돌이켜 죄짓는 일이 없도록 우리의 삶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하옵소서. 주여, 우리가 사랑하는 자녀들을 방임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포기하지 않고,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강구하는 깨어 있는 부모, 믿음의 부모, 믿음의 교회학교 공동체 되게 하옵소서. 롯처럼 보이는 것이 전부인 인생을 살지 않도록 도우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 전념하게 하옵시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의 자리를 굳게 지키는 하나님의 자녀 백성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