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강 /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13:14-18)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본문: 창세기 13:14-18

기원전 6세기 고대 그리스의 자연 철학자들은 자연의 운행을 관찰하며 세상의 법칙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당시에는 미시 세계를 관찰할 수 있는 기구도 기술도 없었기에, 그들은 자연의 운행 방향을 통해 세상을 설명하려 시도했습니다. 자연 철학자 중 헤라클레이토스라는 인물은 "세상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강물에 들어가 있으면 그 강은 끊임없이 흘러가고 흘러오기 때문에, 같은 강물에 서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는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은 많은 사람에게 큰 파급 효과를 주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럴듯합니다. 사람도, 건강도, 우정도, 사랑도 영원한 것이 없지 않습니까? 어제까지 나를 그토록 사랑한다고 말했던 사람이 오늘 갑자기 안면을 바꾸기도 하고, 40년, 50년 친하게 지낸 친구가 나를 배신하고 떠나가는 일도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건강도 영원하지 못하고 물질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가르침을 따라가면 진리가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영원토록 변함없는 것인데, 모든 것이 변한다고 해버리면 진리가 어찌 설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에서 아브람 역시 모든 것이 변하는 현실을 극단적으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조카 롯이 자신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아브람을 찾아오셔서 말씀하시고 방향을 주십니다. 오늘 이 말씀이 급격한 변화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낙심한 자에게 찾아오신 하나님

아브람은 롯의 영적 상태와 신앙생활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홀로 서지 못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툼이 싫어서, 분쟁하기 싫어서 롯을 놓아 버렸습니다.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겠다." 듣기에는 멋진 말처럼 들리지만, 이는 롯의 신앙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이미 물질에 마음이 쏠려 있었던 롯은 아브라함의 이 말이 끝나자마자 소돔 땅으로 떠나 버렸습니다.

아브람에게 롯은 어떤 존재였습니까? 아브람의 동생 하란이 낳은 아들로 아브람의 조카였지만, 조카 이상이었습니다. 아들보다 더 끔찍이 아꼈습니다. 아브람과 사라에게는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롯은 훌륭한 대안이었습니다. 롯을 아들로 양자 삼아 입적시키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믿고 신뢰했던 롯이 그만 자기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비가 오는 것처럼 침침해집니다. 마음이 몹시 불편합니다. 고개를 숙이고 어떤 일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창 13:14)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낙심천만에 빠져 있고 인생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것 같이 상심에 빠져 있는 그를 하나님이 찾아오시고 첫 번째 하신 말씀이 "눈을 들라, 동서남북을 바라보라"였습니다. "눈을 들라"는 말씀을 보면 지금 그의 상태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어떤 일도 귀찮습니다. 이제는 내 인생의 낙이 없다고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아들보다 더 끔찍히 아끼고, 아버지 죽고 나서 거두어 주었던 조카가 나를 떠나다니. 고개를 숙이고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떠난 롯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무엇을 바라볼 것인가

우리가 바라보는 시선은 우리 마음의 지향점이요, 우리 마음의 표현입니다. 삶이 힘들어도 고난이 닥쳐도 미래를 바라보는 사람의 눈빛은 살아 있습니다. 먼 미래를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실이 괜찮아도 미래가 불안한 사람은 눈빛이 흔들립니다.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현재가, 그리고 미래가 결정됩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 땅의 사람들은 세 가지에 시선을 고정시킵니다.

첫 번째가 물질입니다. 많은 사람이 물질을 따라 살지 않습니까? 돈 되는 것이라면 자신의 목숨이라도 내어 놓습니다. 열심히 돈을 봅니다. 돈을 따라서 살아가고 물질을 따라 살아갑니다. 롯이 그랬지 않습니까? 애굽에 내려갔다가 비옥한 땅을 보았습니다. 농사 잘 되고 목축 잘 되는 땅을 보았습니다. 나는 앞으로 기회가 되면 저런 땅에 가서 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소돔 땅으로 떠나 버렸습니다. 물질을 따라간 전형적인 사람이 롯입니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사람을 바라보고 살아갑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시선이 고정되어 있습니다. 사랑에 목마른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나를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에게 시선이 고정되어 있습니다. 명예욕에 목마른 사람은 나를 출세시켜 줄 수 있는 사람에게 시선이 고정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만났던 수가 성 여인은 사랑에 목마른 여인이었습니다. 남편 다섯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날 때 그때 함께 살고 있는 남자도 진짜 남편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을 따라, 사랑에 목이 말라서 시선이 사람에게만 고정되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그렇게 사람을 따라 삽니다.

세 번째 부류의 사람은 과거의 영광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출 16:3)

출애굽 여정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시선이 과거로 회귀하고 있습니다. 애굽의 고기 가마 곁에서 고기 구워 먹고 있었을 때, 떡을 배부르게 먹고 있었을 그때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지금 현실이 무척 고단하고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노예로 살던 시절은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었습니다. 그저 배불리 먹고 있었을 때, 그때를 그리워하는 악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물질에 목을 매고, 사람을 따라다니고, 과거에 내가 잘 나갔을 때 그때 참 좋았는데 하며 미래 지향적이지 않고 과거 지향적인 사람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시선을 달리하여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 12:2)

어떤 예수님을 보자고 합니까?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합니다. 예수님이 온전하게 하시는 분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온전하게 한다는 말이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를 완전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완전하게 될 수 있습니까?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땅의 고통과 이 땅의 죄에서 나를 구원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다시 돌아가 봅시다. 과연 물질이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습니까? 돈이 많으면 삶을 편안하게 만들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많은 물질이 우리를 구원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물질이 주는 허무함에 빠져서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이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습니까? 나에게 명예를 가져다주는 사람, 사랑을 채워 주는 사람이 나를 구원할 수 있습니까? 과거의 영광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습니까? 물질도, 사람도, 과거도 나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이 땅에 오시고, 나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시고, 나를 위해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온전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우리의 시선을 다시 교정해야 합니다. 어디에 눈을 두고 계십니까? 물질입니까? 사람입니까? 과거입니까? 부디 예수님, 십자가에 달린 주님 한 분을 바라보고 우리 모두 온전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처음 언약을 기억하라

그렇다면 예수를 바라본다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방향을 주신 말씀, 이 말씀을 부여잡고 말씀 따라가는 것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실 때 그에게 분명히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땅에 대한 약속이고, 두 번째는 자손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그 말씀을 분명히 그에게 하셨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만 사람에게 시선이 갔습니다. 롯에게 시선이 갔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다시금 그의 시선을 교정하여 주십니다. 내가 너를 불렀을 때 주었던 첫 번째 말씀, 언약을 기억하라. 그 첫 말씀, 땅을 다시 언급하십니다.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창 13:15)

하나님은 아브람을 처음 불렀을 때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는 보여 줄 땅이었습니다. 아직까지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보이는 땅입니다. 이미 보여 준 땅입니다. 이제 여기서 아브라함의 믿음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아브람은 지금까지 살면서 네 종류의 땅을 경험했습니다. 첫 번째는 갈대아 우르입니다. 그 땅에는 우상이 많았습니다. 먹고는 살 만했습니다. 문명이 발달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있었습니다. 크고 작은 전쟁과 다툼이 있었고 우상이 있는 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하란으로 갔습니다. 두 번째가 하란 땅입니다. 하란 땅은 죽은 동생의 이름과 똑같습니다. 과거의 환영에 사로잡혀 있는 땅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애굽 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훈련소인 가나안 땅을 떠나서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 땅은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전쟁이 없었습니다. 강력한 바로가 다스리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 없습니다. 땅도 비옥합니다. 농사짓기 좋고 목초가 좋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 땅을 아브라함에게 준 적이 없습니다. 네 번째 땅이 여기 이 보이는 땅입니다. 가나안 땅입니다. 그런데 이 가나안 땅에는 기근이 있습니다. 이른 비가 내리지 않고 늦은 비가 내리지 않으면 농사 짓기 어렵습니다. 가축을 목축하기도 어렵습니다. 어떤 땅을 선택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애굽을 준 적이 없습니다. 내가 네게 준 땅은 하늘에서 비가 내려야만 농사 지을 수 있는 땅, 목축할 수 있는 땅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셨으니 참 좋은 땅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셨습니다. 나는 기쁨으로 받겠습니다. 이 믿음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롯은 어땠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버리고 애굽을 흠모했습니다. 애굽 땅을 마음에 품었습니다. 그리고 그 땅과 가장 비슷한 소돔 땅으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 시대의 많은 젊은이들이 부모를 원망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부모를 원망하고, 내가 살아가는 생활 환경을 원망하고, 이 나라를 원망합니다. 내가 여기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일터를 원망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분명히 주신 곳인데 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보이는 땅을 사모하는 감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가정도, 신앙공동체도, 이 나라와 이 민족도, 이 땅도,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일터도, 모두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선물입니다. 이 보이는 땅을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하면 감사로 받고, 그 감사가 열매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허상을 내려놓을 때 하나님이 일하신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자손에 대한 약속을 다시 환기시켜 주십니다.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창 13:16)

하나님은 아브람을 처음 불렀을 때 네 자손이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제 다시 이 약속을 환기시키고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했습니다. 아브람과 사라를 통해서 생명이 태어날 것이라는 약속을 믿지 못하고, 그들은 최후의 보루로 롯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늙고 병들어 가고, 나이는 점점 들어가는데 하나님이 자녀를 주시지 않으니, 나에게는 조카가 있다, 이 조카가 내 생애의 최후의 보루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그것도 그뿐이고 나는 이 조카를 통해서 내 유업을 이어가겠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최후의 보루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가 떠나 버렸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는 낙심에 빠져 있습니다. 내가 세운 계획이 이제 완전히 무력화되었을 때, 나는 이런 계획을 세웠는데, 나는 이런 꿈을 꾸었는데, 이 꿈이 무너졌을 때, 그때는 낙심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입니다. 주로 상실한 사람, 열심히 있는 사람, 계획이 꼼꼼한 사람이 이런 딜레마에 빠집니다. 이러한 계획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세웁니다. 플랜 A, 플랜 B, 플랜 C, 그다음 그다음 그다음을 다 세워 놓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획은 내 계획과 전혀 달랐습니다. 아브람의 최후의 보루는 롯이었지만, 하나님은 롯이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라야 네 후사라 할 것이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롯이 떠났습니다. 이제는 낙심합니다. 벼랑 끝에 섭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롯은 허상이라고, 허상인 롯을 쫓지 말라고, 이제는 롯이 떠났으니 내가 너에게 일할 시간이 되었다고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과연 롯에서 끝났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롯이 떠난 후에 그다음 플랜 B를 가져왔습니다. 그의 종 다메섹 엘리에셀입니다. 하나님께 말합니다. 하나님, 저에게는 후사가 없으니 제 종 중에 똘똘한 자가 있습니다. 다메섹 엘리에셀입니다. 이 사람을 세워서 내 후사로 삼겠습니다. 하나님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너의 몸에서 날 자라야 네 후사라 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또 말씀하십니다.

시간이 더 지났습니다. 아브람 거기서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세 번째 계획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마엘도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를 내보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플랜 A인 롯, 플랜 B 다메섹 엘리에셀, 플랜 C 이스마엘, 다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서 이삭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만약에 아브람이 처음부터 하나님 계획에 순종했더라면,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하나님께서 이 가정에 자녀를 주시는 시간은 어쩌면 더 빨라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지 않고 자신의 시간, 자신의 계획을 끊임없이 추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이 다 무너지고 난 후에 하나님께서 원래 약속하시고 원래 계획하셨던 대로 그 가정에 이삭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우리 모두가 다 자기 나름의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계획이 무너졌다고 낙심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일하실 차례입니다. 나의 계획이 촘촘하면, 이 계획이 잘 준비되어 있으면,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손길과 하나님의 역사가 개입될 자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은 일하지 않고 우리가 일하려고 하면, 그만큼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내 계획이 무너지면 그때 기뻐하십시오. 드디어 하나님이 일하시게 되었구나, 이제 하나님께서 일하실 시간이 되었구나, 미련하고 연약하고 무지한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드디어 일하시는구나. 하나님의 손에 우리의 인생을 담아 맡겨 두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의 계획보다도 위대하고 놀라워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무너진 인생을 새롭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일어나 행하라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이렇게 두 가지 약속을 다시 한번 기억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은 그에게 일어나 걸어 보라, 두루 다녀 보라, 영적 침체에서 일어날 것을 촉구하십니다.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창 13:17)

아브람은 지금 주저앉아 있습니다. 떠나간 롯이라는 허상만 붙잡고 있습니다. 떠나간 롯의 빈자리, 롯의 뒤통수만 바라보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고개를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하셨습니다. 이제 그것으로 부족하다. 그러니 이제 일어나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더 이상 영적 침체에 빠져 있지 말라, 이제는 일어나서 힘을 내고 두루 다니고 순종하라는 말씀입니다. 행동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간이 지나다 보면, 세월이 흘러가다 보면 떠나가는 것이 참 많습니다. 젊을 때는 나를 중심으로 많은 것들이 몰려옵니다. 물질도 들어오고, 건강하고, 사람도 몰려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건강도 떠나가고, 사람도 떠나가고, 물질도 떠나갑니다. 심지어는 사랑했던 자녀들조차도 다 떠나갑니다. 그러면 떠나간 뒤에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그들이 떠난 빈자리, 물질이 사라진 빈자리, 그것만 바라보고 침체되어서 주저앉아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주었던 말씀을 기억하라. 그리고 일어나 두루 다녀 보라. 힘을 내라. 행동하라. 순종하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여 보라.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여정을 다 끝내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땅을 분배했습니다. 열두 지파에게 땅을 골고루 다 분배합니다. 그런데 요셉 자손들은 마음에 불평이 생겼습니다. 므낫세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가 여호수아를 찾아갔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준 땅이 너무 좁습니다. 우린 두 지파입니다. 우리에게 더 넓은 땅을 주십시오. 그때 여호수아가 그들을 책망합니다. 너희는 능력이 있는 지파이니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너희 스스로 개척하라. 불평하지 말고 원망하지 말고 일어나 걸어 보라. 스스로 적들을 내몰고 개척하라. 가나안 일곱 족속을 무찔러라. 일어나 행동하라. 방향을 주고 책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가에 가셔서 38년 된 병자를 보셨습니다. 그 병자는 원망과 불평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물이 동할 때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서 제가 아직까지 이 모양으로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예수님께서 회당에 가셨습니다. 한 사람이 저 구석에 웅크리고 있습니다. 한편 손 마른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그를 부르셨습니다. 사람들 가운데 세웠습니다. 네 손을 내밀어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자 그 사람이 손을 내미니, 마른 손이 펴졌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일어나 그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실 때 그는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영적 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2년이 넘게 이어지는 코로나 상황이 우리에게 많은 스트레스를 주고 영적으로도 침체가 됩니다. 성도들을 만나고 기쁨의 교제를 하고, 교회에서 공궤하고 떡을 떼고 함께 사랑을 나누어야 하는데 지금 상황이 그렇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때를 따라 분별하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이런 시기에는 내적인 은혜를 도모하고, 이런 시기에는 하나님과 일대일 관계에서 친밀함을 도모하시고, 이제 우리 마음에 포부를 가지기를 바랍니다. 코로나 시기가 끝나고 나면 이제 우리가 함께 모여서 신앙생활하게 되면, 그러면 나는 어떻게 신앙생활을 할까? 어느 부서에서 어떻게 섬길까?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할까? 가족들이 모여 함께 그다음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이전에 내가 이런 생활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지 못했다면, 이제는 그걸 고쳐서 행동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다. 지금까지 웅크려 있었으나 이제는 내적인 에너지를 밖으로 표출시키며 신앙생활을 하겠다. 결단하시고 하나님과 아름다운 교제를 꿈꾸시기 바랍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일어나 너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고, 동서남북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그 말씀대로 동서남북으로 두루 다니고,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시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결론

이제 아브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일어나서 예배를 드립니다.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창 13:18)

아브람은 물론 매번 예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가나안 땅에서 예배를 드린 장면이 세 번째입니다. 첫 번째는 하란 땅에서 가나안에 처음 도착했을 때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예배는 땅을 달라고 구하는 예배였습니다. 하나님, 살 만한 땅을 주십시오. 나를 여기 불러서 내가 순종하고 왔으니 이제는 좋은 땅을 보여 주십시오. 요청하는 예배였습니다.

두 번째 예배는 애굽에서 올라온 후에 드린 예배입니다. 이 예배는 회개와 감사의 예배였습니다. 하나님의 울타리를 떠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여기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의 울타리를 떠난 것에 대한 회개, 거짓말한 것에 대한 회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를 다시 되찾아 돌아오게 하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예배였습니다.

이 세 번째 예배는 또 다른 결단의 예배입니다. 롯이 이제는 허상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붙잡고, 이제는 말씀대로 살겠다는 결단의 예배입니다. 영적 침체에 더 이상 머물러 있지 않고, 더 이상 고개 숙이고 있지 않고, 이제는 일어나서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겠습니다. 결단의 예배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결단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떠나가는 것을 바라보고 그것을 붙잡고 있으면 우린 끊임없이 영적으로 침체될 것입니다. 하지만 다시 일어나서 하나님께서 최초에 우리에게 주셨던 말씀, 그 언약의 말씀을 붙잡고 다시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능력을 덧입혀 주시고, 그 능력과 함께 일할 수 있는 권능도 덧입혀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 은혜를 가지고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고 동서남북을 바라보시는 믿음의 백성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통해서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조카 롯이 자신을 떠나고 난 후에 마음이 울적하고 영적으로 침체되어 있는 아브람을 하나님께서 찾아오시고, 눈을 들라고 말씀하시고,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하시고, 처음 아브람을 불렀을 때 주셨던 말씀, 땅의 약속, 자손의 약속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머물러 있지 않고 일어나 두루 다녀 보라, 행동할 것도 말씀하셨습니다.

주여, 오늘 우리가 무엇 때문에 주저앉아 있습니까? 상실감이 있습니다.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한 마음의 상처가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무너져 있습니다. 아버지, 다시 일어서기를 원합니다. 시선이 물질이 아니라, 사람이 아니라, 과거가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되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가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가 구원받고 온전하게 되기를 원하오니, 주여 우리의 시선을 다시 한번 고정시켜 주옵소서.

아브람은 찾아오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결단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결단으로 이어지기를 원합니다. 예배를 통해서 다시 힘을 얻고 결단하고, 다시 세상을 향하여 시선을 바꾸고 고정시키며 달려가는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를 승리하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