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렘 왕과 소돔 왕
본문: 창세기 14:13-24
2차 세계대전 직전, 안네 프랑크는 아버지, 어머니, 언니와 함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치의 세력이 유럽 전역을 뒤덮고, 히틀러가 광기에 가까운 집착으로 유대인들을 수용소에 보내어 학살하기 시작하자, 안네의 가족도 더 이상 드러난 곳에서 살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아버지 직장 뒤편에 은신처를 마련하여 숨어 지내기 시작한 것이 1942년이었고, 그때부터 1944년까지 거의 3년간, 안네는 열세 살에서 열다섯 살까지를 은신처에서 보냈습니다.
그곳에서 기록한 일기가 바로 『안네의 일기』이며, 종전 후 이 일기는 전 세계인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그러나 안네의 가족은 은신처에서 3년 이상 머물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숨어 있는 곳을 알고 있던 밀고자가 고발했기 때문입니다. 가족 전원이 수용소로 끌려갔고, 아버지를 제외한 모든 가족이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과연 안네의 가족을 밀고한 자가 누구였는지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2022년 1월, 전직 FBI 요원들로 구성된 조사위원회가 마침내 밀고자를 밝혀냈습니다.
용의자가 약 서른 명에 달했는데, 여러 기록을 거듭 검토한 끝에 판덴베르크라는 유대인 인물을 특정했습니다. 물론 그는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의문이 여전히 남습니다. 같은 동족 유대인이 왜 유대인인 안네의 가족을 고발했을까요? 그에게도 사정이 있었습니다. 나치는 유대인들을 동원하여 동족을 색출하는 작업을 진행했고, 그 대가로 판덴베르크 가족의 안전을 보장해 주었습니다. 결국 판덴베르크는 자기 가족의 안전을 담보로 동족, 특히 안네의 가족을 고발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우리가 그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그 일의 잘잘못을 쉽게 따지기 어렵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 입장에 처한다면,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인간은 누구나 자기중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면,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고 판단하며 결정합니다. 인격이 성장하고 성숙한다는 것은 이 자기중심성을 어느 정도 극복하고 이겨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 초기에는 극단적으로 자기중심적이지만,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해 가면서 자기중심성을 탈피하고 하나님 중심, 이웃 중심으로 바뀌어 갑니다.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도 여전히 좌충우돌합니다. 실수도 있고, 실패도 있고, 문제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성장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는 하나님 중심으로 점점 바뀌어 가고 있으며, 자기중심성을 탈피하고 있습니다.
떠나간 롯을 향한 아브라함의 미련
아브라함은 롯이 그를 떠난 이후 고개를 숙이고 실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오셨습니다.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하셨고,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다녀 보라"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일어나 용기를 내어 그 땅에서 열심히 살아갔습니다. 반면, 가나안을 떠나 물질을 쫓아, 돈을 쫓아 떠나간 롯과 롯의 가정은 왕들의 전쟁에 휘말렸습니다. 포로가 되고, 잡혀가고, 물질을 모두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그리고 아브라함 마음에서, 그 주변에서 일어난 사건이 오늘 본문입니다.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알리니 그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주하였더라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사람들이더라" (창 14:13)
이 13절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가지 정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아브라함이 이제 가나안 땅에 완전히 뿌리내리고 정착했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이 그곳의 유력한 사람들과 동맹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마므레, 에스골, 아넬과 함께 동맹을 맺었습니다. 동맹을 맺는다는 것은 평상시에는 목초지를 공유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나안 땅에는 목초지가 풍성하지 못했기에, 좋은 목초지가 있으면 동맹을 맺은 사람들과 함께 가축을 방목하고 돌보았습니다. 그러나 유사시에는 동맹을 맺은 사람들에게 위협이 닥치거나 외부의 침입이 있으면, 목숨을 걸고 함께 지켜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실 이방인이었습니다. 갈대아 우르를 거쳐 하란으로,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제 이곳에서 이 사람들과 동맹을 맺고 뿌리를 내리며, 이들과 함께 충실한 교제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13절이 주는 두 번째 정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여전히 떠나간 롯을 잊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농사짓고, 뿌리 내리고, 동맹을 맺고 열심히 살고 있었으나, 여전히 아브라함의 마음과 눈은 떠나간 롯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는 통신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입니다. 왕들의 전쟁이 났고, 롯과 롯의 가족은 포로로 잡혀갔으며, 재물은 모두 빼앗겼습니다. 이 사실을 정확하게 알기란 쉽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아브라함의 귀에 들어온다 해도,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분별해 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거기에 심어두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핫라인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롯에게 관심이 많았습니다. "만약 롯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면, 그의 가정에 어떤 상황이 생기면, 즉시 나에게 와서 보고해 달라"고 사람을 심어두었습니다. 그래서 전쟁이 일어나고 롯과 롯의 가정이 휘말리게 되자, 도망한 자가 와서 즉각적으로 그 사실을 알려준 것입니다.
여전히 아브라함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하나님은 땅의 약속과 자손의 약속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여전히 떠나간 롯에게서 마음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물질을 잃고, 사람이 떠나가면 미련이 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미련을 거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에 미련을 가지고 집착하면 현재에 문제가 생깁니다. 지나간 과거에 너무 목을 매고 있으면 현재도 불행하고 미래도 꿈꿀 수가 없습니다. 롯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네 손을 떠났으니 내가 다루고, 내가 책임지고, 내가 함께할 테니, 너는 이 땅에서 동서남북으로 행하고 종과 횡으로 행하여, 여기서 열심히 농사짓고, 이 땅에서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눈은 여전히 롯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지나간 것에 집착하면 현재를 망치기 쉽습니다. 지나간 사람에게 집착하고, 잃어버린 물질에 집착하고, 과거에 후회되는 일만 자꾸 머릿속에 맴돈다면 우리에게 미래가 있겠습니까? 우리 가정과 자녀에게 어떻게 꿈꿀 수 있는 미래가 있겠습니까? 이제 지나간 과거는 하나님의 손 안에, 역사 안으로 맡기고, 현재와 미래를 꿈꾸고 도모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현재도 암울하고 미래도 암울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 없이 뛰어든 무모한 전쟁
아브라함은 여전히 과거의 끈을 놓지 못하고 롯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시는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됩니다.
"아브람이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그와 그의 가신들이 나뉘어 밤에 그들을 쳐부수고 다메섹 왼편 호바까지 쫓아가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더라" (창 14:14-16)
아브라함이 318명의 가병을 거느리고 야간 기습작전을 감행했습니다.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승리한 자들은 이미 승리했기 때문에 경계를 느슨하게 늦추고 있었습니다. 그런 자들을 밤에 쳐들어가서, 경계가 느슨한 틈을 타서 롯과 롯의 가족과 포로들, 인질들을 모두 구출하고, 빼앗겼던 재물까지 한순간에 다 찾아서 돌아왔습니다. 여기 이 318명은 평상시에는 목자들이었습니다. 양을 치고, 소를 치고, 짐승을 먹이며 동맹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유사시에는 이들이 전사가 됩니다. 용맹스러운 전사들을 이끌고 밤에 가서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면 이 전쟁은 무모한 도전이었습니다. 사실 정면으로 제대로 싸운다면, 318명을 거느리고 있다 하더라도 그돌라오멜과 그 일당을 어떻게 대적하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무모한 도전을 한 이유는 오직 롯밖에 없습니다. 롯과 롯의 가정을 건져오기 위해서 아브라함은 이런 무모한 시도를 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는 성공했습니다. 대성공이었습니다. 사람도 찾아오고 물질도 찾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살펴보면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브라함이 한 이 행동이 과연 옳은 행동이었을까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아브라함은 결코 나서서는 안 되는 전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지금 직접 롯과 롯의 가정을 손보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롯을 사랑하셔서 그를 다루고 계셨던 것입니다.
롯이 가졌던 물질, 그것은 거짓말로 얻은 물질이 아닙니까? 애굽에 내려가서 아브라함과 사라와 롯이 공모하여 거짓을 도모해서 얻어온 물질입니다. 이 물질을 불리기 위해서 소돔 땅으로 건너갔습니다. 그 땅 사람들이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인지 아닌지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부자만 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여전히 롯을 사랑하셔서 그의 인생에 개입하시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롯을 포로 되게 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재물도 거두시고 사람도 거두어 가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롯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롯이 포로로 잡혀서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겠습니까? "이제 내 인생은 끝났구나." 지나간 시절부터 지금까지 자기의 인생을 반추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시간이 되고 때가 되면, 하나님은 물질은 거두시고 롯과 롯의 가정과 자녀들, 그 생명은 건져주실 것입니다. 빈털터리가 된 롯이 이제 갈 곳이 어디밖에 없겠습니까? 소돔 땅에 어떻게 삽니까? 아는 사람도 없고, 물질도 없고, 정착할 땅도 없는데, 아브라함에게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빈손 들고 돌아온 롯을 아브라함이 맞아주고, 그곳에서 다시 새출발하면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였고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롯을 사랑하셔서 왕들의 전쟁에 휘말리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하나님의 계획을 엉망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자기가 끼어들어가서 롯과 롯의 가정과 인질을 다 구출해 오고, 물질까지 되찾아서 돌려주고 말았습니다. 이제 롯이 돌아오겠습니까? 자기도 자유롭게 되었고 물질까지 다시 되찾아왔는데, 이제는 더 단단히 준비하고 꼼꼼하게 자기를 살피며, 가병들을 두고 자신의 생명을 지키고 보호하려 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이 개입해서 하나님의 계획과 일을 망치고 말았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아브라함이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과거와 단절하게 하시고, "롯의 문제는 내가 책임지겠다" 하셨는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일에 자기가 끼어들어갔습니다. 떠나간 롯을 잊지 못하고 여전히 관심을 거기에 두고 있다 보니, 기도할 일을 잊어버리고, 롯이 위기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단 한 번도 하나님 앞에 무릎 꿇지 않았습니다. 단 한 번도 "하나님, 이 전쟁에 제가 들어가야 됩니까? 아니면 머물러야 됩니까?" 묻지 않고, 자기 멋대로 하나님의 계획에 뛰어들어가 버린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멈춰야 될 때가 있고, 뛰어들어 일해야 될 때가 있는데, 반대로 합니다. 일해야 될 때는 일하지 않고, 일어서서 뛰어들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려야 될 때는, 성급하게 들어가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망치는 일이 우리에게 왜 없겠습니까? 기도하지 않아서 생겨난 일입니다.
특히 가정의 부모들이 자녀 인생에 개입하는 것이 이런 심각한 문제를 가져옵니다. 자녀 인생에 개입해야 될 때가 있고, 멈춰야 될 때가 있습니다. 해야 될 때가 있고, 하지 말아야 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분별하는 것이 사실 쉽지 않습니다. 자녀 인생에 너무 많이 개입하면, 하나님이 극단적인 방법으로 부모와 자녀를 분리시킬 때도 있습니다.
야곱과 요셉을 보십시오. 야곱이 요셉을 얼마나 아꼈습니까? 채색옷을 지어 입혔습니다. 자신의 상속재산을 모두 그에게 주겠다고, 모든 것을 다 물려주겠다고 결심까지 했습니다. 가정은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형제들은 요셉을 미워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일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채색옷을 벗기고, 요셉을 애굽에 보내버리셨습니다. 야곱과 요셉을 하나님의 손길로 친히 분리하신 것입니다. 가만히 두면 그 가정에서, 아버지가 들어가서 아들의 인생을 망치게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분리하셔서 아예 손대지 못하도록, 아예 죽은 줄 알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도 살리고, 그의 가정도 살리고, 요셉도 살리기 위해서 철저하게 분리시켜 놓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정말 들어가야 될 곳이 어딘지, 자녀들의 인생에 내가 개입하고 그들을 도와줘야 될 때가 언제인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일하시니 우리는 묵묵히 하나님의 손길과 일하심을 기대하고 지켜보며, 나는 가슴 아프지만 이때가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이니 눈물로 기도하는 때인지를 분별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지혜이고, 이것이 기도의 능력입니다. 아브라함이 롯을 정말 사랑했더라면, 오히려 더 뛰어들어갈 시간에 간절하게 엎드려 기도하고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를 구해야 옳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성급함으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망치고 말았습니다. 돈까지 되찾아 주고 말았습니다. 이제 롯은 영영 아브라함을 떠나고 맙니다.
두 세계 앞에 선 아브라함의 선택
어쨌든 아브라함은 승리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아브라함은 사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 자신의 승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가 승리하고 돌아오는 길에 그를 영접하고 맞이하러 나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소돔 왕입니다. 소돔 왕 입장에서 아브라함은 얼마나 고마운 존재였겠습니까? 소돔 왕은 역청 구덩이에 빠졌습니다. 굴욕을 겪었습니다. 12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이제는 당신을 섬길 수 없습니다" 하고 반항했습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참혹했습니다. 역청 구덩이에 빠지고 겨우 목숨을 부지했습니다. 백성들은 다 끌려가고, 물질도 다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았던 아브라함이 나타나서 그를 위기에서 건져주었습니다. 그를 영접하기 위해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소돔 왕 이외에 또 한 사람이 아브라함을 맞이하러 나왔습니다. 살렘 왕 멜기세덱입니다.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의 골짜기로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창 14:17-18)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성경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살렘 왕이라는 것은 예루살렘 왕이었다는 뜻이고, 살렘은 샬롬의 또 다른 변형 표현입니다. 평강의 왕, 평화의 왕이라는 뜻이고, 이분은 제사장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아브라함을 영접하기 위해서 나왔습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고, 한 사람은 세상의 왕입니다. 이 두 사람이 아브라함 앞에 서 있었습니다.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드리자는 의미입니다. 떡과 포도주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도구가 됩니다. "당신이 지금 위대한 승리를 얻고 돌아오지만, 이 승리는 당신의 능력으로 얻은 승리가 아닙니다. 말도 안 되는 전력으로 하나님께서 능력을 함께 하셔서 당신이 구한 승리이니,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립시다." 이런 의미로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맞이한 것입니다.
이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이 중요합니다.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창 14:19-20)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하고, 아브라함은 그에게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십일조 사건입니다. 여기 아브라함이 드린 십일조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자발적이요, 또한 이 십일조의 정신이 감사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이 승리를 얻을 수 없었는데, 자기도 무모한 전쟁임을 충분히 알고 있는데,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하나님이 도우셔서 결국 그를 승리하게 하시고, 안전하고 무사하게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 십일조를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예고하지 않고 나왔는데, 아브라함은 그 앞에서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겸손하게 하나님께 엎드리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와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반면, 소돔 왕은 아브라함에게 파격적인 제안을 합니다.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 (창 14:21)
파격적인 제안입니다. "사람은 나에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다 가져라. 전리품은 네가 다 가져도 좋다." 그런데 여기에는 소돔 왕의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물품을 네가 다 가지라고 돈을 주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의 돈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습니다. 공짜 같지만 절대로 공짜가 아닙니다. 몇 배의 대가가 그 속에 다 녹아 있고,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소돔 왕의 의도는 아브라함과 동맹을 맺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굴욕을 당했습니다. 그돌라오멜에게 한 번 대항했다가 역청 구덩이에 빠지고 겨우 생명을 부지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함께 동맹 맺은 세 사람, 그들과 함께라면, 이 용감한 318명의 전사들이라면 다시 한번 그돌라오멜을 대항해서 싸울 수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이제 내가 부끄럽고 치욕스러운 패배를 당했는데, 이제는 다시 한번 그들과 싸워서 이 지역의 패권을 가져가겠다." 소돔 왕은 큰 꿈을 가지고 아브라함에게 동맹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세상적으로 보면 아브라함에게 이것은 손해 볼 것이 없는 장사입니다. 그의 직영을 확장하여 소돔 지역까지 넓힐 수 있습니다. 소돔 왕의 의도대로 그의 손을 잡고 그돌라오멜과 싸워서 패권을 장악하면, 아브라함은 단숨에 실력자가 됩니다. 정치적인 입지도 넓힐 수 있고, 큰 부자가 될 것입니다. 입맛이 당기는 제안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제안에 아브라함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 오직 젊은이들이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지니 그들이 그 분깃을 가질 것이니라" (창 14:22-24)
거절했습니다. 318명의 가병들이 먹은 것을 제하고, 나와 함께 동맹한 자들의 분깃을 제하고, 나머지는 내가 실 한 오라기라도 취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더러운 세상의 이익을 취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한 것일까요? 아브라함에게 학습효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애굽에 내려가서 거짓말로 얻어온 수많은 물질, 그 엄청난 물질 때문에 이 가정이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습니까? 그 물질 때문에 롯의 믿음을 잃어버렸습니다. 그것 때문에 아브라함이 생명을 걸고 지금 롯을 구하러 가서 이런 상황까지 오지 않았습니까? 탐내지 말아야 될 물질, 내가 수고하고 땀 흘려서 얻은 것이 아닌 물질, 그 물질을 탐내다가 이 가정이 이렇게 박살 났습니다.
이제는 두 번 다시 세상에게 비굴하지 않겠다고, 세상에 굴종하지 않겠다고 결단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땅, 땀 흘려 수고한 가나안 땅에서 얻은 물질만, 이 물질을 가지고 소박하지만 아름답게 하나님 뜻대로 살겠다고 결단한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물질을 대하는 태도였습니다.
결론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아브라함 앞에 두 세계가 있었습니다. 살렘 왕의 세계와 소돔 왕의 세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세계와 세속적인 세계가 놓여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는 감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끼지 않고 모든 것을 다 드렸습니다. 그러나 세상 앞에서는 당당했습니다. 비굴하지 않았습니다.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않았고, 더러운 이익을 취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 앞에도 두 세계가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의 세계가 놓여 있고, 세상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떻게 반응합니까? 코로나 3년 차를 살고 있으나, 여전히 살게 하신 하나님, 굶어 죽지 않게 하신 하나님, 건강으로 인도하신 하나님, 우리 자녀들을 돌보시는 하나님, 우리 인생을 책임지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 앞에 우리는 너무 인색하지 않습니까? 물질뿐만이 아니라 내 헌신을 드리는 것도, 우리 시간을 드리는 것도, 우리의 열정과 마음을 담아 드리는 것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지나치게 인색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뛰어나서, 내가 지혜로워서, 내가 잘나서 지금 이 모든 것을 이룬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 앞에서는 한없이 비굴합니다. 작은 이익조차도 세상이 주는 이익을 놓치지 않으려고 하고, 그 앞에서 비굴하고, 그 앞에서 굴종적일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는 아낌없이 드리고 헌신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당당해야 합니다. "세상의 더러운 이익 때문에 내가 부자 되었다"고 사람들이 손가락질할까 봐, 그것을 부끄러워할 수 있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셔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자기가 뛰어들어가서 하나님의 계획을 망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성장하고 성숙하는 모습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 중심으로, 이제는 자기의 이익보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믿음도 좌충우돌하지만, 성숙하고 성장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온전히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앞에는 두 세계가 놓여 있습니다. 아브라함 앞에 살렘 왕 멜기세덱의 세계와 소돔 왕의 세계가 놓여 있었던 것처럼, 우리 앞에도 하나님의 세계와 세상의 세계가 놓여 있습니다. 주님,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는 헌신적이고, 세상에 대해서는 당당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앞에 인색하고, 세상 앞에 비굴한 인생 살지 않도록 도와주옵소서. 하나님 앞에 아낌없이 드리게 하옵시고, 세상에 대해서는 떳떳하고 당당하고 어깨 펴고 살아가는 믿음의 자녀 되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안에 뛰어들어가서 하나님의 일을 망치는 어리석음이 없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고 깨닫게 하옵시고, 내가 정녕 들어가야 될 때인지 멈추고 기다려야 될 때인지 분별하게 하옵시고, 우리 가운데 분별의 영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